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미술관 2023 주제기획전 《기억·공간》
있잖아 그거 2
Whatchamacallit II
김영기(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아르코미술관에 얽힌 기억과 의의를 태생으로 하는 전시이다. 그런데 더 다행스러운 건 미술관과 대학로의 정체성을 몰라도 좋은 전시이다. 특히 필자에겐 기억의 일반적인 속성 중 하나를 곱씹는 계기였다.
“쿵 쿠구작-작 쿵 쿠구작-“
아르코미술관의 전시 인트로라기엔 좀 많이 흥겨운 일렉트릭 사운드. 이현종의 사운드 작업 〈하이햇(2023)〉이 전시장 초입에 울려 퍼진다. 그 어떤 시각적 단서도 없다. 실용적인 통로 입구에 덜렁 소리만, 뒤이어 스피커밖에 보이는 게 없다. 음성, 동물 소리, 사물 소리, 미술관 안팎의 잡음을 소스 삼아 만든 음악이다. 의의를 되짚지 않아도 좋다. 《기억·공간》의 기억을 부르는 단서로 필자의 귓가에 이미 각인되었다.
김보경은 이미지의 ‘합성’과 뜨개질이란 ‘신체 동작’을 동기화한다. 어떻게? 이미지 합성 작업을 하다가 정말 뜨개질 좀 하고, 하던 합성 작업 재개를 반복했다. 그리고 전시장 통로를 따라 뜨개질하듯 둘을 병치했다. 사건을 매만지고 엮어 역사로 내는 탐구적, 수행적 자세를 뜨개질에 투영한 것. 물론 소스 이미지는 아르코미술관을 둘러싼 유의미(하다고 대개 여기는)한 지역과, 사건의 기록/흔적이지만 억지로 더듬어 곱씹지 않아도, 공간이 주는 인상만으로 충분하다. 뜨개질 결과물로 내걸린 옷가지(?)가 소스 이미지의 색조를 십분 백분 반영한다. 이를테면 역사의 희극 씨실 비극 날실을 골라 당기고 돌려 매며 엮는 광경을 직조로 비유한 셈이다.
박민하_터_acrylic, oil, wax, MIRAVAL® on canvas_215x215cm, 4ea_2023
반전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 때때로 난 의외성에서 매력을 느낀다. 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대할 때의 생소함과 신선함, 약간의 조심스러움과 호기심. 반면, 한 가지 면만 끝없이 이어진다 생각하면 벌써 끔찍하다. 면면을 잇는 끈이 꼭 의외성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를, 또 어딘가를 떠올릴 때 늘 생각한다. 다른 이의 시야에선 어떻게 보일까. 한 주체가 요모조모 대상의 다른 면을 엿보는 것과, 하나의 대상을 두고 여러 주체가 각자 다르게 바라보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결국 주체의 규모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서로 동일한 작용인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기억이든 다채로운 면모가 있다. ‘이해’란, 어떤 면에선, 잘 깎아놓은 보석을 돌려 가며 감상하는 자세와 닮았다. 그렇다면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 그전에 무언가 재차 떠올리는 것은, 매번 새로운 시각을 시뮬레이션하는 일이 아닐까? 잠시간 관객은 박민하가 뿌려 놓은 기억 체스판을 누비는 나이트(knight)가, 또 그 체스판 넉 장이 잇닿은 기억 사분면을 빙빙 도는 자유곡선이 된다.
기억은 때때로 경계를 흐리고 넘는다. 그래서 내 머릿속 회로에는 내용보다는 사람 얼굴처럼 인상으로 남는다. 기억의 내용이란 끙끙대며 그 얼굴을 더듬어 유추한 것들뿐. 덜 중요한 건 증발하고 먹고 난 족발처럼 굵고 단단한 뼈만 남는다. 그 뼈는 특정한 내용을 지시하기보다 색채나 형태, 패턴에 가까운 이미지이다. 글 같지도, 기록 사진 같지도 않다는 이야기. 그걸 단서로 기억을 기억해 나간다. 그래서 늘 (미친 듯) 재구성된다. 황원해가 선보이는 이미지의 특성 중 하나는, 무어라 지칭할 수 없는 것들뿐인데, 알 것도 같다는 점이다. 빌딩 표면의 금속성 외장이나 유리 표면에 반사되는 빛, 그에 따라 일렁이는 주변 형상은, 특히 낯선 도시에 들어설 때 어김없이 맞이하는 첫인상이다. 이번 이미지는 아마, 그림 너머까지 넘실대는 아르코미술관 주변의 빛의 초상이겠지만, 한편으론 문득 약간의 ‘기억의 미화’도 함께 느낀다. 조형적 재미까지 자연스레 가미해 내는 역량 덕분이리라.
