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풍경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그는 동심의 자유로움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자를 외친 많은 사람들은 어째서 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했을까? 보아뱀이 진실이라면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한 것인가? 혹자는 ‘진실은 없다’라고 한다. 모자든 보아뱀이든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각각이 진실을 자처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는 데 큰 이견이 없겠지만, 무턱대고 진실 자체가 없다기엔 이 또한 섣부르고 속 편한 비약일 것이다. 이를테면 ‘모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코끼리 삼킨 보아뱀’만 해도 얼추 열 발자국은 더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코끼리가 나오는 다른 유명한 이야기로 ‘장님 코끼리 만지기(群盲撫象)’가 있다. 지문이 닳도록 만져대고도 장님들은 제각기 다른 이야기만 거듭한다. 코끼리가 없는 것도, 서로 거짓말을 일삼는 것도 아니다. 성실하고 정직하여 정보 탐색 및 공유에 거리낌이 없던 장님들은 아마 ‘고래고래 악을 쓰며 일깨워도 여전히 진실을 보지 못하는’ 서로를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코끼리를 부정하며 판을 뒤엎기엔 썩 섣부르고, 나서서 한 줄 요약정리 하자니 진실의 그 복잡 미묘함 앞에 잔망스레 수그러드는 자신감을 저마다 통탄하고 있을 것이다.
여하간 코끼리 두 마리만으로도 몇 가지는 분명하다. 세상을 통째로 가짜라기엔 논증이 빈약하다. 그런데 속속들이 제대로, 동시에 두루 널리 보는 건 더욱 녹록지 않다. 결국 어느 진실 부스러기를 보는 셈이니, 보고 온 건 죄 서로 달라 우왕좌왕이 일상이고, 누구든 진실을 보았다기엔 무리일 수밖에. 지금 보는 장면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면, 진실된 광경은 아마 무척 낯설거나, 아예 통념에 없는 풍경일 것이다.
김민호_북한산_117×73cm_캔버스에 목탄_2018
코끼리도 그러할진대 그보다 훨씬 큰 건 어찌 더듬어야 할까. 장님은 코끼리를, 김민호는 산을 더듬는다. 더듬는 재료조차 산이다. 산을 태운 목탄이 엉기고 뭉쳐 다시 산을 낳는다. 희누른 아사천에 산을 그리고, 기껏 그린 산을 손사랫짓하듯 매몰차게 문질러 흩뜨린다. 이번엔 전에 놓친 다른 각도를 다른 속도로 그려 올린다. 그럴듯한 모양새가 잡히기 무섭게 다시 문질러 누르고 그 위에 산을 앉히길 거듭한다.
그 복잡한 능선과 웅대한 양감은 거듭 쌓아올릴수록 외려 깊고 평탄해진다. 산의 갖은 표정, 딱 벌어진 어깨는, 그 모습을 짐작이나 간신히 해 볼 실마리로 더 검을 수 없는 그 몰골(沒骨:뼈가 빠진 형상)만을 덩그러니 남긴다. 그의 손에 들린 몽당 목탄 자투리는 그 키가 비는 만치, 납작 엎드려 화폭 위 목탄층으로 이주한 모양새이다. 어느새 산 표면은 그리기 전 목탄 막대의 광택과 밀도로 온전히 환원되어 간다. 정착액은 산의 주름살을 타고 계곡물 줄기처럼 분지(分枝, branches) 형상으로 흘러내린다. 비오는 날의 산의 모양새를 ‘그린다’기보단, 켜켜이 쌓인 목탄층의 미세한 골을 빗물이 ‘알아서 더듬어’ 흐른다. 주도면밀한 장님이 코끼리의 잔주름 하나도 허투루 흘리지 않고 손끝에 담는 심정으로, 김민호는 산의 이모저모를 주워, 쓸어, 긁어모으는 셈이다.
