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저장소로서의 기록물보관소
젤라씨
기억은 망각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신체의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기억은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탈색되고, 상실되고, 퇴색한다. 이 모든 것은 기억을 막을 수 없는 망각과정에 놓이게 한다. “옷좀나방을 피하여 그대가 머리에 보관할 수 있는 기억이란 없다[1]”고 T.S. 엘리엇이 말했듯이 ‘지나간 것이라는 상황’에서 생겨난 기억은 사멸과 퇴색이 결정된 운명이기 때문이다.
가장 처음으로 아카이브 이론을 출판한 것으로 알려진 Jacob von Rammingen(1510-1582)의 “Von der Registratur”(1571)
어느 순간이 오면 과거는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라 마치 삶이 지속되듯 꾸준히 변해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 낸다. 망각 속으로 빠져버린 듯한 과거의 부분들이 다시 떠오르면 다른 부분들은 다시 사라지기도 한다. 과거는, 그리고 과거의 인식, 즉 기억은 그때마다 현재라는 토양 위에서 자유롭게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현재와 과거는 복잡한 관계에 있으며 현재 속에서 과거가 떠올려지는 과정을 정확히 짚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몇몇 학자들은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며 심상 깊숙한 곳에 각인된 기억이라는 것이 이성과 경험의 규범을 지탱해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특히 객관적인 지식, 설득력 있는 진실의 본질을 얻기 원한다면 기억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하며 계몽적 이성에 있어 기억을 부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억과 지식의 위계관계는 기억과 경험지식을 역사의 불속에서 궁극적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위치시켜 역사연구에서 배제시켜왔다.
하지만 우리 개인이 직접 경험해 기억과 심상에 간직한 것은 과연 학문적인 시각들에서 배제해야만 하는 것일까? 홀로코스트나 위안부 사건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차 퇴색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자들의 증언과 경험에서 더 가까워지고 생생해지는 것처럼 다양한 지점에서 우리 개인이 경험했던 경험기억을 상실되지 않게 보존하고 후세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의 가치를 파고들어봐야 할 것이다. 개인과 문화는 개개인의 기억을 씨줄삼아 유기적으로 엮여짐으로써 세대와 시대를 관통하는 기억을 형성해내기 때문이다.
이런 첨예한 기억의 문제는 개인에게 머물러 소실되는 경험기억을 공공의 수면 위로 떠올려 공동으로 사유하는 계기의 중요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동시대 예술이 지닌 도전적이고 생동적인 역할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술적 매체로 신체에 각인된 기억을 외부의 매체로 기록, 저장해내는 과정은 자연히 추상적이다. 그렇기에 예술적 매체는 책이나 문자, 또는 핸드폰이나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저장방법과는 또 다른 맥락을 지닌다. 역사 연구자가 아닌 예술가로서 이들은 특별한 기억의 순간을 예술을 통해 발화한다. 이러한 예술적 회상은 기억과 망각을 부각시키며 저장을 가상적으로 만들어낸다. 예술로 환원된 개인의 경험기억은 사회로 끄집어져 망각의 상태를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다시 말해 기억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는 것이 바로 기억에 있어 예술의 역할이고, 예술을 통해 문화적 기억과 망각의 역동성이 생생한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기억의 저장매체로서의 예술은 기억을 역사로부터 부정된 것으로부터 건져 내어 의식의 수면에 떠오르게 한다.
예술가들은 디지털 매체로 삶의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또한 그 기억 없음을 망각한 문화에서도 강력하게 기억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화자이다. 이들은 시간적으로 계속해서 멀어지는 과거를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로 귀속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창작되는 예술품들은 아무것도 저장하지 않고 개인의 경험기억과 문화의 저장과 보존의 과정과 의미를 보여줌으로써 사회를 성찰해 보는 거울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이란 문화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기록물보관소이다.
[1] T.S. Eliot, The Cocktail Party; London, 1969, p.49.
