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N
정희라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선임큐레이터
시간이 잘도 간다. 꽃이 만발하는 봄이 되어,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단서들이 살아있는 회화 작업들을 소개한다. 백요섭, 윤석원, 서원미 작가의 생성과 소멸이 교차적으로 드러나는 작품들은 우리의 시간이 쌓여가는 흔적들을 찾아 보게 한다. 이 흔적들은 그림 속 사건들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고, 우리는 이를 통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역사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서원미 작가 작업실 이미지
윤석원 작가 작업 이미지
백요섭, 휩쓸린 순간에 대한 실험22-19(20ea) ,가변크기(909x727mm x20ea), oil on canvas, mixedmedia, 2022
SIGN of the Times
백요섭의 작품들은 회화의 조형 요소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레이어 사이에 내재된 공간을 표현하며, 견고하게 만들어진 물감 흔적들 사이에 간직된 시간을 추적한다. 백요섭은 이러한 시간성에 대한 작업으로 가상의 무리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허물어지는 과정에 대한 연구를 이어왔다.
백요섭의 작업 키워드는 <중첩된 시간>이다. 중첩된 시간이란 우리가 쌓아가는 일상의 시간일 수도, 켜켜이 쌓아가는 그림 위 레이어(층)일 수도 있다. 작가는 기억의 층위와 그림의 레이어를 같은 연장선상에 놓는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건의 결합과 캔버스에 그려지는 조형 요소들의 집합을 비슷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재개발 지역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기록하기도 했던 작가는 같은 맥락에서 그림 위의 물감으로 가상의 무리가 지어지고, 이것이 흩어지는 모양새를 연구한다. 작가가 작업에 끌어온 <팔림세스트>는 고대에 기록하는 용도로 쓰던 양피지 위에 시간에 따라 새겨진 글이 지워지고 다시 새겨져 나온 글을 뜻하며, 이렇게 흔적이 지워지고 다시 겹쳐지는 것들은 반복되는 시간을 암시한다. 같은 곳에 중첩되는 것들은 지나간 기억이 희미해지고 새로운 기억이 강해지는 것과 같고, 캔버스 위에 물감을 바르고 그 위에 또 다른 색을 덧바르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시간-기억-이미지로 이어지는 개념은 최종적으로 캔버스 위 중첩된 색과 견고한 물성으로 나타난다. 물감을 반복적으로 덧바르며 층을 생성하고, 여러 번 긁어내어 소멸시킨다. 작가는 이 지난한 과정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데, 작업실 안으로 비추는 햇빛이 닿은 그림에서 자신이 쌓아온 층들이 고스란히 비쳐 보이는 것을 보고 안도한다. 이 물감 층들이 응축되고 해체되는 순간들을 그림 안에서 찾을 수 있다면, 작가의 지난 시간들을 발견하는 것과도 같다.
SIGN of the Society
윤석원, 서원미는 보다 시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사건과 인물, 사물들을 표현한다. 무엇보다 시간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삶과 죽음이다.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 마른 식물과 살아있는 식물, 장소의 안과 밖을 그리는 윤석원은 이 대조를 통해 우리가 속한 사회의 성질을 은유하며, 현재의 것이 시간이 흐르며 과거의 것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건이 반복됨을 암시한다. 사실적이면서도 추상적인 표현 기법으로 고전 회화와 현대 미술의 경계를 오가는 서원미의 작업들은 끝나지 않은 전쟁과 개개인의 사투를 소재로 하는데, 캔버스 위에 섬세한 성을 짓는 것처럼 물성을 구축하고 이를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행위가 반복된다. 이들의 작품들을 오롯이 대면하는 이 전시는 우리의 특정적 시간이 보내는 징후들을 캔버스 위의 사고와 사회 속 사건을 통해 인식하고 현재의 흔적들을 좇는 기회가 될 것이다.
