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나 쪼는 여자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넷플릭스의 화제작 〈오징어 게임〉의 두 번째 경기는 ‘설탕 뽑기’이다. 동그라미, 세모, 별, 우산 모양이 찍힌 달고나 중 무작위로 하나를 뽑아, 깨짐 없이 외곽을 따야 이긴다. 넷 중 가장 어려운 모양은 이론의 여지없이 바로 우산. 앞의 셋은 기하학적 원리나 상관관계를 형상화한 간단한 ‘도형’이지만, 우산은 ‘상형(象形, 모양을 본뜸)’인 탓이다.
山, 水, 木
한자 자격증이 없는 사람도, 위 글자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읽고, 그 뜻마저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실제로 석 자 모두, 가장 낮은 급수의 초급 한자 50자에 해당한다. 직관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반쯤 그림인 덕이다. 솟은 산봉우리, 흐르는 물, 가지를 뻗은 나무의 모습을 옮겼다.
위 그림(?)이 글자로 인정받는 이유는 몰개성적이기 때문이다. 산과 강과 나무를 정선의 〈금강전도〉나 모네의 〈템스 강〉,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처럼 쓴다면 그림에 소양이 없는 이는 문맹 취급을 받을 위험이 있다. 너무 개성적인 것이다. ‘간소화’, ‘추상화’라는 약속 덕에, 누가 쓰든 山, 水, 木을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송윤주_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_장지에 먹, 안료, 스크래치_162x130cm_2021
〈방화수류정〉 한가운데 큼직한 도넛 형상이 보인다. 한층 짙푸른 색상으로 굽이치는 川(물결)으로 미루어 연못임을 알 수 있다. 중앙의 섬엔 石(돌)과 松(소나무)이 자리 잡았다. 연못 둘레를 따라 木(나무)이 줄지어 늘어섰다. 길게 드리운 이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용모를 보아, 어려운 ‘柳(버드나무)’ 대신 ‘木’에 살짝 특징을 더한 것. 전반적으로 일정한 크기는 문자의 속성을 닮았다. ‘키 큰 人(사람)’을 “人”이라 쓰진 않으니까. 그나마 큰 버들은 -동일한 글자체에 ‘진하게’ 속성을 준 것처럼- 좀 더 짙고 선명하다. 송윤주의 그림 곳곳엔 회화의 경계를 더듬는 이러한 면모가 엿보인다. 연못 너머 북녘으론 山(산)이 솟고, 남쪽 어름엔 亭(정자)이 우뚝 선다. 줄지어 좌우를 가로지르는 네모는 厂(언덕, 절벽) 밑에 가득한 口(돌멩이)로 쌓은 석벽(厂+口=石)임을 알 수 있다. 서편의 門(문)으로 흐르는 川(물결)은 내려갈수록 점차 가닥이 굵어지는 걸로 보아 남쪽이 하류일 것이다. 한편, 동편으로 이어지는 석벽 어느 마디가 아치형으로 볼록 솟기도 하는데, 드나들 수 있는 문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물은 광교산에서 발원해 수원을 가로지르는 수원천, 문은 화홍관창 수문, 연못은 용연에 해당한다. 정자는 바로 수원 화성(사적 제3호)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보물 제1709호)으로 해당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송윤주_22구역(부분)_장지에 먹, 안료, 스크래치_130x324cm_2021
바퀴가 2개면 車(수레)이다. 송윤주의 작업 곳곳엔 두 개의 바퀴를 탄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자전거 타는 이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방화수류정 남쪽의 수레는 바퀴가 4개이므로 주차장에 세운 자동차이다.
雷(우레)는 세상을 뒤흔드는 천둥이다. 雨(비)+田(밭)을 합친 형태인데, 먼 옛날 동물 뼈에 칼로 새긴 갑골문에선 이 글자를 논밭 사이로 뻗는 천둥 줄기로 표현했다. 금문 시대엔 아예 동기 표면에 글자를 주조한 덕에, 더욱 굵고 둥근 수레바퀴 형태(⊕) 4개를 이어 썼다. 마치 아까 주차장에 세워 둔 자동차처럼.
