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이강훈 개인전 《기호로부터의 신호》 전시 서문
지정석 매진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이강훈, I-SEE-WHAT-I-SEE_02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몇 년 전, ‘생업과 작업 사이에서 오락가락 갈팡질팡 좌충우돌 악전고투하는 작가들’을 주제로 기획전을 열었다. 또렷한 방향성에도 작가 구성이 만만찮았다. 기실 웬만하면 당사자요, 나름 주인공이었다. 사연은 제각각이어도.
이강훈은 사실 유력한 섭외 대상 중 하나였다. 그의 복잡다단한 생활상을 살짝 들은 바 있었다. 그래봐야 조족지혈, 창해일속, 구우일모, 빙산의 일각이겠으나, 괜히 굳센 어조와 우중충한 낯빛, 풀 죽은 토끼 귀처럼 늘어진 어깨 각도만으로도 어련하랴. 반듯하고 진중하며 섬세한 그의 작업 박자가 ‘웃픈’ 전시 코드와는 다소 결이 달라 아쉬웠지만.
최근 만난 그는 다소간 깨달음이 엿보였다. ‘현타’의 터널을 막 벗어난 얼굴에서. 생업과 작업, 가장과 작가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를 한편으로 염려했는데 괜한 오지랖이 되어 기뻤다. 생업의 시간도 어엿한 삶이다. 일터에서 버티고 견디고 비빈 대가로 퇴근 후의 삶, 저녁이 있는 삶을 산다? 손으로 총 막으면 그건 내 손 아닌가. 그와 엮인 모든 시간, 모든 장면, 모든 사물은 예외 없이 그의 삶임을 새삼 납득한 모양이다. 작업도, 가장 노릇도, 그 사이의 고민조차도. 이제 각종 공구와 장갑, 눅눅한 감자튀김과 먹다 만 두통약이 화면 복판에 당당하고 우아하게 자세를 잡는다. 더 이상 ‘작업은 전경, 생업은 배경’이 아니다. 〈STILL LIFE〉는 ‘생업을 전경 삼은 작업’이다.
이강훈, still-life_01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이강훈, still-life_02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생업 전선과 육아, 작가 생활의 기로에서 동분서주 경황없는 그에게, 부친의 투병은 설상가상 망연자실 날벼락의 화룡점정이다. 피할 겨를도 없고 길이도 전개도 뉘엿뉘엿 도무지 기약이 없는 시련은, 외려 앙다물고 안팎을 관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일도 날짜도 가물가물한 어느 저녁, 문득 시야를 낯설게 비집는 낯익은 아파트. 전처럼 씩씩하지 않은 아버지를 어르고 달래며 수십수백 번을 오가면서도 곁눈질할 겨를조차 없던 남의 아파트에, 그동안 못 준 눈길을 깡그리 모조리 송두리째 쏟는다. 맞은편 어느 건물에 올라 올곧게 건너다보는, 수백의 삶으로 휘황한 밤의 아파트. 그 노골적인 겨냥은 ‘광경’보단 차라리 ‘물체’에 가까울 만치 선명하다. 〈Signals〉는 그의 착잡한 침잠을 드리운, 진취적인 ‘정물’이다.
그런 와중에도 사납게 내리쬐는 병마, 아버지의 기억은 뙤약볕 덮어쓴 물웅덩이처럼 말라갔다. 이 잔혹한 전개는, 도트가 서로 엉겨 붙으며 상을 잃어가는 사진으로 전이한다. 고화질 촬영 후 의도적인 모자이크를 입혀, 잃어가는 소중한 시간을 가두었다. 얼핏 보면 알 법도 한데, 좀 자세히 볼라 치면 온통 어렴풋한 도트 파티이다. 그저 넘겨짚고 끼워 맞추는 수밖에. 기억의 속성이 본디 그러하다. 그 실체는 단편적인 흔적과 부정확한 단서, 변질된 믿음이 생채기처럼 중구난방 교차하는 엉성한 실루엣이다. 선명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내용도 온전히 보존할 수도 전달할 도리도 없다. 바짝 다가가 지난 시간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는 건 불가능하다. 거리는 줄지 않고, 만남은 차일피일 거듭 미룬다. 그래서 〈Distant View〉는 수없이 한없이 덧없이 팔을 뻗으며 애쓰던 이강훈의 무력한 고백이자 심기일전 깨달음이다. 한 술 더 떠, 이들 사진을 다시 촬영한 전시 내경은 신기하게도, 갓 덧입힌 듯 더욱 싱싱하고 단호한 모자이크가 압권이다. 결국 선명함을 더듬어 헤매던 그가 건진 건 ‘선명한 거리감’이다.
