우리는 역겨운 것에 마음이 끌려
:
정재연
까마득한 바닷속을 표류하며 숨을 쉴 수 있을 거란 기대로 수면 위까지 열심히 헤엄쳐 올라온 생명체가 나타난 걸까? 축축한 늪지대의 깊은 바닥에서 헤엄쳐 올라온 덕에 고인 물은 잔뜩 흐리기만 하다. 아니 탁하다. 전시장을 떠다니는 이 괴기한 생명체 조각은 살아 숨 쉬는 유기체이자 생물적인 기계 역할을 동시에 한다. 뉴 뮤지엄(New Museum) 4층에서 설치 조각가 이미래(Mire Lee)의 “Mire Lee: Black Sun” 개인전이 6월 29일부터 9월 17일까지 열린다. 그는 신체, 건축, 공포, 포르노그라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에서 영감을 받아 작동하는 조각, 설치를 통해 완전한 신체의 감각과 기술적 영역 사이에서 존재하는 특성들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이미래는 극단적인 삶의 공존 (혐오와 불안, 기쁨과 환희 정도가 아닐까)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 삶의 유한성에 대한 공포와 아름다움, 동물성과 상징성의 경계, 젠더와 여성성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서 이어오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모터 기계와 글리세린, 실리콘, 점토, 호스가 뒤엉켜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 되려 매혹적이다. 어둡고 칙칙한 전시장 안에서 느껴지는 멜랑콜리는 단순히 나만이 느끼는 불쾌함은 아닐꺼다.
Mire Lee, Endless House: Holes and Drips, 2022. Multiple ceramic sculptures on a scaffold, lithium carbonate and iron oxide glaze liquid, pump, motor, and mixed media, 71 x 39 2/5 x 157 2/5 in. (180 x 100 x 400 cm). Installation view: “The Milk of Dreams,” 59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Venice Biennale. Courtesy the artist and Venice Biennale. Photo: Sebastiano Pellion di Persano
Mire Lee, Untitled (My Pittsburgh Sculpture), 2022. Metal, silicone oil, resin, dosing pumps, steel wire ropes, barbed wire, and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Is it morning for you yet?,” 58th Carnegie International, Carnegie Museum of Art, Pittsburgh. Courtesy the artist and Tina Kim Gallery.
Mire Lee, As we lay dying, 2022 (detail). Casting clay, unfired clay, fired clay, pump, water spray, rebars, and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Courtesy the artist and Kunstmuseum Den Haag, Hague, Netherlands.
이미래는 이번 전시에서 불가리아-프랑스 페미니스트이자 철학자, 정신분석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1987년 저서『검은 태양(Black Sun)』 우울증과 멜랑콜리를 차용하여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흘러내리고 끈적끈적해 보이는 설치 조각을 통해 우울과 슬픔에 대한 감각, 존재의 의미, 관계에서 오는 고통에서 끌어올리는 절망을 나타낸다. 무거운 빛이 전시장 전체를 감싸고 바닥은 침묵하고 있다. 전시를 위해 특별 제작된 커다란 철재 소재의 공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으스스한 분위기와 함께 살육을 연상시키는 흘러내리는 패브릭, 시멘트를 연상시키는 걸쭉한 액체가 불쾌, 공포, 우울, 권태의 감정을 어떻게든 바깥으로 배출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멜랑콜리에 걸린 사람들에게 시간은 정지 되어있다고 정의한다. 이들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어떤 시간에 묶여 있는 것으로 본다. 그의 조각에서 끈적하게 흐르는 시멘트는 시간이 흐르면 굳는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속에서 감정과 기계의 경계들을 위반하고 뒤섞고, 불안정하게 하는, 다시 말하면 그로테스크한 경계선상의 신성한 창조물이다. 비정형(inform)적 작업을 극적으로 보이는 재료는 작품을 더 분명하고 확실하며,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번 신작에서 보여지는 촉각적 특성은 감정적인 공백과 더불어 심리적 상실을 애도하고 있었다. 고통을 삼키거나 가끔은 색깔도 없이 텅 빈 절망에 짓눌려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생기를 잃은 삶을 오히려 살기 위해 열광적으로 발버둥 친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그 발버둥은 어쩌면 탈출구다.
