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마를 만나는 순간
젤라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사망한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모습을 그린 피에타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한 유명한 도상 중 하나이다. 모든 이별은 슬프다. 헤어짐이 슬픈 이유는 인간의 힘으로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유한함을 체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예술작품을 보며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과 상상력을 섬광처럼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렇기에 작품을 통해 리얼리티를 볼 수 있고 변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운명의 입김 앞 인간의 나약함과 가능성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을 마주한다.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삶의 이치이다.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Women with Dead Child>, 1903, 쉰콜레 엣칭, 41.2 × 47.1 cm, Collection of the Museum of Modern Art © 2018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VG Bild-Kunst, Bonn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1903)는 콜비츠가 실제로 자기 자신과 21살에 2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한 아들을 모델로 7살의 자식으로 그린 판화 작품이다. 슬퍼하지 않는 마리아를 조각하고자 했다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1498-1499)와는 달리 콜비츠의 작품 속 어머니는 온 힘을 다해 자식을 안고 슬퍼하고 있다. 다리와 팔의 근육이 온전히 드러나는 자세로 바닥에 앉아 오열하는 여성의 모습은 영원한 헤어짐의 원초적 슬픔을 전한다. 이 작품에서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그려진 “원초적 슬픔”에서는 어머니의 서러움과 아쉬움, 이런 일을 겪게 한 하늘을 향한 분노, 인간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절망이 고요하게 천사처럼 안겨있는 자식의 모습과 대조되어 에칭의 검은 칼날처럼 마음을 찔러온다.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강의 수원 Riverhead>, 1963, 캔버스에 아크릴, 208.9 x 363.2 cm, © Helen Frankenthaler Foundation
하지만 우리는 이런 원초적 슬픔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의 강물 속에서 건져 올려낸 행복한 기억들이 바로 운명의 숨결을 피한 찰나가 아닐까. 헬렌 프랑켄탈러의 <강의 수원(Riverhead)>(1963)에서는 운명을 극복하는 힘의 원천을 느낄 수 있다. 프랑켄탈러는 “모든 아름다운 회화는 긴박감과 필요성을 담아내는 절대적인 순간에 태어난다”고 말했다[1]. 부유한 집안의 백인 여성으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의 화면에서 찰나 속 영원의 위안을 찾게 되는 이유는 희로애락의 처절한 색이 찬란하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내 안의 악마와 천사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잊어야만 극복할 수 있는 순간에, 기대는 배반당하고 운명의 연쇄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에 찾아온다. 잊고 기억하는 과정이 우리의 몸에 각인된 것처럼 이들은 우리 삶의 일부요, 우리 모두에게 깃든 ‘삶’이라는 운명의 신이 아닐까.
In loving memory of Ocean (2022-23)
[1] Brown, Julia. “A Conversation: Helen Frankenthaler with Julia Brown.” In After Mountains and Sea : Frankenthaler 1956-1959, 46. New York: Solomon R. Guggenheim Museum, 1998.
2023. 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천사와 악마를 만나는 순간
젤라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사망한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모습을 그린 피에타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한 유명한 도상 중 하나이다. 모든 이별은 슬프다. 헤어짐이 슬픈 이유는 인간의 힘으로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유한함을 체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예술작품을 보며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과 상상력을 섬광처럼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렇기에 작품을 통해 리얼리티를 볼 수 있고 변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운명의 입김 앞 인간의 나약함과 가능성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을 마주한다.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삶의 이치이다.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Women with Dead Child>, 1903, 쉰콜레 엣칭, 41.2 × 47.1 cm, Collection of the Museum of Modern Art © 2018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VG Bild-Kunst, Bonn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1903)는 콜비츠가 실제로 자기 자신과 21살에 2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한 아들을 모델로 7살의 자식으로 그린 판화 작품이다. 슬퍼하지 않는 마리아를 조각하고자 했다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1498-1499)와는 달리 콜비츠의 작품 속 어머니는 온 힘을 다해 자식을 안고 슬퍼하고 있다. 다리와 팔의 근육이 온전히 드러나는 자세로 바닥에 앉아 오열하는 여성의 모습은 영원한 헤어짐의 원초적 슬픔을 전한다. 이 작품에서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그려진 “원초적 슬픔”에서는 어머니의 서러움과 아쉬움, 이런 일을 겪게 한 하늘을 향한 분노, 인간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절망이 고요하게 천사처럼 안겨있는 자식의 모습과 대조되어 에칭의 검은 칼날처럼 마음을 찔러온다.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강의 수원 Riverhead>, 1963, 캔버스에 아크릴, 208.9 x 363.2 cm, © Helen Frankenthaler Foundation
하지만 우리는 이런 원초적 슬픔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의 강물 속에서 건져 올려낸 행복한 기억들이 바로 운명의 숨결을 피한 찰나가 아닐까. 헬렌 프랑켄탈러의 <강의 수원(Riverhead)>(1963)에서는 운명을 극복하는 힘의 원천을 느낄 수 있다. 프랑켄탈러는 “모든 아름다운 회화는 긴박감과 필요성을 담아내는 절대적인 순간에 태어난다”고 말했다[1]. 부유한 집안의 백인 여성으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의 화면에서 찰나 속 영원의 위안을 찾게 되는 이유는 희로애락의 처절한 색이 찬란하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내 안의 악마와 천사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잊어야만 극복할 수 있는 순간에, 기대는 배반당하고 운명의 연쇄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에 찾아온다. 잊고 기억하는 과정이 우리의 몸에 각인된 것처럼 이들은 우리 삶의 일부요, 우리 모두에게 깃든 ‘삶’이라는 운명의 신이 아닐까.
In loving memory of Ocean (2022-23)
[1] Brown, Julia. “A Conversation: Helen Frankenthaler with Julia Brown.” In After Mountains and Sea : Frankenthaler 1956-1959, 46. New York: Solomon R. Guggenheim Museum, 1998.
2023. 0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