이강훈, the-apple_02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The Apple〉은 인지의 그 엉성한 실루엣을 직관적,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몇 가지 언어로 쓴 붉은 글귀가 마구잡이로 겹쳐 낳은 외곽선은, 비록 어렴풋해도 딱 사과의 그것이다. 유난히 또렷한 활자의 행진은 어딘가 나름의 내용을 품은 듯하지만, 어지간히 붐비는 탓에 서로 뒤얽혀 당최 분간할 도리가 없다. ‘단편의 중첩’이란 기억 얼개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종착지는 음성 언어와 시각 언어 사이 어딘가를 헤매는 중간자 신세임을 암시한다. 이는 ‘사고가 언어를 벗어날 수 없는가?’라는 물음을 뒤이어 던진다.
고정 배역 X, 서열 경직 X. 이들 ‘단편’의 근무 환경은 외국계 기업도 울고 갈 만큼 탄력적이다. 사과의 단층을 찍은 투명 아크릴을 여러 장 겹친 〈In Sight〉. 우선, 인지의 실체는 단편적, 단층적 인상의 조합에 불과함을 공간 조형으로 암시한다. 그런데 뒤의 조각은 앞의 조각에 가려 배경 노릇을 한다. 앞의 전경 조각은 다시 그 앞의 조각에 배경을 선다. 〈Collected Space〉에선 구름 형상을 수백 조각의 아크릴 막대로 하늘하늘 채 썰어 내건다. 보는 방향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대끼며 조각끼리 서로 전경과 배경 역할을 다툰다. 잇달아 변하는 구름의 비정형적 형상처럼, 단서는 도무지 지정석이 없다. 양반과 상놈, 주인공과 들러리가 따로 없다. 혼자 왕 노릇 어림없다. 서로 얽혀야 읽힌다.
게슈탈트 시지각 이론은 전경과 배경(Figure & Ground)을 비중 있게 다룬다. 덴마크의 심리학자 에드가 루빈(Edgar Rubin, 1886-1951)이 제안한 루빈의 꽃병(Rubin's Vase)은 꽃병으로도 혹은 마주 보는 두 얼굴로도 보인다. 형태뿐만 아니라 크기, 배색, 패턴도 지각에 영향을 준다. 같은 형상도 오늘은 전경, 내일은 배경일 수 있다. 관객과 상황에 따라 시점은 변하고, 공연 회차마다 배역이 다르다. 적벽돌이 인상적인 전시장 벽면 한편의 네온 글씨 작업 〈I SEE WHAT I SEE〉. 단어 ‘see’는 ‘보다’와 ‘알다’ 어느 쪽으로든 볼 수 있다. 보이는 걸 보고, 아는 걸 알고, 보는 걸 알고, 아는 걸 본다. 왕후장상도 전경 배경도 그 씨가 따로 있지 않다. 보기 나름이다.
예전 이강훈의 전경은 공시적 통찰과 보편적인 진리의 도출이었다. 실리콘 범벅으로 일터에 나뒹구는 장갑을 닦다 개안했다. 전경 배경 내외할 일인가? 술래도 돌아야 제맛. 들러리가 주인공 할 차례이다. 라면, 사과, 아파트, 사진첩이 이번엔 전경이다.