그림 상단의 연못(용연)과 주차장의 자동차(우레)를 번갈아 살핀다. 사서삼경 가운데 만물의 이치를 음양으로 접근하는 경전인 주역에는 64괘가 등장한다. 이중 17번째가 바로 ‘澤雷隨(택뢰수)’라는 괘이다. 말 그대로 澤(못) 아래 雷(우레)의 형세로, 뜻은 ‘隨(따르다)’이다. 무엇을? 때와 상황을. 주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것.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하늘거리는, 용연 둘레의 버드나무처럼 유연하게 말이다. 그렇다. 방화수류정은 ‘적절한 처세’의 지혜를 담은 말랑말랑한 그림이었던 것이다!
연못과 우레의 고문자를 풀어 조형적으로 재해석한 작업은, 회화와 탈 회화의 경계에서 줄을 타는 송윤주의 작가적 면모를 직접적으로 부각한다. 테두리 안에 들어찬 물과, 보기만 해도 시끄러운 수레바퀴로 가득한 우레. 작가에게 이들은 문자 기호(지시)이면서 상징(연상)이면서 동시에 사생(이미지)이다.
아리송한 괘상 작업 또한 줄줄이 풀린다. 길고 짧은 검은 띠의 조합으로 가득 찬 화면은 시각적으로 꽤나 양가적이다. 마치 부적이나 문장, 깃발과 같은 전근대적 문양처럼 보이기도, 혹은 미니멀하면서 강렬한 현대적 조형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음효(⚋)와 양효(⚊)가 세 줄씩 엮여 소성괘(괘 하나)가 된다. 괘 둘을 조합한 대성괘[1]의 괘상을 회화적으로 형상화했다. 형태만 좀 더 간략할 뿐, 외괘(위 세 줄)는 ‘☱(兌, 연못)’, 내괘(아래 세 줄,)는 ’☳(震, 우레)’로 이 역시 앞의 ‘택뢰수’의 형세이다. 고도로 추상화, 기호화한 방화수류정 풍경인 셈이다.
규범적이면서 또한 직관적인 게 상형의 강점이다. 그리고 송윤주는 상형의 강점을 고스란히 살린 채 회화로 끌어다 작업 메커니즘으로 활용한다. 약속된 상형을 조합해 자기 방식으로 재상형하는 이 송윤주식 조형은, ‘상형의 상형’이라 정리하면 딱이리라.
[1] 소성괘(음/양 3줄, 23=8가지) 둘을 조합하여 8×8=64가지. 앞서 주역의 괘상이 64개인 이유이다.
2023. 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달고나 쪼는 여자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넷플릭스의 화제작 〈오징어 게임〉의 두 번째 경기는 ‘설탕 뽑기’이다. 동그라미, 세모, 별, 우산 모양이 찍힌 달고나 중 무작위로 하나를 뽑아, 깨짐 없이 외곽을 따야 이긴다. 넷 중 가장 어려운 모양은 이론의 여지없이 바로 우산. 앞의 셋은 기하학적 원리나 상관관계를 형상화한 간단한 ‘도형’이지만, 우산은 ‘상형(象形, 모양을 본뜸)’인 탓이다.
山, 水, 木
한자 자격증이 없는 사람도, 위 글자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읽고, 그 뜻마저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실제로 석 자 모두, 가장 낮은 급수의 초급 한자 50자에 해당한다. 직관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반쯤 그림인 덕이다. 솟은 산봉우리, 흐르는 물, 가지를 뻗은 나무의 모습을 옮겼다.
