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얻는 찰나의 시간
: 블리스 풀(Bliss Pool), 도나 후앙카(Donna Huance) 전시 리뷰
한승주
OO는 얼마 전부터 매사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일도, 공부도, 친구 관계도 모두 자신의 잘못으로 그르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 시작할 땐 뭐든 잘 풀리는 것 같다가 곧 별것도 아닌 감정 씨름으로 삐끗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요 며칠 스트레스 받는다는 핑계로 캔맥주를 입에 달고 살았더니 금세 체중이 늘었다. 퉁퉁 부어버린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 거울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입으려 했던 옷들이 쭉 걸려있는 옷장을 외면하고 늘 입던 와이드 핏 슬랙스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어차피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입고 일할 옷을 주기 때문에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는 요즘 특이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어떤 미술관에 가서 라이브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그 근처에 서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흔히 미술관 전시에 작품을 지키기 위해 상주하는 스태프와는 조금 다르다. 물론 바디 페인팅을 한 퍼포머를 짓궂은 관람객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이 기본적으로 주어졌지만 거기에 퍼포머의 대변자라는 역할도 더해졌다. 그러니까 그는 전시공간 중앙에 마련된 퍼포먼스 무대와 관람객 사이의 일종의 중간지대 역할을 해야 하는 거였다.
역할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둥그런 무대 위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퍼포머나, 무대 주변으로 설치된 대형 회화에만 눈길을 주었다. 관람객이 적을 때면 그도 무대 위 퍼포머처럼 뭔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는 듯 무대 옆에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보았지만 오히려 관람객들이 자신의 존재를 매우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 인형처럼 서서 작품의 일부로 존재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그는 관람객이 많든 적든 자신의 역할만큼 존재감마저 어중간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사실 그게 아니었다. 작가가 마련한 무대 위에는 퍼포머뿐 아니라 거울처럼 주변을 반영하는 스틸(Stainless still) 조각이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집에서조차 마주치기 싫었던 제 모습이 자꾸만 드러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너무 싫어 자꾸 구석이나 제 모습이 비치지 않는 사각지대에만 서 있었는데, 미술관 측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지금보다는 존재를 좀 더 드러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대 근처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더 가까이서 보게 된 바디 페인팅한 모델 두 사람은 프로페셔널 그 자체였다. 그들은 별다른 지시사항 없이 그저 천천히, 자유롭게 움직였고 전시장의 흰 벽에 몸을 문질러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OO는 그 과정이 마치 탈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내 흔적은 이 세계에 남아 새겨지고, 더 단단한 새 외피를 얻게 되는 거였다. 퍼포먼스 동안 그들은 그렇게 그 시간만큼 성장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도 이미 단단해 보였지만, 일종의 탈피 과정을 거치며 더욱 안정되어가는 모델의 모습을 보며 그는 고작 거울 조각에 비친 제 모습도 잘 참지 못하는 주제에 엄청난 퍼포먼스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아무 생각 없이 잘 알아보지도 않고 꿀알바라는 지인의 사탕발림에 넘어가버리고 말았는데, 결국 이 지점에서 자신의 비뚤어진 열등감이 또 불쑥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
.
“저, 안녕하세요. 여쭤볼 게 있는데, 혹시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일주일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참을 제 주변을 서성거리던 한 관람객이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내 굳은 표정이었던 OO는 놀라움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그 관람객과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궁금한 게 아주 많은 관람객이었다. 처음에 OO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기까지 했지만 사전 교육시간에 들었던 지식과 전시장에 있으면서 알게 되었던 사실들을 총동원하여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 관람객은 한참 만에야 감사 인사를 진하게 남기고 떠났고, 희한하게 일주일째 맡으면서도 큰 감흥이 없었던 독특한 향기가 그제야 불쑥 들어왔다. 작가는 콜라주처럼 향을 만들어 일종의 기억의 표식으로 활용한다고 하는데, 그 감각이 마치 버튼이라도 누른 듯 발동되기 시작한 거였다. 그러자 전시장의 공기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고, 하도 봐서 외울 것 같았던 회화 표면의 색깔과 흔적들도 다시금 생경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OO는 그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퍼포머의 느릿한 움직임에 발맞추어 중앙 무대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그러는 동안 스틸 조각에 비친 퉁퉁 부은 제 신체의 불만족스러운 외형 대신 움직임의 감각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퍼포머와 자신, 그리고 자신의 움직이는 사이에 시시각각 바뀌는 관람객 개개의 신체를 개별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에게 무수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나는 온전한 나로 존재한다는 찰나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비록 지금껏 살아온 관성으로 깨달음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금 불만투성이의 삶으로 돌아가겠지만, 분명한 것은 찰나에 느꼈던 자유의 기분으로 인해 남은 기간 동안의 일은 무척 즐거울 것이며,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최악은 아닐 거라는 사실이었다. OO는 퇴근시간이 되어 화장실에서 다시 후줄근하게 늘어난 제 옷으로 갈아입으며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준 지인에게 꼭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Bliss Pool: Donna Huanca》 2023.03.09-06.08, 전시전경
*위 내용은 실제 전시를 기반으로 작성한 픽션입니다.