이강훈,distant-view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이강훈, signals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2022.1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2022 이강훈 개인전 《기호로부터의 신호》 전시 서문
지정석 매진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이강훈, I-SEE-WHAT-I-SEE_02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몇 년 전, ‘생업과 작업 사이에서 오락가락 갈팡질팡 좌충우돌 악전고투하는 작가들’을 주제로 기획전을 열었다. 또렷한 방향성에도 작가 구성이 만만찮았다. 기실 웬만하면 당사자요, 나름 주인공이었다. 사연은 제각각이어도.
이강훈은 사실 유력한 섭외 대상 중 하나였다. 그의 복잡다단한 생활상을 살짝 들은 바 있었다. 그래봐야 조족지혈, 창해일속, 구우일모, 빙산의 일각이겠으나, 괜히 굳센 어조와 우중충한 낯빛, 풀 죽은 토끼 귀처럼 늘어진 어깨 각도만으로도 어련하랴. 반듯하고 진중하며 섬세한 그의 작업 박자가 ‘웃픈’ 전시 코드와는 다소 결이 달라 아쉬웠지만.
최근 만난 그는 다소간 깨달음이 엿보였다. ‘현타’의 터널을 막 벗어난 얼굴에서. 생업과 작업, 가장과 작가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를 한편으로 염려했는데 괜한 오지랖이 되어 기뻤다. 생업의 시간도 어엿한 삶이다. 일터에서 버티고 견디고 비빈 대가로 퇴근 후의 삶, 저녁이 있는 삶을 산다? 손으로 총 막으면 그건 내 손 아닌가. 그와 엮인 모든 시간, 모든 장면, 모든 사물은 예외 없이 그의 삶임을 새삼 납득한 모양이다. 작업도, 가장 노릇도, 그 사이의 고민조차도. 이제 각종 공구와 장갑, 눅눅한 감자튀김과 먹다 만 두통약이 화면 복판에 당당하고 우아하게 자세를 잡는다. 더 이상 ‘작업은 전경, 생업은 배경’이 아니다. 〈STILL LIFE〉는 ‘생업을 전경 삼은 작업’이다.
이강훈, still-life_01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이강훈, still-life_02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생업 전선과 육아, 작가 생활의 기로에서 동분서주 경황없는 그에게, 부친의 투병은 설상가상 망연자실 날벼락의 화룡점정이다. 피할 겨를도 없고 길이도 전개도 뉘엿뉘엿 도무지 기약이 없는 시련은, 외려 앙다물고 안팎을 관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일도 날짜도 가물가물한 어느 저녁, 문득 시야를 낯설게 비집는 낯익은 아파트. 전처럼 씩씩하지 않은 아버지를 어르고 달래며 수십수백 번을 오가면서도 곁눈질할 겨를조차 없던 남의 아파트에, 그동안 못 준 눈길을 깡그리 모조리 송두리째 쏟는다. 맞은편 어느 건물에 올라 올곧게 건너다보는, 수백의 삶으로 휘황한 밤의 아파트. 그 노골적인 겨냥은 ‘광경’보단 차라리 ‘물체’에 가까울 만치 선명하다. 〈Signals〉는 그의 착잡한 침잠을 드리운, 진취적인 ‘정물’이다.
그런 와중에도 사납게 내리쬐는 병마, 아버지의 기억은 뙤약볕 덮어쓴 물웅덩이처럼 말라갔다. 이 잔혹한 전개는, 도트가 서로 엉겨 붙으며 상을 잃어가는 사진으로 전이한다. 고화질 촬영 후 의도적인 모자이크를 입혀, 잃어가는 소중한 시간을 가두었다. 얼핏 보면 알 법도 한데, 좀 자세히 볼라 치면 온통 어렴풋한 도트 파티이다. 그저 넘겨짚고 끼워 맞추는 수밖에. 기억의 속성이 본디 그러하다. 그 실체는 단편적인 흔적과 부정확한 단서, 변질된 믿음이 생채기처럼 중구난방 교차하는 엉성한 실루엣이다. 선명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내용도 온전히 보존할 수도 전달할 도리도 없다. 바짝 다가가 지난 시간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는 건 불가능하다. 거리는 줄지 않고, 만남은 차일피일 거듭 미룬다. 그래서 〈Distant View〉는 수없이 한없이 덧없이 팔을 뻗으며 애쓰던 이강훈의 무력한 고백이자 심기일전 깨달음이다. 한 술 더 떠, 이들 사진을 다시 촬영한 전시 내경은 신기하게도, 갓 덧입힌 듯 더욱 싱싱하고 단호한 모자이크가 압권이다. 결국 선명함을 더듬어 헤매던 그가 건진 건 ‘선명한 거리감’이다.