유리조각을 긁어모은다고 유리판이, 글자를 주워 담는대서 글이 될 턱이 없다. 부분의 합은, 그 대소 관계를 떠나 전체와는 애초 ‘다르다’. 보는 원리, 게슈탈트 시지각 이론에서 논하는 ‘총체적 인식’의 요체 또한 그러하다. 나열은 물론, 조합과도 다르다. 그래서 융합을 시도한다. 융합의 방법에 또 공인되고 규정된 진리와 정론이 있을 리 만무하다. 김민호는 다각적, 다층적, 다변적 중첩을 도모한다. 다각은 높이와 각도와 방향과 시선의 섞임을, 다층은 매 순간을 바로잡고 매시간을 쌓아올림을, 다변은 걷고 뛰고 타고 오르내리며 그 속도를 아우름을 뜻한다. 대상을 늘 다시 보고, 때때로 새로이 알아가며, 그에 임하는 호흡과 보폭을 다스린다.
공간과 시간과 인식 주체를 한 화면에 융합하는 그만의 방법론은 이렇게 실사, 실증, 노동 지향, 체득적인 과정을 두루 거쳐 비로소 정립한다. 거듭되는 융합 속에 단편적 인식, 우리가 흔히 떠올리던 이미지는 평균화하고, 표면은 평탄화하고, 농담은 상향 평준화하고, 찰나는 장노출로 중첩하고, 개성은 희석되고, 주부의 구분은 모호해지며, 대립과 우열은 해체하고, 마침내 인식 다발은 점차 단일과 총체로 수렴한다. 그렇게 개별적 단편적 인식 조각을 포개고 또 추스른 산은, 의외로 비교적 단순한 형상과 반들반들 다소 이상적인 표면을 지닌다. 산인데 한편으론 또 산일까 싶은 새카만 뭉텅이, 통념과는 거리가 있는 풍경에 도달한 것이다.
복잡다단한 진실은, 막막할 정도로 겹치고 뭉친 덕에 얼핏 매끈하고 심지어 단순 명쾌해 보인다. 자칫 그 단순 명쾌함을 당장 보이는 조각의 단편성과 동일시, 착각, 오인, 혼동하여 진실 한 덩이 벌써 거머쥔 양 서로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찍곤 한다. 그래서 지우고 겹치는 과정, 조각마다 각양각색 또렷한 생김과 수많은 잔재미들을 놓아 주고, 버리고, 묻는 과정은 느낀 대로 한편으론 아쉬움과 고통의 연속이기도 하다. 코끼리의 귀를 부여잡은 장님이 ‘코끼리란 모름지기 가오리처럼 납작스름하고 깃발처럼 펄럭이며 알라딘 양탄자처럼 하늘에 둥둥 떠 있지’라는 별안간의 확신을 억누르기가 어디 쉽겠는가.
김민호_세월_194×112cm_캔버스에 목탄_2015
융합 방식, 중첩 과정 그리고 환원되어 가는 결과물, 이 모든 족적은 페인팅이란 물리적 형식과 작업 형태에 퍼포먼스 성격을 부여한다. 정지된 평면의 한계를 넘어, 확정 대신 진동, 시각 대신 시간, 스틸컷 혹은 스냅샷 대신 영상을 도모하는 그를 혹자는, 회화 기반을 넓히려 드는 일종의 개척자로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옛 두루마리 그림에 펼쳐지는 생로병사와 시간의 흐름, 현실과 꿈을 오가는 대화, 뭍에서 우러른 하늘과 하늘에서 굽어본 뭍이 어우러진 풍취를 떠올리면, 이와 같은 ‘진동’은 어쩌면 이미 예전부터 회화의 영역이었다. 넌 미디어(non-media) 시대의 미디어랄까. 회화의 시야는 진즉 넉넉하고 사고는 족히 유연했다.
따라서 그가 회화의 기반을 확장한다기보다는 되레 그의 중요한 작업적 동기나 기반이야말로 전통 회화의 그러한 진동성이라 보아야 온당하다. 어쩌면, 회화가 도모하던 영역 일부를 보다 본격적, 적극적, 전방위적으로 실현하는 각양각색의 새 형식이 자리를 잡은 현대에도 그 진동성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척자보다는 차라리 ‘수호자’가 더 어울릴는지 모른다.