윤석원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수평과 수직의 블러링 효과는 삶과 죽음과 같은 상반되는 의미들을 내포한다. 안정을 느끼게 하는 수평의 것과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시키고 각성하게 하는 수직의 것은 대조적인 느낌을 준다. 수직으로 뻗어 있는 거대한 탑에서 느껴지는 공격성과 광활한 평야에서 느끼는 평안함을 떠올려 보자. 수직의 뜻을 따를 것인지, 수평의 뜻을 따를 것인지에 따라 가치관의 성향이 갈릴 것이다. 윤석원의 작업 중에서 이 상반된 효과를 어떤 작품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의 작업에서 이러한 대비는 기법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 <마른 식물과 살아있는 인물>, 어떠한 공간이나 장소의 <안과 밖>과 같은 주제들을 그리는 윤석원은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을 중시한다. 물속에서 안쪽의 수압이 바깥과 같아져야 문이 열리는 잠수함을 연작으로 그려낸 윤석원은 잠수함 안에서의 생활이 자신이 생활하는 작업실에서의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잠수함 승조원과 자신을 동일시한 그는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고립되어 있는 그 상황을 긴장 속에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루한 고립과 단절로 설명한다. 수압을 견디는 잠수함의 하드웨어는 시시각각 변하는 지형, 해양생물, 해수의 흐름과 밀도, 함선의 중량 등 많은 변수를 확인하고 계산하는 소프트웨어와 만나 하나가 된다. 작업실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끊임없는 생각을 하며 그림을 그리는 어떠한 존재처럼 말이다.
서원미의 작업은 <페이싱 : Facing>, <검은 장막 : The Black Curtain>, <카니발헤드 : Carnivalhead>, <당신이 말을 멈추면 : When You Stop It>로 이어진다. 초기작인 <페이싱>과 <검은 장막> 연작은 모노톤에 가깝고, 카니발헤드 연작으로 오면서 색이 두드러진다. 모노톤이거나 무거운 색을 사용한 작업들은 고전회화 속 해부학을 연상시키거나 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작가 외부의 일에 보다 초점을 둔 것이었다. 화가라는 자신/그림을 바라보는 이들과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응시>의 문제를 풀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루었다. 색이 폭발하는 <카니발 헤드> 연작부터는 작가 내면에 집중하면서 자신과 캔버스 사이에 일어나는 내밀한 사투를 캔버스 위에 고스란히 남긴다. 작가와 바깥과의 관계에서 작가의 내밀한 안으로 시선을 옮겨오는 변화가 있었음에도 그의 화풍에 일관성이 있는 이유는 작업의 회화성에 집중하여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 가려는 길의 방향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진 형태를 흐트러뜨리고, 물성을 부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치열함은 역사적 전쟁과 개개인의 사투 모두를 아우른다.
2023.0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SIGN
정희라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선임큐레이터
시간이 잘도 간다. 꽃이 만발하는 봄이 되어,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단서들이 살아있는 회화 작업들을 소개한다. 백요섭, 윤석원, 서원미 작가의 생성과 소멸이 교차적으로 드러나는 작품들은 우리의 시간이 쌓여가는 흔적들을 찾아 보게 한다. 이 흔적들은 그림 속 사건들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고, 우리는 이를 통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역사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서원미 작가 작업실 이미지
윤석원 작가 작업 이미지
백요섭, 휩쓸린 순간에 대한 실험22-19(20ea) ,가변크기(909x727mm x20ea), oil on canvas, mixedmedia, 2022
SIGN of the Times
백요섭의 작품들은 회화의 조형 요소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레이어 사이에 내재된 공간을 표현하며, 견고하게 만들어진 물감 흔적들 사이에 간직된 시간을 추적한다. 백요섭은 이러한 시간성에 대한 작업으로 가상의 무리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허물어지는 과정에 대한 연구를 이어왔다.
백요섭의 작업 키워드는 <중첩된 시간>이다. 중첩된 시간이란 우리가 쌓아가는 일상의 시간일 수도, 켜켜이 쌓아가는 그림 위 레이어(층)일 수도 있다. 작가는 기억의 층위와 그림의 레이어를 같은 연장선상에 놓는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건의 결합과 캔버스에 그려지는 조형 요소들의 집합을 비슷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재개발 지역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기록하기도 했던 작가는 같은 맥락에서 그림 위의 물감으로 가상의 무리가 지어지고, 이것이 흩어지는 모양새를 연구한다. 작가가 작업에 끌어온 <팔림세스트>는 고대에 기록하는 용도로 쓰던 양피지 위에 시간에 따라 새겨진 글이 지워지고 다시 새겨져 나온 글을 뜻하며, 이렇게 흔적이 지워지고 다시 겹쳐지는 것들은 반복되는 시간을 암시한다. 같은 곳에 중첩되는 것들은 지나간 기억이 희미해지고 새로운 기억이 강해지는 것과 같고, 캔버스 위에 물감을 바르고 그 위에 또 다른 색을 덧바르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시간-기억-이미지로 이어지는 개념은 최종적으로 캔버스 위 중첩된 색과 견고한 물성으로 나타난다. 물감을 반복적으로 덧바르며 층을 생성하고, 여러 번 긁어내어 소멸시킨다. 작가는 이 지난한 과정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데, 작업실 안으로 비추는 햇빛이 닿은 그림에서 자신이 쌓아온 층들이 고스란히 비쳐 보이는 것을 보고 안도한다. 이 물감 층들이 응축되고 해체되는 순간들을 그림 안에서 찾을 수 있다면, 작가의 지난 시간들을 발견하는 것과도 같다.
