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환 개인전 《A nostalgic plane》 전시 서문
지난 나를 샘하다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떡이 너무 작다. 다시 빚을 필요는 없다. 남에게 쥐여 주면 충분히 커 보일 테니까. 사촌이 부동산 시세만 클릭해도 복통에 신음하고, 남의 짝은 얽은 호박도 고와 보인다던 조상님들을 생각하면 죄스러울 일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는, 인간스럽게 살아 내는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는 ‘탐貪’이다. 줄기차게 때론 미련스레 부러워하는 것이다. 가지고 싶고, 닿고 이루고 차지하고픈 것이 없다면 딱히 살 이유가 있을까. 당장 죽을 필요까진 없겠으나 삶은 곧 대단한 낭비일 것이다. 낭비를 합리화하려면 “사는 데 이유 있나.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거지.”라며 냉큼 대전제라도 깔아 둬야 할 것만 같다. 사는 행위, 생生이란 작용은 결국 탐을 충족하는 과정이자 수단인 것을. 탐은 생의 목적이며 생은 탐의 수단이고, 탐으로 생이 유지되므로 동시에 탐은 생의 수단이기도 하다. 흔히 “부러워 죽겠네”라 하지만, 부러울수록 ‘더더욱 살아버리는’ 셈이다.
조덕환_노스탤지어 N_캔버스에 유채_50×60.5cm_2017
조덕환_노스탤지어 N_캔버스에 유채_91×73cm_2018
조덕환_노스탤지어 V_캔버스에 유채_60.5×72.5cm_2018
조덕환은 탐한다. 변질되어 시기와 미움과 공멸을 낳기도 하는 게 또 탐이지만, 그의 탐은 남이 아니라 돌고 돌아 자신에게 향한다. 언젠가 나도 그랬었던 것, 한때 내 것이었지만 이제는 나에게 없는 것을, 선망으로 가득 찼던 그때를 선망한다. 없어졌대서 영영 오간 데 없는 것도 아니다. 책장 구석빼기에 늙어 가는 낡은 동화책이, 어느 오지 외딴 공터에서 공 차고 흙 푸는 아이들이 대신 품고 있다. 그래서 그의 탐은 아련한 인상, 그리운 형상, 부러운 색상을 지닌다. 나에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아이, 비행기는 빛이 고픈 부나방떼처럼 선회하며 맴돌고, 한 가닥 꿈결일는지 빛무리일는지 모를 부러운 색상을 가르며 어디론가 향한다.
탐은 결핍에서 비롯한다. 원하는 건 내 손에 없다. 행여 탐이 탐을 낳는다면, 마찬가지로 더 큰 것이 수중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수중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어제를 까맣게 잊고 또 성냥갑 같은, 아니 금붕어 채운 어항 같은 만원 전철, 삯매 벌듯 이 악물고 건진 하청 일감, 구역질 나는 갑을 관계, 계산과 정치질로 지긋지긋한 동료들, 중상모략 험담 배틀에 뻣뻣한 뒷골과 너덜거리는 고막, 낙오자를 바라보는 안도의 눈빛들, 굴리던 무쇠 쳇바퀴 바깥으로 까마득히 뻗은 낭떠러지⋯, 몸서리 진저리 넌더리나는 현실에 푹 절은 몸뚱이가 있다. 그 우람한 인천공항이 인산인해에 제2 터미널을 열었고, 사람들은 경쟁하듯 주머니를 털어 한층 필사적으로 줄을 선다. ‘헬조선’ 시한부 탈출 행렬이라도 되는 걸까.
조덕환_노스탤지어_리넨에 유채_90.5×116.5cm_2018
조덕환_노스탤지어_리넨에 유채_112×162cm_2017
조덕환_노스탤지어_리넨에 유채_112×162cm_2017
조덕환_노스탤지어_캔버스에 유채_41×60.5cm_2017
비행에는 출발과 도착이 있다. 조덕환의 비행은 ‘떠나고픈 대상’을 벗어나 ‘떠나왔던 그곳 혹은 그것’으로 ‘지극히 오랜만의 회항’을 꿈꾼다. 짙은 구름을 가르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으리으리한 탐험이 아니라, 한때 몸담았던 곳, 이미 지나왔던 곳, 두루 머물렀던 곳을 되짚는다. 겪었고 또 잃었던 어린 시절의 당돌함, 멋모르지만 그저 좋았던 지난 낭만, 경쟁도 낙오도 생소했던 그 느리고 허술한 호흡과 한적한 걸음걸이들, 적당히 밝고 따뜻한 오늘과, 아마도 더 재밌을 것만 같았던 내일들⋯ 조덕환의 이상향은 천국처럼 거창하지도 극락이며 선계만큼 멀지도 않다. 그래서 그의 비행은 다가올 긴장이나 역동도, 두려움이나 조바심도 함부로 풍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들떠서 끝없이 날아오르고, 창공에 한 점이 되어 좌충우돌 역동적으로 유영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은근한 설렘, 오밀조밀 꼭꼭 눌러 둔 기대를 품고 차분하게, 또 속도 과시 없이, 슬로비디오 마냥 담담하게 떠간다. 