김민호_인왕(rain)_캔버스에 목탄_194×130cm_2018
회화 원론이 나온 가운데 문득 처음으로 되돌아가 생각하면, 사람도 꽃도 동물도 있는데 어째서 하필 산일까? 물론 익숙한 존재일 것이며 전통 회화의 진동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소재이기도 하다. 그저 현대 산수의 수호자를 자처한들 달리 어색할 건 없다. 공간, 길, 지도에 대한 관심도, 그저 산을 오르는 게 좋은 때문인 것도 이유로 충분하다. 만인이 공유하면서 또한 서로의 판이한 시야를 깨달을 현대인의 코끼리, 곁눈만 팔아도 쉽게 들어오지만 한 눈에 파악하기 벅찬 상대인 것도 한 몫 한다. 대상에 다가가는 그의 방식이 중첩, 적층, 축적의 성향을 띠는 만큼, 속성상 그것과 동기화한 대상을 만난 것일수도 있다.
다 좋지만 무엇보다 그는 건물 숲 틈새로, 건물 어깨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우리의 산에서 큰 매력을 토로한다. 건물과 산이 맞닿는 윤곽은 때때로 마치 현실과 이상의 경계처럼 다가오고, 멀거니 초점을 두면 그 너머로 탈출하는 기분이라고. 작업실 겸 미술학원에 줄지어 빽빽이 늘어놓은, 곧 출품할 희고 검은 그의 캔버스 앞에 쭈그리고 앉아 뚫어져라 한참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문득, 캔버스 숲 너머로 알록달록 벽을 뒤덮은, 원생들의 설익은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사심 한 가닥 없이 그저 기발한 아이들의 재주를 대할 때마다 놀랍기도 하고 흐뭇하다는 그. 현실 너머로 언뜻 엿보이는 이상이란 아마도 이런 광경, 이 느낌과 제법 닮지 않았을까 싶다.
2023. 0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총체적 풍경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그는 동심의 자유로움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자를 외친 많은 사람들은 어째서 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했을까? 보아뱀이 진실이라면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한 것인가? 혹자는 ‘진실은 없다’라고 한다. 모자든 보아뱀이든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각각이 진실을 자처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는 데 큰 이견이 없겠지만, 무턱대고 진실 자체가 없다기엔 이 또한 섣부르고 속 편한 비약일 것이다. 이를테면 ‘모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코끼리 삼킨 보아뱀’만 해도 얼추 열 발자국은 더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코끼리가 나오는 다른 유명한 이야기로 ‘장님 코끼리 만지기(群盲撫象)’가 있다. 지문이 닳도록 만져대고도 장님들은 제각기 다른 이야기만 거듭한다. 코끼리가 없는 것도, 서로 거짓말을 일삼는 것도 아니다. 성실하고 정직하여 정보 탐색 및 공유에 거리낌이 없던 장님들은 아마 ‘고래고래 악을 쓰며 일깨워도 여전히 진실을 보지 못하는’ 서로를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코끼리를 부정하며 판을 뒤엎기엔 썩 섣부르고, 나서서 한 줄 요약정리 하자니 진실의 그 복잡 미묘함 앞에 잔망스레 수그러드는 자신감을 저마다 통탄하고 있을 것이다.
여하간 코끼리 두 마리만으로도 몇 가지는 분명하다. 세상을 통째로 가짜라기엔 논증이 빈약하다. 그런데 속속들이 제대로, 동시에 두루 널리 보는 건 더욱 녹록지 않다. 결국 어느 진실 부스러기를 보는 셈이니, 보고 온 건 죄 서로 달라 우왕좌왕이 일상이고, 누구든 진실을 보았다기엔 무리일 수밖에. 지금 보는 장면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면, 진실된 광경은 아마 무척 낯설거나, 아예 통념에 없는 풍경일 것이다.