2023. 0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기억 저장소로서의 기록물보관소
젤라씨
기억은 망각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신체의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기억은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탈색되고, 상실되고, 퇴색한다. 이 모든 것은 기억을 막을 수 없는 망각과정에 놓이게 한다. “옷좀나방을 피하여 그대가 머리에 보관할 수 있는 기억이란 없다[1]”고 T.S. 엘리엇이 말했듯이 ‘지나간 것이라는 상황’에서 생겨난 기억은 사멸과 퇴색이 결정된 운명이기 때문이다.
가장 처음으로 아카이브 이론을 출판한 것으로 알려진 Jacob von Rammingen(1510-1582)의 “Von der Registratur”(1571)
어느 순간이 오면 과거는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라 마치 삶이 지속되듯 꾸준히 변해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 낸다. 망각 속으로 빠져버린 듯한 과거의 부분들이 다시 떠오르면 다른 부분들은 다시 사라지기도 한다. 과거는, 그리고 과거의 인식, 즉 기억은 그때마다 현재라는 토양 위에서 자유롭게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현재와 과거는 복잡한 관계에 있으며 현재 속에서 과거가 떠올려지는 과정을 정확히 짚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몇몇 학자들은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며 심상 깊숙한 곳에 각인된 기억이라는 것이 이성과 경험의 규범을 지탱해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특히 객관적인 지식, 설득력 있는 진실의 본질을 얻기 원한다면 기억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하며 계몽적 이성에 있어 기억을 부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억과 지식의 위계관계는 기억과 경험지식을 역사의 불속에서 궁극적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위치시켜 역사연구에서 배제시켜왔다.
하지만 우리 개인이 직접 경험해 기억과 심상에 간직한 것은 과연 학문적인 시각들에서 배제해야만 하는 것일까? 홀로코스트나 위안부 사건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차 퇴색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자들의 증언과 경험에서 더 가까워지고 생생해지는 것처럼 다양한 지점에서 우리 개인이 경험했던 경험기억을 상실되지 않게 보존하고 후세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의 가치를 파고들어봐야 할 것이다. 개인과 문화는 개개인의 기억을 씨줄삼아 유기적으로 엮여짐으로써 세대와 시대를 관통하는 기억을 형성해내기 때문이다.
이런 첨예한 기억의 문제는 개인에게 머물러 소실되는 경험기억을 공공의 수면 위로 떠올려 공동으로 사유하는 계기의 중요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동시대 예술이 지닌 도전적이고 생동적인 역할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술적 매체로 신체에 각인된 기억을 외부의 매체로 기록, 저장해내는 과정은 자연히 추상적이다. 그렇기에 예술적 매체는 책이나 문자, 또는 핸드폰이나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저장방법과는 또 다른 맥락을 지닌다. 역사 연구자가 아닌 예술가로서 이들은 특별한 기억의 순간을 예술을 통해 발화한다. 이러한 예술적 회상은 기억과 망각을 부각시키며 저장을 가상적으로 만들어낸다. 예술로 환원된 개인의 경험기억은 사회로 끄집어져 망각의 상태를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다시 말해 기억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는 것이 바로 기억에 있어 예술의 역할이고, 예술을 통해 문화적 기억과 망각의 역동성이 생생한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기억의 저장매체로서의 예술은 기억을 역사로부터 부정된 것으로부터 건져 내어 의식의 수면에 떠오르게 한다.
예술가들은 디지털 매체로 삶의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또한 그 기억 없음을 망각한 문화에서도 강력하게 기억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화자이다. 이들은 시간적으로 계속해서 멀어지는 과거를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로 귀속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창작되는 예술품들은 아무것도 저장하지 않고 개인의 경험기억과 문화의 저장과 보존의 과정과 의미를 보여줌으로써 사회를 성찰해 보는 거울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이란 문화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기록물보관소이다.
[1] T.S. Eliot, The Cocktail Party; London, 1969, p.49.
2023. 0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