2023.0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자유를 얻는 찰나의 시간
: 블리스 풀(Bliss Pool), 도나 후앙카(Donna Huance) 전시 리뷰
한승주
OO는 얼마 전부터 매사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일도, 공부도, 친구 관계도 모두 자신의 잘못으로 그르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 시작할 땐 뭐든 잘 풀리는 것 같다가 곧 별것도 아닌 감정 씨름으로 삐끗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요 며칠 스트레스 받는다는 핑계로 캔맥주를 입에 달고 살았더니 금세 체중이 늘었다. 퉁퉁 부어버린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 거울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입으려 했던 옷들이 쭉 걸려있는 옷장을 외면하고 늘 입던 와이드 핏 슬랙스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어차피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입고 일할 옷을 주기 때문에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는 요즘 특이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어떤 미술관에 가서 라이브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그 근처에 서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흔히 미술관 전시에 작품을 지키기 위해 상주하는 스태프와는 조금 다르다. 물론 바디 페인팅을 한 퍼포머를 짓궂은 관람객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이 기본적으로 주어졌지만 거기에 퍼포머의 대변자라는 역할도 더해졌다. 그러니까 그는 전시공간 중앙에 마련된 퍼포먼스 무대와 관람객 사이의 일종의 중간지대 역할을 해야 하는 거였다.
역할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둥그런 무대 위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퍼포머나, 무대 주변으로 설치된 대형 회화에만 눈길을 주었다. 관람객이 적을 때면 그도 무대 위 퍼포머처럼 뭔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는 듯 무대 옆에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보았지만 오히려 관람객들이 자신의 존재를 매우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 인형처럼 서서 작품의 일부로 존재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그는 관람객이 많든 적든 자신의 역할만큼 존재감마저 어중간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사실 그게 아니었다. 작가가 마련한 무대 위에는 퍼포머뿐 아니라 거울처럼 주변을 반영하는 스틸(Stainless still) 조각이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집에서조차 마주치기 싫었던 제 모습이 자꾸만 드러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너무 싫어 자꾸 구석이나 제 모습이 비치지 않는 사각지대에만 서 있었는데, 미술관 측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지금보다는 존재를 좀 더 드러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대 근처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더 가까이서 보게 된 바디 페인팅한 모델 두 사람은 프로페셔널 그 자체였다. 그들은 별다른 지시사항 없이 그저 천천히, 자유롭게 움직였고 전시장의 흰 벽에 몸을 문질러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OO는 그 과정이 마치 탈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내 흔적은 이 세계에 남아 새겨지고, 더 단단한 새 외피를 얻게 되는 거였다. 퍼포먼스 동안 그들은 그렇게 그 시간만큼 성장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도 이미 단단해 보였지만, 일종의 탈피 과정을 거치며 더욱 안정되어가는 모델의 모습을 보며 그는 고작 거울 조각에 비친 제 모습도 잘 참지 못하는 주제에 엄청난 퍼포먼스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아무 생각 없이 잘 알아보지도 않고 꿀알바라는 지인의 사탕발림에 넘어가버리고 말았는데, 결국 이 지점에서 자신의 비뚤어진 열등감이 또 불쑥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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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안녕하세요. 여쭤볼 게 있는데, 혹시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일주일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참을 제 주변을 서성거리던 한 관람객이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내 굳은 표정이었던 OO는 놀라움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그 관람객과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궁금한 게 아주 많은 관람객이었다. 처음에 OO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기까지 했지만 사전 교육시간에 들었던 지식과 전시장에 있으면서 알게 되었던 사실들을 총동원하여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 관람객은 한참 만에야 감사 인사를 진하게 남기고 떠났고, 희한하게 일주일째 맡으면서도 큰 감흥이 없었던 독특한 향기가 그제야 불쑥 들어왔다. 작가는 콜라주처럼 향을 만들어 일종의 기억의 표식으로 활용한다고 하는데, 그 감각이 마치 버튼이라도 누른 듯 발동되기 시작한 거였다. 그러자 전시장의 공기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고, 하도 봐서 외울 것 같았던 회화 표면의 색깔과 흔적들도 다시금 생경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OO는 그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퍼포머의 느릿한 움직임에 발맞추어 중앙 무대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그러는 동안 스틸 조각에 비친 퉁퉁 부은 제 신체의 불만족스러운 외형 대신 움직임의 감각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퍼포머와 자신, 그리고 자신의 움직이는 사이에 시시각각 바뀌는 관람객 개개의 신체를 개별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과 자신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에게 무수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나는 온전한 나로 존재한다는 찰나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비록 지금껏 살아온 관성으로 깨달음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금 불만투성이의 삶으로 돌아가겠지만, 분명한 것은 찰나에 느꼈던 자유의 기분으로 인해 남은 기간 동안의 일은 무척 즐거울 것이며,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최악은 아닐 거라는 사실이었다. OO는 퇴근시간이 되어 화장실에서 다시 후줄근하게 늘어난 제 옷으로 갈아입으며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준 지인에게 꼭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Bliss Pool: Donna Huanca》 2023.03.09-06.08, 전시전경
*위 내용은 실제 전시를 기반으로 작성한 픽션입니다.
2023.04 ACK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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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2023, Published by 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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