김민호_북한산_117×73cm_캔버스에 목탄_2018
코끼리도 그러할진대 그보다 훨씬 큰 건 어찌 더듬어야 할까. 장님은 코끼리를, 김민호는 산을 더듬는다. 더듬는 재료조차 산이다. 산을 태운 목탄이 엉기고 뭉쳐 다시 산을 낳는다. 희누른 아사천에 산을 그리고, 기껏 그린 산을 손사랫짓하듯 매몰차게 문질러 흩뜨린다. 이번엔 전에 놓친 다른 각도를 다른 속도로 그려 올린다. 그럴듯한 모양새가 잡히기 무섭게 다시 문질러 누르고 그 위에 산을 앉히길 거듭한다.
그 복잡한 능선과 웅대한 양감은 거듭 쌓아올릴수록 외려 깊고 평탄해진다. 산의 갖은 표정, 딱 벌어진 어깨는, 그 모습을 짐작이나 간신히 해 볼 실마리로 더 검을 수 없는 그 몰골(沒骨:뼈가 빠진 형상)만을 덩그러니 남긴다. 그의 손에 들린 몽당 목탄 자투리는 그 키가 비는 만치, 납작 엎드려 화폭 위 목탄층으로 이주한 모양새이다. 어느새 산 표면은 그리기 전 목탄 막대의 광택과 밀도로 온전히 환원되어 간다. 정착액은 산의 주름살을 타고 계곡물 줄기처럼 분지(分枝, branches) 형상으로 흘러내린다. 비오는 날의 산의 모양새를 ‘그린다’기보단, 켜켜이 쌓인 목탄층의 미세한 골을 빗물이 ‘알아서 더듬어’ 흐른다. 주도면밀한 장님이 코끼리의 잔주름 하나도 허투루 흘리지 않고 손끝에 담는 심정으로, 김민호는 산의 이모저모를 주워, 쓸어, 긁어모으는 셈이다.
유리조각을 긁어모은다고 유리판이, 글자를 주워 담는대서 글이 될 턱이 없다. 부분의 합은, 그 대소 관계를 떠나 전체와는 애초 ‘다르다’. 보는 원리, 게슈탈트 시지각 이론에서 논하는 ‘총체적 인식’의 요체 또한 그러하다. 나열은 물론, 조합과도 다르다. 그래서 융합을 시도한다. 융합의 방법에 또 공인되고 규정된 진리와 정론이 있을 리 만무하다. 김민호는 다각적, 다층적, 다변적 중첩을 도모한다. 다각은 높이와 각도와 방향과 시선의 섞임을, 다층은 매 순간을 바로잡고 매시간을 쌓아올림을, 다변은 걷고 뛰고 타고 오르내리며 그 속도를 아우름을 뜻한다. 대상을 늘 다시 보고, 때때로 새로이 알아가며, 그에 임하는 호흡과 보폭을 다스린다.
공간과 시간과 인식 주체를 한 화면에 융합하는 그만의 방법론은 이렇게 실사, 실증, 노동 지향, 체득적인 과정을 두루 거쳐 비로소 정립한다. 거듭되는 융합 속에 단편적 인식, 우리가 흔히 떠올리던 이미지는 평균화하고, 표면은 평탄화하고, 농담은 상향 평준화하고, 찰나는 장노출로 중첩하고, 개성은 희석되고, 주부의 구분은 모호해지며, 대립과 우열은 해체하고, 마침내 인식 다발은 점차 단일과 총체로 수렴한다. 그렇게 개별적 단편적 인식 조각을 포개고 또 추스른 산은, 의외로 비교적 단순한 형상과 반들반들 다소 이상적인 표면을 지닌다. 산인데 한편으론 또 산일까 싶은 새카만 뭉텅이, 통념과는 거리가 있는 풍경에 도달한 것이다.