황원해_Slurry Wall_acrylic on canvas_dimensions variable_2023
윤향로_Tagging-K_Epson UltraChrome inkjet, acrylic on canvas_300x800cm_2023_부분
“울트라크롬?”
출력/인쇄에 관심이 있어 눈이 번쩍 띄었다. 높이 3미터, 폭 8미터 화면 앞에서, ‘비용이 제법 될텐데? 몽땅 울트라크롬 잉크로 출력하면’, 갸웃거리며 얼마나 잘 나왔나 눈에 힘주어 표면을 훑는다. 모노크롬 도트를 찍은 출력물 표면에, 검정 아크릴 물감을, 마치 그라피티를 하듯 호쾌한 궤적으로 스프레이 페인팅했다. 매트한 울트라크롬 출력물 표면과, 상대적으로 광택이 있는 아크릴 부위가 구분된다. 더듬더듬 눈으로 따라가며 쓸데없는 열정을 부린다. ‘어느 쪽이 단가가 높을까?’, ‘출력기에 들어갔다 나오는 과정은 의미에 몇 퍼센트나 기여했을까?’ 윤향로는 아르코미술관과 얽힌 텍스트를, 흔적과 같은 형상으로 화면에 ‘태깅’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필자는 폐잉크로 그린 그림, 출력물, 해상도, 도트, 묵어서 누르스름한 인화지 뭉치, 깨진 디지털 데이터와 같은 기억을 태깅했다. 멀찍이 조망하니 수묵화로 착각할법한, ‘코끼리 얼굴 옆모습’ 같은 형상이 나중에야 한눈에 들어왔다. “뭐 일종의 ‘코’ 꿰이는 일이기도 하지, 태깅이.” #출력 #장비에 #코 #꿰면 #속탄다 #시커멓게
아르코미술관의 정문 계단을 오르면 동서남북 발길 내딛을 곳이 많다. 정확히는 앞뒤 좌우로 열린 한가운데에 사통팔달의 교차로에 해당하는 작은 야외 로비가 트였다. 문승현은 이 공간에 신체성, 즉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소비, 인식을 허우적허우적 흩뿌려 살아 있는 마당으로 만든다. 용도와 권위, 인상으로 가로세로 규정된 점선 같은 화이트큐브는, 몸짓에 따라, 적갈색 벽돌로 둘러싸인 오늘 낮 두 시간을 걸었던 실 공간으로 조금씩 물들어간다. 제목 〈전시장의 투명한 벽은 시에나 색으로 물든다〉처럼. 아르코미술관이며 마로니에공원이며 도배된 돌바닥에 뾰족한 하이힐 굽을 먹혀 본 사람이라면 더욱 동감할 듯싶다. 잘 구운 시에나 색 벽돌 같은 텁텁한 짜증을.
문승현(옐로우 닷 컴퍼니)_전시장의 투명한 벽은 시에나 색으로 물든다_2-channel video, color, sound_2218_2023
기억의 속성은 명백한 과거이다. 누적, 축적, 고착, 변색하면, 회상이, 일화가, 역사가, 신화가 된다. 잘 쌓이고 익고 굳은 기억 메주 덩어리만 덜렁 상속받은 후손들은 늘 당혹스럽다. 일화는, 사료는, 역사는 어떻게 접근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양승빈은 그 한 가지 해답을 제안한다. 건축가 김수근이 만들다 만 의자를 끝까지 만들어 가는 과정을 한 편의 스릴러로 펼친다. 갖은 자료와 추적, 가정, 유추 속에 재해석, 재탄생한 의자.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상력이라 한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실제로 재탄생, 재구성한 극화이지만, 어쩐지 이 사실을 망각한 사람이 더 많다. 기억은 실로 이러한 과정 없이 실체와 생명력을 가지지 못한다. 주어지는 정보와 단서, 재료는 항상 부족하고, 늘 부정확하다. 그게 ‘기억스러운’ 모든 것의 태생적 속성이다. 인정하면 상상할 수 있다. 자유로워진다.