그가 요술 모자와 고양이, 지구본, 아이들과 같은 탑승 수속을 거쳐 막 이륙한 이번 비행은, 지금의 좌표에 대한 부정도 개선도 없는 단순 탈출 혹은 도피일 수도, 어쩌면 그것마저 되지 못 할, 그저 눈 가리고 아웅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과의 거리를 만드는 작업은 어쩌면 현실을 다시 한 번 바로 마주할 짬을 벌어줄 수도 있다. 전망 좋은 높은 동굴에 터를 잡은 원시인이 적의 습격에 보다 여유 있게 대비하듯, 재난을 겪는 대신 4D 영화관에서 즐기듯, 최소한의 안전거리나 완충재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탐과 비행은 ‘불연속’이란 코드로 정리된다. 쭉 해온 것, 애쓰지 않아도 곧 다가올 것, 뻔한 것, 인과관계로 뻣뻣하게 엮인 일련의 사건들이 ‘연속’에 해당한다면, 탐과 비행은 까마득히 지난 것, 바람처럼 사라진 것, 문득 떠올라 맴도는 것, 다가올 기미가 없는 것, 이어지지 않은 길, 건너편으로 훌쩍 넘어가야 하는 것들을 향한다. 조덕환은 윷판의 점과 선을 따라 줄지어 돌기보다 윷말을 덥석 집어, 가고픈 곳에 과감히 내려놓는다. 이 과감성은 필자가 찬양해 온 작가적 실체이기도 하다. 과감하려면 받아 적고 전하기보다 ‘지어내야作’ 하니까.
그런데 사실 ‘비행기’나 ‘노스탤지어’같은 키워드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어린이에 대한 첨예한 기호학적 고찰에 나서지 않아도, 향수鄕愁에 대한 면밀한 통례적, 미학적 접근이 없어도, 진탕 분석하고 재조합해놓은 세트장에서 우린 이미 살고 있다. ‘철없을 적 내 기억 속에 비행기 타고 가는’ 가요도, ‘하늘 높이 날아가려는 꿈과 열망의 소산’인 비행기도, 그 모티프인 ‘새’가 문학적으로 어떻게 활용되어 왔는지도 더없이 익숙하다. 클리셰를 되짚는 문단만큼 치명적인 클리셰도 없을 것이다. 이미 클리셰 학습이 탄탄한 인간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이미지 자체를, 형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긴들, 전시장을 나서기 무섭게 재개될 일상에 비하면 충분히 불연속적이다.
2023. 0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조덕환 개인전 《A nostalgic plane》 전시 서문
지난 나를 샘하다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떡이 너무 작다. 다시 빚을 필요는 없다. 남에게 쥐여 주면 충분히 커 보일 테니까. 사촌이 부동산 시세만 클릭해도 복통에 신음하고, 남의 짝은 얽은 호박도 고와 보인다던 조상님들을 생각하면 죄스러울 일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는, 인간스럽게 살아 내는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는 ‘탐貪’이다. 줄기차게 때론 미련스레 부러워하는 것이다. 가지고 싶고, 닿고 이루고 차지하고픈 것이 없다면 딱히 살 이유가 있을까. 당장 죽을 필요까진 없겠으나 삶은 곧 대단한 낭비일 것이다. 낭비를 합리화하려면 “사는 데 이유 있나.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거지.”라며 냉큼 대전제라도 깔아 둬야 할 것만 같다. 사는 행위, 생生이란 작용은 결국 탐을 충족하는 과정이자 수단인 것을. 탐은 생의 목적이며 생은 탐의 수단이고, 탐으로 생이 유지되므로 동시에 탐은 생의 수단이기도 하다. 흔히 “부러워 죽겠네”라 하지만, 부러울수록 ‘더더욱 살아버리는’ 셈이다.
조덕환_노스탤지어 N_캔버스에 유채_50×60.5cm_2017
조덕환_노스탤지어 N_캔버스에 유채_91×73cm_2018
조덕환_노스탤지어 V_캔버스에 유채_60.5×72.5cm_2018
조덕환은 탐한다. 변질되어 시기와 미움과 공멸을 낳기도 하는 게 또 탐이지만, 그의 탐은 남이 아니라 돌고 돌아 자신에게 향한다. 언젠가 나도 그랬었던 것, 한때 내 것이었지만 이제는 나에게 없는 것을, 선망으로 가득 찼던 그때를 선망한다. 없어졌대서 영영 오간 데 없는 것도 아니다. 책장 구석빼기에 늙어 가는 낡은 동화책이, 어느 오지 외딴 공터에서 공 차고 흙 푸는 아이들이 대신 품고 있다. 그래서 그의 탐은 아련한 인상, 그리운 형상, 부러운 색상을 지닌다. 나에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아이, 비행기는 빛이 고픈 부나방떼처럼 선회하며 맴돌고, 한 가닥 꿈결일는지 빛무리일는지 모를 부러운 색상을 가르며 어디론가 향한다.
