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
나는 가구 편집숍이나 가전 매장, 장식품 쇼룸 구경을 좋아한다. 구경만. 지갑 꼬옥 닫고 주야장천 눈만 굴리니 아마 썩 달갑잖을 손님이리라. 천신만고 서울 어느 구석에 쪼그려 누울 둥지 하나 트느라 깜냥이 달리는 탓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해마다 떡국 한 그릇 비울수록, 공간 더 한 뼘 비우는 눈이 생긴다. 평당 삼천에 들어앉은 화분은 그 효용이 꽃값에 월세를 넘겨야 딱 제 밥값이다. 그럼 좀체 놓을 게 없다. 이리 세고 저리 재다 지칠 즈음, 차라리 공간 자체를 누릴 궁리에 젖는다. 감성 터지는 싸구려 조명을 달고, 언젠가 얻은 그림을 산 척 걸고, 난간 없는 통창을 내고, 햇살 묻은 빈 마루에 괜히 뒹군다.
그런데 비싼 게 어디 서울 바닥뿐인가. 화폭 한 뼘 한 뼘이 다 시간이고 돈이고 예술가의 수명이다. 전시에 내거는 건 심지어 그 일부에 불과하다. 박영학의 화판도 예외 없다. 평당가 아니 뼘당가를 생각하면 허투루 긋고 찍고 채워댈 수 없다.
집도 그림도 비울수록 찬다. 그래서 그는 비워 채운다. 실경에 잡히고 물리고 갇히는 대신 오히려 치고 덜고 빼며 완성으로 향한다. 바위와 숲을 겹치고 하늘과 구름을 뭉치고 물결과 수초를 합칠수록 그 실루엣이 점차 크고 선명해진다. 동떨어진 것들이 시야 안에서 마주쳐 잇닿을 때 부대끼는 외곽선의 미감을 일깨운다. 찌든 삶에 도통 살필 새 없던, 풍경의 숨은 곡선이 비로소 눈에 든다. 인간도 자연이란 증거일까? 엇갈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눈코입이 있고 산자락의 좌우에 어깻죽지가 있고, 강물과 바위가 껴안은 어름에 도드라진 무릎이 있다. “보이나요 이제? 어때요, 참 쉽죠?” 일면 ‘풍경 즐기기 매뉴얼’ 같다. 문득, 곡선을 비집고 드문드문 박힌 직선 또한 이채롭다. 자연에 없는 뻣뻣한 직선은, 농막이든 전신주든 무언가 인공물을 대신하는 조형 언어이리라. 비움의 관성을 해치지 않는 미술가의 절충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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