기대와 좌절로 매일이 희로애락이던 학생 시절, 답답한 마음에 밤 산책을 자주 했다. 컴컴한 공원을 열 손처럼 가득 감싼 거무죽죽한 나무 실루엣들, 그 사이를 비집고 나름의 한 줄기 정취를 동냥처럼 던지던 불그스레한 가로등 빛은 이십 년이 흘러도 생생하다. 특히 눈이 오는 날 만큼은 거르는 법이 없었다. 풀이 다 죽어 쭈글쭈글한 점퍼 한 벌에 다 닳아 이미 민둥 바닥인 운동화를 끌며 뒤뚱뒤뚱. 남들 발자국 찍힌 설원을 내 발자국으로 지워가며 실컷 헤맨 끝에, 쌓인 눈에 두 톤은 밝아진 가로등에 주황색으로 물든 새벽을 맞곤 했다. 아마 안경수도 느낀 모양이다. 마로니에 공원의 성탄 전야를 캔버스에 흩뿌리면서. 흰 눈 덮어쓴 시커먼 나뭇가지 헤치며 일렁이는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이야말로, 여러 의미로 저마다 젊고 뜨겁던 순간을 부르는 주문임을.
전시를 얼추 다 섭렵한 기분으로 빨간 벽돌 계단을 나서다 마무리로 화장실 한번 들르곤 한다. 이현종의 사운드 작업 〈화장실 명언(2023)〉이 반갑게 맞는다. 흥겨운 리듬에 맞춰 어깨춤을 추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스스로가 문득 우습다. 볼일은 안 보고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배선은 어떻게 했는지 두리번두리번 거울에 비친 꼴은 더 우습다. 심도 있는 감상을 위해 괜히 좌변기 칸에 한번 앉은 상황은 더더욱 우습다. 여간하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화장실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허우적대던 기억은 앞으로 영영 잊지 못할 듯싶다. 아르코미술관 화장실이란 장소를 지날 때마다. 도입과 마무리를 맡은 이현종의 역할이 실로 선명하고 지대하다.
한껏 들뜬 기분으로 손을 씻고 깔끔한 모양새로 나서려는 데 웬걸, 끝이 아니다. 건너편 프로젝트 스페이스엔 다이아거널 써츠(Diagonal Thoughts, 이름도 참 심오하다)의 체험형 작업 〈앉히다:다리가 자유로워질 때〉가 진정한 마지막을 장식하려 대기 중이다. 오랜만에 느낀다. 마치 보스를 깨면 진짜 최종 보스가 등장하는 클리셰, 게임의 대단원을 대하는 그 느낌. 한 계단 낮은 전시장엔 세 종류의 목조 의자가 덩그러니 서(있거나 널브러져)있다. 제목 그대로 앉아 보는 작업이다. 딱 그러고 싶게 생겼다. 그리고 길게 앉기 부적합하다. 그저, 딱 ‘앉다’의 의미를 생각해 볼 만한 작은 짬을 선물한다. 물건을 둘러싸고 멀거니 서서 사진이나 찍는, 화물신앙에 심취한 오지 원주민 같은 짬 말고. 엉덩이와 두 다리에 오가는 무게감과, 벽돌 창틀 너머의 풍경과, 괜히 부는 바람과, 마침 그때 자리한 뭇사람의 말소리를 체험하고 기억하는 그런 짬 말이다.
본문 제목에 ‘2’가 붙은 건, 2021년 OCI미술관에서 열린 양정욱 작가의 개인전 《Maybe It's Like That》의 전시 서문 「있잖아 그거」와 제목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서두의 ‘기억의 일반적인 속성’은 바로, 기껏 떠오른 기억이란 게 대개 ‘있잖아 그거’란 점이다. 기억은 하늘에서 불쑥 떨어진다. 말로 하기 어려운 모양새로만. 생각해보면, 삶의 단면은 말의 조합과 거리가 멀다. 애석하게도 모든 경험은, 말보단, 말과 말 사이의 것들로 탱탱 채워진다. 시각 예술의 역할, 이미지의 위력은 그런 틈새에서 나온다. 그래서 미술은 덜 애석하다.