프로이트의 언캐니(uncanny)의 관한 이론을 살펴보면, 두려운 낯섦이라는 감정은 공포감의 한 특이한 변종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 오래전부터 새롭고 친숙하지 않은 것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어둠 속에 남아 있어야만 했으나, 어둠 속에서 나와버린 대상을 프로이트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무의식 속으로 억압되어 있어야만 했으나 의식으로 회귀한 상태이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남겨진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규와 동시에 영화 “괴물”에서와 같이 예측할 수 없는 괴생명체가 연상된다. 심해 깊은 곳 혹은 폐허 속에서 만들어진 위협적이고도 숭고한 ‘괴물’은 새로운 인간의 신체와 유기적 생태 속에서 피어난 존재다. 그의 작품을 더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선 크리스테바의 멜랑콜리를 이해하기 위한 쇼즈(chose)[1]에 개념을 알아야 한다. 신체와 담론을 ‘순응하는 야수적 고통’, ‘숭고하면서도 황폐한 고통’을 설명하는데 이 고통의 까닭은 아버지에게로 온다. 말하자면 내가 그 고통을 감당하는 것은 내가 그 고통이 타자의 욕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기본적인 인간 열정의 원인은 타 대상에 대한 욕망일 수 있겠다.
전시장 입구를 지나쳐 작품을 보기 위한 순간에도 막혀버린, 공간에 선 채 표류하는 세계. 비닐로 막힌 거대한 벽과 얇은 피부를 연상시키는 찢어진 천들은 고뇌와 공포 혹은 기쁨, 우울감 그 불가사의한 영역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Black Sun: Vertical sculpture>(2023) 은 공중에 매달린 괴생명체를 연상시키고, 슬픔에 빠져 이미 절망을 맞이하는 시체처럼 보인다. 마비된 몸의 상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는 자아도 아니고 이드(ca)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것은 아니다. 사물이자 조각으로써 움직이지 않는(실은 움직이는) 생명체로서 확인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이다. 보잘것없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짓누르는 ‘어떤 것’이다. 마찬가지로 <Black Sun: studio prototype #2, #3>(2023) 의 숭고하고 황폐한 이 덩어리는 고통을 짓누르는 돌덩이의 모습이다. 마치 내 존재 자체를 투영한 과중한 무의미의 영역으로 자신을 이끈다. 신체와 사회의 폐기물과 관련된 요소를 탐구하는 아브젝시옹(abjection)은 신체의 한 부분을 절단하거나 구성하는 행위의 표식은 육체의 구멍과 관계가 있다. 크리스테바는 “고름과 오물 등의 배설물들은 내 삶이 가까스로 힘겹게 죽음을 떠받치고 삶을 유지해 나가는 조건이다. 그곳이야말로 내 삶의 조건의 한계이다”라고 설명한다. 이 구멍은 오염된 대상의 분출구 역할을 한다. <Black Sun: Asshole sculpture>(2023) 을 보면 구멍을 통한 배출, 구토를 통한 부패한 것들의 배출 따위의 생물학적인 생존 차원에서 필수요건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카네기 인터네셔널 등 지난 프로젝트들을 살펴보자면, 신비롭고 묘한 점성의 액체를 통해 토해내고, 뿜어내고, 떨어뜨리고, 스며들게 해 더 지저분하고, 더럽게 때론 거칠고 추악할 정도의 ‘낯선 것’들을 만들어 낸다. 그의 재료 탐색은 실력은 지나치게 실질적인데,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한강 고수부지에서 나타난 ‘괴물’이라도 만들어 낼 기색이다. 겉으로 볼 수 없는 피부 속의 것들을 끄집어내어 형상화한 것은 생명을 유지 보존케 한다. 흘러내리는 액상과 점성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과거의 불투명했던 삶, 재료의 이질성은 우리가 몰랐던 타자의 욕망이다. 새로운 추악함과 악마적인 갈등 그리고 쓸모를 잃은 기계적 삶이 교차하는 그의 작업이 기대된다. 천한 물질들, 성적 차이의 흔적들, 오염의 물질들과 고장 난 기계는 혐오와 매혹스러운 극단적 결합은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켰고, 이내 자유로운 자아로 돌아온다. 아마 자유로운 자아로 돌아온 최종 종착지는 모성적인 품일지도 모른다. 어두운 구렁, 열기 없는 식어버린 태양, 차가운 냉혹함, 정지된 시간은 멜랑콜리의 세계이다.
다시 가라앉고 싶어, 깊숙이,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게.
[1] 멜랑콜리에서 비롯되는 ‘쇼즈’는 불어로 ‘그 어떤 것’, ‘그것’, ‘거시기’, ‘무’, ‘정동’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쇼즈는 상징적인 혹은 상상적인 영역에 어떤 질서를 따라 분절되는 타인과 상호 작용의 흔적을 옮겨 놓기에 생겨난다. 즉 이것은 그가 대상과 세상에서 경험함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분절된 타인과의 상호 작용이라 함은 생애 초기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말함인데, 상호 작용이 통합되고 원만하지 않고 끊어지며, 연결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쇼즈는 꿈꾸는 태양이고, 밝은 동시에 어두운 태양이다.