SIGN of the Society
윤석원, 서원미는 보다 시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사건과 인물, 사물들을 표현한다. 무엇보다 시간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삶과 죽음이다.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 마른 식물과 살아있는 식물, 장소의 안과 밖을 그리는 윤석원은 이 대조를 통해 우리가 속한 사회의 성질을 은유하며, 현재의 것이 시간이 흐르며 과거의 것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건이 반복됨을 암시한다. 사실적이면서도 추상적인 표현 기법으로 고전 회화와 현대 미술의 경계를 오가는 서원미의 작업들은 끝나지 않은 전쟁과 개개인의 사투를 소재로 하는데, 캔버스 위에 섬세한 성을 짓는 것처럼 물성을 구축하고 이를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행위가 반복된다. 이들의 작품들을 오롯이 대면하는 이 전시는 우리의 특정적 시간이 보내는 징후들을 캔버스 위의 사고와 사회 속 사건을 통해 인식하고 현재의 흔적들을 좇는 기회가 될 것이다.
윤석원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수평과 수직의 블러링 효과는 삶과 죽음과 같은 상반되는 의미들을 내포한다. 안정을 느끼게 하는 수평의 것과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시키고 각성하게 하는 수직의 것은 대조적인 느낌을 준다. 수직으로 뻗어 있는 거대한 탑에서 느껴지는 공격성과 광활한 평야에서 느끼는 평안함을 떠올려 보자. 수직의 뜻을 따를 것인지, 수평의 뜻을 따를 것인지에 따라 가치관의 성향이 갈릴 것이다. 윤석원의 작업 중에서 이 상반된 효과를 어떤 작품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의 작업에서 이러한 대비는 기법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 <마른 식물과 살아있는 인물>, 어떠한 공간이나 장소의 <안과 밖>과 같은 주제들을 그리는 윤석원은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을 중시한다. 물속에서 안쪽의 수압이 바깥과 같아져야 문이 열리는 잠수함을 연작으로 그려낸 윤석원은 잠수함 안에서의 생활이 자신이 생활하는 작업실에서의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잠수함 승조원과 자신을 동일시한 그는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고립되어 있는 그 상황을 긴장 속에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루한 고립과 단절로 설명한다. 수압을 견디는 잠수함의 하드웨어는 시시각각 변하는 지형, 해양생물, 해수의 흐름과 밀도, 함선의 중량 등 많은 변수를 확인하고 계산하는 소프트웨어와 만나 하나가 된다. 작업실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끊임없는 생각을 하며 그림을 그리는 어떠한 존재처럼 말이다.
서원미의 작업은 <페이싱 : Facing>, <검은 장막 : The Black Curtain>, <카니발헤드 : Carnivalhead>, <당신이 말을 멈추면 : When You Stop It>로 이어진다. 초기작인 <페이싱>과 <검은 장막> 연작은 모노톤에 가깝고, 카니발헤드 연작으로 오면서 색이 두드러진다. 모노톤이거나 무거운 색을 사용한 작업들은 고전회화 속 해부학을 연상시키거나 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작가 외부의 일에 보다 초점을 둔 것이었다. 화가라는 자신/그림을 바라보는 이들과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응시>의 문제를 풀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루었다. 색이 폭발하는 <카니발 헤드> 연작부터는 작가 내면에 집중하면서 자신과 캔버스 사이에 일어나는 내밀한 사투를 캔버스 위에 고스란히 남긴다. 작가와 바깥과의 관계에서 작가의 내밀한 안으로 시선을 옮겨오는 변화가 있었음에도 그의 화풍에 일관성이 있는 이유는 작업의 회화성에 집중하여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 가려는 길의 방향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진 형태를 흐트러뜨리고, 물성을 부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치열함은 역사적 전쟁과 개개인의 사투 모두를 아우른다.
2023.04 ACK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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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2023, Published by 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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