복잡다단한 진실은, 막막할 정도로 겹치고 뭉친 덕에 얼핏 매끈하고 심지어 단순 명쾌해 보인다. 자칫 그 단순 명쾌함을 당장 보이는 조각의 단편성과 동일시, 착각, 오인, 혼동하여 진실 한 덩이 벌써 거머쥔 양 서로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찍곤 한다. 그래서 지우고 겹치는 과정, 조각마다 각양각색 또렷한 생김과 수많은 잔재미들을 놓아 주고, 버리고, 묻는 과정은 느낀 대로 한편으론 아쉬움과 고통의 연속이기도 하다. 코끼리의 귀를 부여잡은 장님이 ‘코끼리란 모름지기 가오리처럼 납작스름하고 깃발처럼 펄럭이며 알라딘 양탄자처럼 하늘에 둥둥 떠 있지’라는 별안간의 확신을 억누르기가 어디 쉽겠는가.
김민호_세월_194×112cm_캔버스에 목탄_2015
융합 방식, 중첩 과정 그리고 환원되어 가는 결과물, 이 모든 족적은 페인팅이란 물리적 형식과 작업 형태에 퍼포먼스 성격을 부여한다. 정지된 평면의 한계를 넘어, 확정 대신 진동, 시각 대신 시간, 스틸컷 혹은 스냅샷 대신 영상을 도모하는 그를 혹자는, 회화 기반을 넓히려 드는 일종의 개척자로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옛 두루마리 그림에 펼쳐지는 생로병사와 시간의 흐름, 현실과 꿈을 오가는 대화, 뭍에서 우러른 하늘과 하늘에서 굽어본 뭍이 어우러진 풍취를 떠올리면, 이와 같은 ‘진동’은 어쩌면 이미 예전부터 회화의 영역이었다. 넌 미디어(non-media) 시대의 미디어랄까. 회화의 시야는 진즉 넉넉하고 사고는 족히 유연했다.
따라서 그가 회화의 기반을 확장한다기보다는 되레 그의 중요한 작업적 동기나 기반이야말로 전통 회화의 그러한 진동성이라 보아야 온당하다. 어쩌면, 회화가 도모하던 영역 일부를 보다 본격적, 적극적, 전방위적으로 실현하는 각양각색의 새 형식이 자리를 잡은 현대에도 그 진동성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척자보다는 차라리 ‘수호자’가 더 어울릴는지 모른다.
김민호_인왕(rain)_캔버스에 목탄_194×130cm_2018
회화 원론이 나온 가운데 문득 처음으로 되돌아가 생각하면, 사람도 꽃도 동물도 있는데 어째서 하필 산일까? 물론 익숙한 존재일 것이며 전통 회화의 진동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소재이기도 하다. 그저 현대 산수의 수호자를 자처한들 달리 어색할 건 없다. 공간, 길, 지도에 대한 관심도, 그저 산을 오르는 게 좋은 때문인 것도 이유로 충분하다. 만인이 공유하면서 또한 서로의 판이한 시야를 깨달을 현대인의 코끼리, 곁눈만 팔아도 쉽게 들어오지만 한 눈에 파악하기 벅찬 상대인 것도 한 몫 한다. 대상에 다가가는 그의 방식이 중첩, 적층, 축적의 성향을 띠는 만큼, 속성상 그것과 동기화한 대상을 만난 것일수도 있다.
다 좋지만 무엇보다 그는 건물 숲 틈새로, 건물 어깨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우리의 산에서 큰 매력을 토로한다. 건물과 산이 맞닿는 윤곽은 때때로 마치 현실과 이상의 경계처럼 다가오고, 멀거니 초점을 두면 그 너머로 탈출하는 기분이라고. 작업실 겸 미술학원에 줄지어 빽빽이 늘어놓은, 곧 출품할 희고 검은 그의 캔버스 앞에 쭈그리고 앉아 뚫어져라 한참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문득, 캔버스 숲 너머로 알록달록 벽을 뒤덮은, 원생들의 설익은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사심 한 가닥 없이 그저 기발한 아이들의 재주를 대할 때마다 놀랍기도 하고 흐뭇하다는 그. 현실 너머로 언뜻 엿보이는 이상이란 아마도 이런 광경, 이 느낌과 제법 닮지 않았을까 싶다.
2023. 0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