탐은 결핍에서 비롯한다. 원하는 건 내 손에 없다. 행여 탐이 탐을 낳는다면, 마찬가지로 더 큰 것이 수중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수중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어제를 까맣게 잊고 또 성냥갑 같은, 아니 금붕어 채운 어항 같은 만원 전철, 삯매 벌듯 이 악물고 건진 하청 일감, 구역질 나는 갑을 관계, 계산과 정치질로 지긋지긋한 동료들, 중상모략 험담 배틀에 뻣뻣한 뒷골과 너덜거리는 고막, 낙오자를 바라보는 안도의 눈빛들, 굴리던 무쇠 쳇바퀴 바깥으로 까마득히 뻗은 낭떠러지⋯, 몸서리 진저리 넌더리나는 현실에 푹 절은 몸뚱이가 있다. 그 우람한 인천공항이 인산인해에 제2 터미널을 열었고, 사람들은 경쟁하듯 주머니를 털어 한층 필사적으로 줄을 선다. ‘헬조선’ 시한부 탈출 행렬이라도 되는 걸까.
조덕환_노스탤지어_리넨에 유채_90.5×116.5cm_2018
조덕환_노스탤지어_리넨에 유채_112×162cm_2017
조덕환_노스탤지어_리넨에 유채_112×162cm_2017
조덕환_노스탤지어_캔버스에 유채_41×60.5cm_2017
비행에는 출발과 도착이 있다. 조덕환의 비행은 ‘떠나고픈 대상’을 벗어나 ‘떠나왔던 그곳 혹은 그것’으로 ‘지극히 오랜만의 회항’을 꿈꾼다. 짙은 구름을 가르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으리으리한 탐험이 아니라, 한때 몸담았던 곳, 이미 지나왔던 곳, 두루 머물렀던 곳을 되짚는다. 겪었고 또 잃었던 어린 시절의 당돌함, 멋모르지만 그저 좋았던 지난 낭만, 경쟁도 낙오도 생소했던 그 느리고 허술한 호흡과 한적한 걸음걸이들, 적당히 밝고 따뜻한 오늘과, 아마도 더 재밌을 것만 같았던 내일들⋯ 조덕환의 이상향은 천국처럼 거창하지도 극락이며 선계만큼 멀지도 않다. 그래서 그의 비행은 다가올 긴장이나 역동도, 두려움이나 조바심도 함부로 풍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들떠서 끝없이 날아오르고, 창공에 한 점이 되어 좌충우돌 역동적으로 유영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은근한 설렘, 오밀조밀 꼭꼭 눌러 둔 기대를 품고 차분하게, 또 속도 과시 없이, 슬로비디오 마냥 담담하게 떠간다. 그가 요술 모자와 고양이, 지구본, 아이들과 같은 탑승 수속을 거쳐 막 이륙한 이번 비행은, 지금의 좌표에 대한 부정도 개선도 없는 단순 탈출 혹은 도피일 수도, 어쩌면 그것마저 되지 못 할, 그저 눈 가리고 아웅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과의 거리를 만드는 작업은 어쩌면 현실을 다시 한 번 바로 마주할 짬을 벌어줄 수도 있다. 전망 좋은 높은 동굴에 터를 잡은 원시인이 적의 습격에 보다 여유 있게 대비하듯, 재난을 겪는 대신 4D 영화관에서 즐기듯, 최소한의 안전거리나 완충재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탐과 비행은 ‘불연속’이란 코드로 정리된다. 쭉 해온 것, 애쓰지 않아도 곧 다가올 것, 뻔한 것, 인과관계로 뻣뻣하게 엮인 일련의 사건들이 ‘연속’에 해당한다면, 탐과 비행은 까마득히 지난 것, 바람처럼 사라진 것, 문득 떠올라 맴도는 것, 다가올 기미가 없는 것, 이어지지 않은 길, 건너편으로 훌쩍 넘어가야 하는 것들을 향한다. 조덕환은 윷판의 점과 선을 따라 줄지어 돌기보다 윷말을 덥석 집어, 가고픈 곳에 과감히 내려놓는다. 이 과감성은 필자가 찬양해 온 작가적 실체이기도 하다. 과감하려면 받아 적고 전하기보다 ‘지어내야作’ 하니까.
그런데 사실 ‘비행기’나 ‘노스탤지어’같은 키워드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어린이에 대한 첨예한 기호학적 고찰에 나서지 않아도, 향수鄕愁에 대한 면밀한 통례적, 미학적 접근이 없어도, 진탕 분석하고 재조합해놓은 세트장에서 우린 이미 살고 있다. ‘철없을 적 내 기억 속에 비행기 타고 가는’ 가요도, ‘하늘 높이 날아가려는 꿈과 열망의 소산’인 비행기도, 그 모티프인 ‘새’가 문학적으로 어떻게 활용되어 왔는지도 더없이 익숙하다. 클리셰를 되짚는 문단만큼 치명적인 클리셰도 없을 것이다. 이미 클리셰 학습이 탄탄한 인간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이미지 자체를, 형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긴들, 전시장을 나서기 무섭게 재개될 일상에 비하면 충분히 불연속적이다.
2023. 0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