2023.07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ly.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아르코미술관 2023 주제기획전 《기억·공간》
있잖아 그거 2
Whatchamacallit II
김영기(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아르코미술관에 얽힌 기억과 의의를 태생으로 하는 전시이다. 그런데 더 다행스러운 건 미술관과 대학로의 정체성을 몰라도 좋은 전시이다. 특히 필자에겐 기억의 일반적인 속성 중 하나를 곱씹는 계기였다.
“쿵 쿠구작-작 쿵 쿠구작-“
아르코미술관의 전시 인트로라기엔 좀 많이 흥겨운 일렉트릭 사운드. 이현종의 사운드 작업 〈하이햇(2023)〉이 전시장 초입에 울려 퍼진다. 그 어떤 시각적 단서도 없다. 실용적인 통로 입구에 덜렁 소리만, 뒤이어 스피커밖에 보이는 게 없다. 음성, 동물 소리, 사물 소리, 미술관 안팎의 잡음을 소스 삼아 만든 음악이다. 의의를 되짚지 않아도 좋다. 《기억·공간》의 기억을 부르는 단서로 필자의 귓가에 이미 각인되었다.
김보경은 이미지의 ‘합성’과 뜨개질이란 ‘신체 동작’을 동기화한다. 어떻게? 이미지 합성 작업을 하다가 정말 뜨개질 좀 하고, 하던 합성 작업 재개를 반복했다. 그리고 전시장 통로를 따라 뜨개질하듯 둘을 병치했다. 사건을 매만지고 엮어 역사로 내는 탐구적, 수행적 자세를 뜨개질에 투영한 것. 물론 소스 이미지는 아르코미술관을 둘러싼 유의미(하다고 대개 여기는)한 지역과, 사건의 기록/흔적이지만 억지로 더듬어 곱씹지 않아도, 공간이 주는 인상만으로 충분하다. 뜨개질 결과물로 내걸린 옷가지(?)가 소스 이미지의 색조를 십분 백분 반영한다. 이를테면 역사의 희극 씨실 비극 날실을 골라 당기고 돌려 매며 엮는 광경을 직조로 비유한 셈이다.
박민하_터_acrylic, oil, wax, MIRAVAL® on canvas_215x215cm, 4ea_2023
반전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 때때로 난 의외성에서 매력을 느낀다. 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대할 때의 생소함과 신선함, 약간의 조심스러움과 호기심. 반면, 한 가지 면만 끝없이 이어진다 생각하면 벌써 끔찍하다. 면면을 잇는 끈이 꼭 의외성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를, 또 어딘가를 떠올릴 때 늘 생각한다. 다른 이의 시야에선 어떻게 보일까. 한 주체가 요모조모 대상의 다른 면을 엿보는 것과, 하나의 대상을 두고 여러 주체가 각자 다르게 바라보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결국 주체의 규모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서로 동일한 작용인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기억이든 다채로운 면모가 있다. ‘이해’란, 어떤 면에선, 잘 깎아놓은 보석을 돌려 가며 감상하는 자세와 닮았다. 그렇다면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 그전에 무언가 재차 떠올리는 것은, 매번 새로운 시각을 시뮬레이션하는 일이 아닐까? 잠시간 관객은 박민하가 뿌려 놓은 기억 체스판을 누비는 나이트(knight)가, 또 그 체스판 넉 장이 잇닿은 기억 사분면을 빙빙 도는 자유곡선이 된다.
기억은 때때로 경계를 흐리고 넘는다. 그래서 내 머릿속 회로에는 내용보다는 사람 얼굴처럼 인상으로 남는다. 기억의 내용이란 끙끙대며 그 얼굴을 더듬어 유추한 것들뿐. 덜 중요한 건 증발하고 먹고 난 족발처럼 굵고 단단한 뼈만 남는다. 그 뼈는 특정한 내용을 지시하기보다 색채나 형태, 패턴에 가까운 이미지이다. 글 같지도, 기록 사진 같지도 않다는 이야기. 그걸 단서로 기억을 기억해 나간다. 그래서 늘 (미친 듯) 재구성된다. 황원해가 선보이는 이미지의 특성 중 하나는, 무어라 지칭할 수 없는 것들뿐인데, 알 것도 같다는 점이다. 빌딩 표면의 금속성 외장이나 유리 표면에 반사되는 빛, 그에 따라 일렁이는 주변 형상은, 특히 낯선 도시에 들어설 때 어김없이 맞이하는 첫인상이다. 이번 이미지는 아마, 그림 너머까지 넘실대는 아르코미술관 주변의 빛의 초상이겠지만, 한편으론 문득 약간의 ‘기억의 미화’도 함께 느낀다. 조형적 재미까지 자연스레 가미해 내는 역량 덕분이리라.
