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시 時
정희라(큐레이터, 미술평론)
여백은 소리 없이 소멸하기도, 뚜렷하게 존재하기도 한다. 때때로 여백이 뚜렷하게 다가올 때 우리는 텅 빈 곳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여백이 여백으로 향할 때, 여백은 반복되는 무한의 공간으로 피어난다.
여백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이에 앞서 여백이란 무엇인가. 서민정의 작품 속에서 여백은 성큼 앞으로 나선다. 이때의 여백은 더 이상 여백이 아니다. 모든 것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새벽 어스름 즈음인지, 지난 빛을 머금은 황혼의 시간인지, 새벽과 황혼이 뒤섞여 있는 텅 빈 공간은 서민정 작가의 작업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건이 중심이 되곤 한다. 사건 주변부에 존재하는 것들을 감싸는 것은 언제나 여백이며, 이 여백에 눈길이 간다면 당신은 여백이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와중에도 여백은 항상 중심부와 함께 존재해 왔다. 여백으로 시간을 말하는 서민정은 붓질로 장지 사이사이 작은 구멍까지 섬세하게 꽉 채운다. 여백은 여백이기에 무엇의 형상을 묘사하지 않는다. 이 여백은 견고하고 단단하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진하지 않다. 공기층처럼 두텁게 쌓인 색의 느슨한 물성은 앞으로 나서지만, 앞에서 주도하지는 않는다. 구상과 추상이 혼합된 작품 안에서 여백은 추상처럼 (시각적으로) 보이나, 구상처럼 (감정적으로) 느껴진다. 서민정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여백에서 나온다.
서민정의 이러한 여백들이 갖는 시간의 생명력들은 반대 지점의 색들이 만나 일으키는 상호 작용에서 기인한다. 붉은 색 다음에 푸른 색이 채색된다.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을 만나면 소용돌이가 생긴다. 이 소용돌이는 눈에 보이는 경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온도 차에 의해 만들어진 이 소용돌이는 어찌 되었든 물의 움직임을 끌어낸다. 색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질이 완전히 다른 어떠한 것들이 만나 일으키는 화학 작용들은 그 부딪힘이 화합으로 바뀌며 변화의 흐름을 생성한다. 빛이 그늘을 돋보이게 하듯이 반대의 색들은 서로를 돋보이게 하고, 어우러진 가운데서도 존재를 발한다.
타오르는 불과 붉은 먹
서민정의 작업에서 여백과 함께 공존하는 주묵은 비어 있는 공간의 대척점에 있다. 여백과 주묵이 주고받는 시간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 - 「돌아가는 길」(2020)은 서민정 작가가 제주도의 거문오름에서 마주한 풍경을 담은 작품이다. 올라간 길 그대로 내려오려다 다른 길로 잘못 들어선 곳에 억새밭의 풍광이 펼쳐졌다. 그림의 제목인 돌아가는 길은 문자 그대로 되돌아가는 길을 의미하는 동시에 다른 지점을 통해 빙 둘러 가는 길을 뜻한다. 세 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마치 성상화의 삼단화처럼 왼쪽, 가운데, 오른쪽의 화폭에 각기 다른 내용이 표현되었다. 오른쪽의 <쓰러져 있는 억새>, 가운데의 <서 있는 억새>, 왼쪽의 <길>을 유심히 보니, 자연스레 보였던 풍경이 새삼 달라 보인다. 작가는 이 그림 속 하늘을 채색하는 것에 공을 들였다. 너무 파랗지도,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게 그려진 하늘은 낮인지, 밤인지, 아침인지, 새벽인지 명확한 시간대를 알 수 없게 한다. 이는 보는 이에 따라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민정, 돌아 가는 길 Way to Back, 2020, 장지에 먹, 주묵, 분채, 카본블랙, 193.9x390.9cm
초기 작업에서 분채를 차분하게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색을 만들던 서민정은 빨간색, 주황색, 형광에 가까운 분홍색을 전면에 사용하기도 한다. 장지를 그대로 노출하여 색을 올리던 방법은 어두운 색을 먼저 칠하고 밝은 색으로 향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고, 완전한 형태를 섬세하게 그렸던 방법은 끊기듯 짧아진 필체로 변화하였다. 달라진 표현 양식들은 작업 세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완전히 새롭게 하였고, 또 다른 목표로 향하게 하였다. 어두운 색을 먼저 화면 전체에 채색함으로써 그림의 톤은 한 층 깊어졌으며, 분절된 선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특한 기법으로 완성되어 갔다. 서민정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땅과 불꽃」(2023) 이다. 가족의 자연장을 진행하기 위해 화장을 하며 바라보았던 그 장면과 그때의 오동나무 상자에서 느껴지던 뜨끈한 온기는 활활 타오르는 불, 꺼져가는 불,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는 부서지고 구축하는 서로 다른 힘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비롯되며, 힘이 또 다른 속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로 이어진다 할 수 있다.