2023.07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ly.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우리는 역겨운 것에 마음이 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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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연
까마득한 바닷속을 표류하며 숨을 쉴 수 있을 거란 기대로 수면 위까지 열심히 헤엄쳐 올라온 생명체가 나타난 걸까? 축축한 늪지대의 깊은 바닥에서 헤엄쳐 올라온 덕에 고인 물은 잔뜩 흐리기만 하다. 아니 탁하다. 전시장을 떠다니는 이 괴기한 생명체 조각은 살아 숨 쉬는 유기체이자 생물적인 기계 역할을 동시에 한다. 뉴 뮤지엄(New Museum) 4층에서 설치 조각가 이미래(Mire Lee)의 “Mire Lee: Black Sun” 개인전이 6월 29일부터 9월 17일까지 열린다. 그는 신체, 건축, 공포, 포르노그라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에서 영감을 받아 작동하는 조각, 설치를 통해 완전한 신체의 감각과 기술적 영역 사이에서 존재하는 특성들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이미래는 극단적인 삶의 공존 (혐오와 불안, 기쁨과 환희 정도가 아닐까)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 삶의 유한성에 대한 공포와 아름다움, 동물성과 상징성의 경계, 젠더와 여성성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서 이어오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모터 기계와 글리세린, 실리콘, 점토, 호스가 뒤엉켜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 되려 매혹적이다. 어둡고 칙칙한 전시장 안에서 느껴지는 멜랑콜리는 단순히 나만이 느끼는 불쾌함은 아닐꺼다.
Mire Lee, Endless House: Holes and Drips, 2022. Multiple ceramic sculptures on a scaffold, lithium carbonate and iron oxide glaze liquid, pump, motor, and mixed media, 71 x 39 2/5 x 157 2/5 in. (180 x 100 x 400 cm). Installation view: “The Milk of Dreams,” 59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Venice Biennale. Courtesy the artist and Venice Biennale. Photo: Sebastiano Pellion di Persano
Mire Lee, Untitled (My Pittsburgh Sculpture), 2022. Metal, silicone oil, resin, dosing pumps, steel wire ropes, barbed wire, and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Is it morning for you yet?,” 58th Carnegie International, Carnegie Museum of Art, Pittsburgh. Courtesy the artist and Tina Kim Gallery.
Mire Lee, As we lay dying, 2022 (detail). Casting clay, unfired clay, fired clay, pump, water spray, rebars, and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Courtesy the artist and Kunstmuseum Den Haag, Hague, Netherlands.
이미래는 이번 전시에서 불가리아-프랑스 페미니스트이자 철학자, 정신분석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1987년 저서『검은 태양(Black Sun)』 우울증과 멜랑콜리를 차용하여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흘러내리고 끈적끈적해 보이는 설치 조각을 통해 우울과 슬픔에 대한 감각, 존재의 의미, 관계에서 오는 고통에서 끌어올리는 절망을 나타낸다. 무거운 빛이 전시장 전체를 감싸고 바닥은 침묵하고 있다. 전시를 위해 특별 제작된 커다란 철재 소재의 공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으스스한 분위기와 함께 살육을 연상시키는 흘러내리는 패브릭, 시멘트를 연상시키는 걸쭉한 액체가 불쾌, 공포, 우울, 권태의 감정을 어떻게든 바깥으로 배출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멜랑콜리에 걸린 사람들에게 시간은 정지 되어있다고 정의한다. 이들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어떤 시간에 묶여 있는 것으로 본다. 그의 조각에서 끈적하게 흐르는 시멘트는 시간이 흐르면 굳는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속에서 감정과 기계의 경계들을 위반하고 뒤섞고, 불안정하게 하는, 다시 말하면 그로테스크한 경계선상의 신성한 창조물이다. 비정형(inform)적 작업을 극적으로 보이는 재료는 작품을 더 분명하고 확실하며,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번 신작에서 보여지는 촉각적 특성은 감정적인 공백과 더불어 심리적 상실을 애도하고 있었다. 고통을 삼키거나 가끔은 색깔도 없이 텅 빈 절망에 짓눌려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생기를 잃은 삶을 오히려 살기 위해 열광적으로 발버둥 친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그 발버둥은 어쩌면 탈출구다.