이강훈, the-apple_02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The Apple〉은 인지의 그 엉성한 실루엣을 직관적,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몇 가지 언어로 쓴 붉은 글귀가 마구잡이로 겹쳐 낳은 외곽선은, 비록 어렴풋해도 딱 사과의 그것이다. 유난히 또렷한 활자의 행진은 어딘가 나름의 내용을 품은 듯하지만, 어지간히 붐비는 탓에 서로 뒤얽혀 당최 분간할 도리가 없다. ‘단편의 중첩’이란 기억 얼개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종착지는 음성 언어와 시각 언어 사이 어딘가를 헤매는 중간자 신세임을 암시한다. 이는 ‘사고가 언어를 벗어날 수 없는가?’라는 물음을 뒤이어 던진다.
고정 배역 X, 서열 경직 X. 이들 ‘단편’의 근무 환경은 외국계 기업도 울고 갈 만큼 탄력적이다. 사과의 단층을 찍은 투명 아크릴을 여러 장 겹친 〈In Sight〉. 우선, 인지의 실체는 단편적, 단층적 인상의 조합에 불과함을 공간 조형으로 암시한다. 그런데 뒤의 조각은 앞의 조각에 가려 배경 노릇을 한다. 앞의 전경 조각은 다시 그 앞의 조각에 배경을 선다. 〈Collected Space〉에선 구름 형상을 수백 조각의 아크릴 막대로 하늘하늘 채 썰어 내건다. 보는 방향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대끼며 조각끼리 서로 전경과 배경 역할을 다툰다. 잇달아 변하는 구름의 비정형적 형상처럼, 단서는 도무지 지정석이 없다. 양반과 상놈, 주인공과 들러리가 따로 없다. 혼자 왕 노릇 어림없다. 서로 얽혀야 읽힌다.
게슈탈트 시지각 이론은 전경과 배경(Figure & Ground)을 비중 있게 다룬다. 덴마크의 심리학자 에드가 루빈(Edgar Rubin, 1886-1951)이 제안한 루빈의 꽃병(Rubin's Vase)은 꽃병으로도 혹은 마주 보는 두 얼굴로도 보인다. 형태뿐만 아니라 크기, 배색, 패턴도 지각에 영향을 준다. 같은 형상도 오늘은 전경, 내일은 배경일 수 있다. 관객과 상황에 따라 시점은 변하고, 공연 회차마다 배역이 다르다. 적벽돌이 인상적인 전시장 벽면 한편의 네온 글씨 작업 〈I SEE WHAT I SEE〉. 단어 ‘see’는 ‘보다’와 ‘알다’ 어느 쪽으로든 볼 수 있다. 보이는 걸 보고, 아는 걸 알고, 보는 걸 알고, 아는 걸 본다. 왕후장상도 전경 배경도 그 씨가 따로 있지 않다. 보기 나름이다.
예전 이강훈의 전경은 공시적 통찰과 보편적인 진리의 도출이었다. 실리콘 범벅으로 일터에 나뒹구는 장갑을 닦다 개안했다. 전경 배경 내외할 일인가? 술래도 돌아야 제맛. 들러리가 주인공 할 차례이다. 라면, 사과, 아파트, 사진첩이 이번엔 전경이다.
이강훈,distant-view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이강훈, signals (이미지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2022.1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