위 그림(?)이 글자로 인정받는 이유는 몰개성적이기 때문이다. 산과 강과 나무를 정선의 〈금강전도〉나 모네의 〈템스 강〉,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처럼 쓴다면 그림에 소양이 없는 이는 문맹 취급을 받을 위험이 있다. 너무 개성적인 것이다. ‘간소화’, ‘추상화’라는 약속 덕에, 누가 쓰든 山, 水, 木을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송윤주_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_장지에 먹, 안료, 스크래치_162x130cm_2021
〈방화수류정〉 한가운데 큼직한 도넛 형상이 보인다. 한층 짙푸른 색상으로 굽이치는 川(물결)으로 미루어 연못임을 알 수 있다. 중앙의 섬엔 石(돌)과 松(소나무)이 자리 잡았다. 연못 둘레를 따라 木(나무)이 줄지어 늘어섰다. 길게 드리운 이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용모를 보아, 어려운 ‘柳(버드나무)’ 대신 ‘木’에 살짝 특징을 더한 것. 전반적으로 일정한 크기는 문자의 속성을 닮았다. ‘키 큰 人(사람)’을 “人”이라 쓰진 않으니까. 그나마 큰 버들은 -동일한 글자체에 ‘진하게’ 속성을 준 것처럼- 좀 더 짙고 선명하다. 송윤주의 그림 곳곳엔 회화의 경계를 더듬는 이러한 면모가 엿보인다. 연못 너머 북녘으론 山(산)이 솟고, 남쪽 어름엔 亭(정자)이 우뚝 선다. 줄지어 좌우를 가로지르는 네모는 厂(언덕, 절벽) 밑에 가득한 口(돌멩이)로 쌓은 석벽(厂+口=石)임을 알 수 있다. 서편의 門(문)으로 흐르는 川(물결)은 내려갈수록 점차 가닥이 굵어지는 걸로 보아 남쪽이 하류일 것이다. 한편, 동편으로 이어지는 석벽 어느 마디가 아치형으로 볼록 솟기도 하는데, 드나들 수 있는 문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물은 광교산에서 발원해 수원을 가로지르는 수원천, 문은 화홍관창 수문, 연못은 용연에 해당한다. 정자는 바로 수원 화성(사적 제3호)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보물 제1709호)으로 해당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송윤주_22구역(부분)_장지에 먹, 안료, 스크래치_130x324cm_2021
바퀴가 2개면 車(수레)이다. 송윤주의 작업 곳곳엔 두 개의 바퀴를 탄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자전거 타는 이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방화수류정 남쪽의 수레는 바퀴가 4개이므로 주차장에 세운 자동차이다.
雷(우레)는 세상을 뒤흔드는 천둥이다. 雨(비)+田(밭)을 합친 형태인데, 먼 옛날 동물 뼈에 칼로 새긴 갑골문에선 이 글자를 논밭 사이로 뻗는 천둥 줄기로 표현했다. 금문 시대엔 아예 동기 표면에 글자를 주조한 덕에, 더욱 굵고 둥근 수레바퀴 형태(⊕) 4개를 이어 썼다. 마치 아까 주차장에 세워 둔 자동차처럼.
그림 상단의 연못(용연)과 주차장의 자동차(우레)를 번갈아 살핀다. 사서삼경 가운데 만물의 이치를 음양으로 접근하는 경전인 주역에는 64괘가 등장한다. 이중 17번째가 바로 ‘澤雷隨(택뢰수)’라는 괘이다. 말 그대로 澤(못) 아래 雷(우레)의 형세로, 뜻은 ‘隨(따르다)’이다. 무엇을? 때와 상황을. 주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것.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하늘거리는, 용연 둘레의 버드나무처럼 유연하게 말이다. 그렇다. 방화수류정은 ‘적절한 처세’의 지혜를 담은 말랑말랑한 그림이었던 것이다!
연못과 우레의 고문자를 풀어 조형적으로 재해석한 작업은, 회화와 탈 회화의 경계에서 줄을 타는 송윤주의 작가적 면모를 직접적으로 부각한다. 테두리 안에 들어찬 물과, 보기만 해도 시끄러운 수레바퀴로 가득한 우레. 작가에게 이들은 문자 기호(지시)이면서 상징(연상)이면서 동시에 사생(이미지)이다.
아리송한 괘상 작업 또한 줄줄이 풀린다. 길고 짧은 검은 띠의 조합으로 가득 찬 화면은 시각적으로 꽤나 양가적이다. 마치 부적이나 문장, 깃발과 같은 전근대적 문양처럼 보이기도, 혹은 미니멀하면서 강렬한 현대적 조형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음효(⚋)와 양효(⚊)가 세 줄씩 엮여 소성괘(괘 하나)가 된다. 괘 둘을 조합한 대성괘[1]의 괘상을 회화적으로 형상화했다. 형태만 좀 더 간략할 뿐, 외괘(위 세 줄)는 ‘☱(兌, 연못)’, 내괘(아래 세 줄,)는 ’☳(震, 우레)’로 이 역시 앞의 ‘택뢰수’의 형세이다. 고도로 추상화, 기호화한 방화수류정 풍경인 셈이다.
규범적이면서 또한 직관적인 게 상형의 강점이다. 그리고 송윤주는 상형의 강점을 고스란히 살린 채 회화로 끌어다 작업 메커니즘으로 활용한다. 약속된 상형을 조합해 자기 방식으로 재상형하는 이 송윤주식 조형은, ‘상형의 상형’이라 정리하면 딱이리라.
[1] 소성괘(음/양 3줄, 23=8가지) 둘을 조합하여 8×8=64가지. 앞서 주역의 괘상이 64개인 이유이다.
2023. 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