프로이트의 언캐니(uncanny)의 관한 이론을 살펴보면, 두려운 낯섦이라는 감정은 공포감의 한 특이한 변종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 오래전부터 새롭고 친숙하지 않은 것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어둠 속에 남아 있어야만 했으나, 어둠 속에서 나와버린 대상을 프로이트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무의식 속으로 억압되어 있어야만 했으나 의식으로 회귀한 상태이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남겨진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규와 동시에 영화 “괴물”에서와 같이 예측할 수 없는 괴생명체가 연상된다. 심해 깊은 곳 혹은 폐허 속에서 만들어진 위협적이고도 숭고한 ‘괴물’은 새로운 인간의 신체와 유기적 생태 속에서 피어난 존재다. 그의 작품을 더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선 크리스테바의 멜랑콜리를 이해하기 위한 쇼즈(chose)[1]에 개념을 알아야 한다. 신체와 담론을 ‘순응하는 야수적 고통’, ‘숭고하면서도 황폐한 고통’을 설명하는데 이 고통의 까닭은 아버지에게로 온다. 말하자면 내가 그 고통을 감당하는 것은 내가 그 고통이 타자의 욕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기본적인 인간 열정의 원인은 타 대상에 대한 욕망일 수 있겠다.
전시장 입구를 지나쳐 작품을 보기 위한 순간에도 막혀버린, 공간에 선 채 표류하는 세계. 비닐로 막힌 거대한 벽과 얇은 피부를 연상시키는 찢어진 천들은 고뇌와 공포 혹은 기쁨, 우울감 그 불가사의한 영역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Black Sun: Vertical sculpture>(2023) 은 공중에 매달린 괴생명체를 연상시키고, 슬픔에 빠져 이미 절망을 맞이하는 시체처럼 보인다. 마비된 몸의 상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는 자아도 아니고 이드(ca)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것은 아니다. 사물이자 조각으로써 움직이지 않는(실은 움직이는) 생명체로서 확인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이다. 보잘것없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짓누르는 ‘어떤 것’이다. 마찬가지로 <Black Sun: studio prototype #2, #3>(2023) 의 숭고하고 황폐한 이 덩어리는 고통을 짓누르는 돌덩이의 모습이다. 마치 내 존재 자체를 투영한 과중한 무의미의 영역으로 자신을 이끈다. 신체와 사회의 폐기물과 관련된 요소를 탐구하는 아브젝시옹(abjection)은 신체의 한 부분을 절단하거나 구성하는 행위의 표식은 육체의 구멍과 관계가 있다. 크리스테바는 “고름과 오물 등의 배설물들은 내 삶이 가까스로 힘겹게 죽음을 떠받치고 삶을 유지해 나가는 조건이다. 그곳이야말로 내 삶의 조건의 한계이다”라고 설명한다. 이 구멍은 오염된 대상의 분출구 역할을 한다. <Black Sun: Asshole sculpture>(2023) 을 보면 구멍을 통한 배출, 구토를 통한 부패한 것들의 배출 따위의 생물학적인 생존 차원에서 필수요건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카네기 인터네셔널 등 지난 프로젝트들을 살펴보자면, 신비롭고 묘한 점성의 액체를 통해 토해내고, 뿜어내고, 떨어뜨리고, 스며들게 해 더 지저분하고, 더럽게 때론 거칠고 추악할 정도의 ‘낯선 것’들을 만들어 낸다. 그의 재료 탐색은 실력은 지나치게 실질적인데,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한강 고수부지에서 나타난 ‘괴물’이라도 만들어 낼 기색이다. 겉으로 볼 수 없는 피부 속의 것들을 끄집어내어 형상화한 것은 생명을 유지 보존케 한다. 흘러내리는 액상과 점성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과거의 불투명했던 삶, 재료의 이질성은 우리가 몰랐던 타자의 욕망이다. 새로운 추악함과 악마적인 갈등 그리고 쓸모를 잃은 기계적 삶이 교차하는 그의 작업이 기대된다. 천한 물질들, 성적 차이의 흔적들, 오염의 물질들과 고장 난 기계는 혐오와 매혹스러운 극단적 결합은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켰고, 이내 자유로운 자아로 돌아온다. 아마 자유로운 자아로 돌아온 최종 종착지는 모성적인 품일지도 모른다. 어두운 구렁, 열기 없는 식어버린 태양, 차가운 냉혹함, 정지된 시간은 멜랑콜리의 세계이다.
다시 가라앉고 싶어, 깊숙이,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게.
[1] 멜랑콜리에서 비롯되는 ‘쇼즈’는 불어로 ‘그 어떤 것’, ‘그것’, ‘거시기’, ‘무’, ‘정동’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쇼즈는 상징적인 혹은 상상적인 영역에 어떤 질서를 따라 분절되는 타인과 상호 작용의 흔적을 옮겨 놓기에 생겨난다. 즉 이것은 그가 대상과 세상에서 경험함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분절된 타인과의 상호 작용이라 함은 생애 초기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말함인데, 상호 작용이 통합되고 원만하지 않고 끊어지며, 연결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쇼즈는 꿈꾸는 태양이고, 밝은 동시에 어두운 태양이다.
2023.07 ACK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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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3, Published by 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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