서민정, 마른 불꽃 Dry Flare, 2022, 장지에 주묵, 분채, 130x162.2cm
다양한 표현 기법과 소재의 공존 사이에서도 여백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한결같다. 서민정의 작업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공간은 여백이다. 먹과 주묵 그리고 다양한 색이 빛을 발하며 상호 작용에 여념이 없을 때, 단단하게 물든 여백은 그들을 견고하게 지탱한다. 예로부터 동양사상에서는 무가 유의 쓰임을 완전하게 드러낸다고 하였다. 여백의 미는 그 정신이 절제된 시간성과 함께 내포된다. 남는 자리로서의 여백은 비워진 공간인 동시에 완결된 공간으로 여겨졌다. 서민정의 여백은 대척하고 화합하는 양가적인 것들-버려진 돌 더미와 작지만 소중한 돌탑, 뒤집어지며 앞으로 나오는 구멍, 바스락거리는 불꽃과 같은 것들이 화면 안에서 조화롭도록 돕는다. 시간의 여백에서 사유한 소재들은 부드럽게 견고한 여백의 공간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2024.6.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ne.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여백의 시 時
정희라(큐레이터, 미술평론)
여백은 소리 없이 소멸하기도, 뚜렷하게 존재하기도 한다. 때때로 여백이 뚜렷하게 다가올 때 우리는 텅 빈 곳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여백이 여백으로 향할 때, 여백은 반복되는 무한의 공간으로 피어난다.
여백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이에 앞서 여백이란 무엇인가. 서민정의 작품 속에서 여백은 성큼 앞으로 나선다. 이때의 여백은 더 이상 여백이 아니다. 모든 것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새벽 어스름 즈음인지, 지난 빛을 머금은 황혼의 시간인지, 새벽과 황혼이 뒤섞여 있는 텅 빈 공간은 서민정 작가의 작업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건이 중심이 되곤 한다. 사건 주변부에 존재하는 것들을 감싸는 것은 언제나 여백이며, 이 여백에 눈길이 간다면 당신은 여백이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와중에도 여백은 항상 중심부와 함께 존재해 왔다. 여백으로 시간을 말하는 서민정은 붓질로 장지 사이사이 작은 구멍까지 섬세하게 꽉 채운다. 여백은 여백이기에 무엇의 형상을 묘사하지 않는다. 이 여백은 견고하고 단단하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진하지 않다. 공기층처럼 두텁게 쌓인 색의 느슨한 물성은 앞으로 나서지만, 앞에서 주도하지는 않는다. 구상과 추상이 혼합된 작품 안에서 여백은 추상처럼 (시각적으로) 보이나, 구상처럼 (감정적으로) 느껴진다. 서민정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여백에서 나온다.
서민정의 이러한 여백들이 갖는 시간의 생명력들은 반대 지점의 색들이 만나 일으키는 상호 작용에서 기인한다. 붉은 색 다음에 푸른 색이 채색된다.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을 만나면 소용돌이가 생긴다. 이 소용돌이는 눈에 보이는 경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온도 차에 의해 만들어진 이 소용돌이는 어찌 되었든 물의 움직임을 끌어낸다. 색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질이 완전히 다른 어떠한 것들이 만나 일으키는 화학 작용들은 그 부딪힘이 화합으로 바뀌며 변화의 흐름을 생성한다. 빛이 그늘을 돋보이게 하듯이 반대의 색들은 서로를 돋보이게 하고, 어우러진 가운데서도 존재를 발한다.
타오르는 불과 붉은 먹
서민정의 작업에서 여백과 함께 공존하는 주묵은 비어 있는 공간의 대척점에 있다. 여백과 주묵이 주고받는 시간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 - 「돌아가는 길」(2020)은 서민정 작가가 제주도의 거문오름에서 마주한 풍경을 담은 작품이다. 올라간 길 그대로 내려오려다 다른 길로 잘못 들어선 곳에 억새밭의 풍광이 펼쳐졌다. 그림의 제목인 돌아가는 길은 문자 그대로 되돌아가는 길을 의미하는 동시에 다른 지점을 통해 빙 둘러 가는 길을 뜻한다. 세 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마치 성상화의 삼단화처럼 왼쪽, 가운데, 오른쪽의 화폭에 각기 다른 내용이 표현되었다. 오른쪽의 <쓰러져 있는 억새>, 가운데의 <서 있는 억새>, 왼쪽의 <길>을 유심히 보니, 자연스레 보였던 풍경이 새삼 달라 보인다. 작가는 이 그림 속 하늘을 채색하는 것에 공을 들였다. 너무 파랗지도,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게 그려진 하늘은 낮인지, 밤인지, 아침인지, 새벽인지 명확한 시간대를 알 수 없게 한다. 이는 보는 이에 따라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민정, 돌아 가는 길 Way to Back, 2020, 장지에 먹, 주묵, 분채, 카본블랙, 193.9x390.9cm
초기 작업에서 분채를 차분하게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색을 만들던 서민정은 빨간색, 주황색, 형광에 가까운 분홍색을 전면에 사용하기도 한다. 장지를 그대로 노출하여 색을 올리던 방법은 어두운 색을 먼저 칠하고 밝은 색으로 향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고, 완전한 형태를 섬세하게 그렸던 방법은 끊기듯 짧아진 필체로 변화하였다. 달라진 표현 양식들은 작업 세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완전히 새롭게 하였고, 또 다른 목표로 향하게 하였다. 어두운 색을 먼저 화면 전체에 채색함으로써 그림의 톤은 한 층 깊어졌으며, 분절된 선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특한 기법으로 완성되어 갔다. 서민정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땅과 불꽃」(2023) 이다. 가족의 자연장을 진행하기 위해 화장을 하며 바라보았던 그 장면과 그때의 오동나무 상자에서 느껴지던 뜨끈한 온기는 활활 타오르는 불, 꺼져가는 불,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는 부서지고 구축하는 서로 다른 힘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비롯되며, 힘이 또 다른 속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로 이어진다 할 수 있다.
서민정, 마른 불꽃 Dry Flare, 2022, 장지에 주묵, 분채, 130x162.2cm
다양한 표현 기법과 소재의 공존 사이에서도 여백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한결같다. 서민정의 작업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공간은 여백이다. 먹과 주묵 그리고 다양한 색이 빛을 발하며 상호 작용에 여념이 없을 때, 단단하게 물든 여백은 그들을 견고하게 지탱한다. 예로부터 동양사상에서는 무가 유의 쓰임을 완전하게 드러낸다고 하였다. 여백의 미는 그 정신이 절제된 시간성과 함께 내포된다. 남는 자리로서의 여백은 비워진 공간인 동시에 완결된 공간으로 여겨졌다. 서민정의 여백은 대척하고 화합하는 양가적인 것들-버려진 돌 더미와 작지만 소중한 돌탑, 뒤집어지며 앞으로 나오는 구멍, 바스락거리는 불꽃과 같은 것들이 화면 안에서 조화롭도록 돕는다. 시간의 여백에서 사유한 소재들은 부드럽게 견고한 여백의 공간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2024.6.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ne.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