황원해_Slurry Wall_acrylic on canvas_dimensions variable_2023
윤향로_Tagging-K_Epson UltraChrome inkjet, acrylic on canvas_300x800cm_2023_부분
“울트라크롬?”
출력/인쇄에 관심이 있어 눈이 번쩍 띄었다. 높이 3미터, 폭 8미터 화면 앞에서, ‘비용이 제법 될텐데? 몽땅 울트라크롬 잉크로 출력하면’, 갸웃거리며 얼마나 잘 나왔나 눈에 힘주어 표면을 훑는다. 모노크롬 도트를 찍은 출력물 표면에, 검정 아크릴 물감을, 마치 그라피티를 하듯 호쾌한 궤적으로 스프레이 페인팅했다. 매트한 울트라크롬 출력물 표면과, 상대적으로 광택이 있는 아크릴 부위가 구분된다. 더듬더듬 눈으로 따라가며 쓸데없는 열정을 부린다. ‘어느 쪽이 단가가 높을까?’, ‘출력기에 들어갔다 나오는 과정은 의미에 몇 퍼센트나 기여했을까?’ 윤향로는 아르코미술관과 얽힌 텍스트를, 흔적과 같은 형상으로 화면에 ‘태깅’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필자는 폐잉크로 그린 그림, 출력물, 해상도, 도트, 묵어서 누르스름한 인화지 뭉치, 깨진 디지털 데이터와 같은 기억을 태깅했다. 멀찍이 조망하니 수묵화로 착각할법한, ‘코끼리 얼굴 옆모습’ 같은 형상이 나중에야 한눈에 들어왔다. “뭐 일종의 ‘코’ 꿰이는 일이기도 하지, 태깅이.” #출력 #장비에 #코 #꿰면 #속탄다 #시커멓게
아르코미술관의 정문 계단을 오르면 동서남북 발길 내딛을 곳이 많다. 정확히는 앞뒤 좌우로 열린 한가운데에 사통팔달의 교차로에 해당하는 작은 야외 로비가 트였다. 문승현은 이 공간에 신체성, 즉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소비, 인식을 허우적허우적 흩뿌려 살아 있는 마당으로 만든다. 용도와 권위, 인상으로 가로세로 규정된 점선 같은 화이트큐브는, 몸짓에 따라, 적갈색 벽돌로 둘러싸인 오늘 낮 두 시간을 걸었던 실 공간으로 조금씩 물들어간다. 제목 〈전시장의 투명한 벽은 시에나 색으로 물든다〉처럼. 아르코미술관이며 마로니에공원이며 도배된 돌바닥에 뾰족한 하이힐 굽을 먹혀 본 사람이라면 더욱 동감할 듯싶다. 잘 구운 시에나 색 벽돌 같은 텁텁한 짜증을.
문승현(옐로우 닷 컴퍼니)_전시장의 투명한 벽은 시에나 색으로 물든다_2-channel video, color, sound_2218_2023
기억의 속성은 명백한 과거이다. 누적, 축적, 고착, 변색하면, 회상이, 일화가, 역사가, 신화가 된다. 잘 쌓이고 익고 굳은 기억 메주 덩어리만 덜렁 상속받은 후손들은 늘 당혹스럽다. 일화는, 사료는, 역사는 어떻게 접근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양승빈은 그 한 가지 해답을 제안한다. 건축가 김수근이 만들다 만 의자를 끝까지 만들어 가는 과정을 한 편의 스릴러로 펼친다. 갖은 자료와 추적, 가정, 유추 속에 재해석, 재탄생한 의자.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상력이라 한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실제로 재탄생, 재구성한 극화이지만, 어쩐지 이 사실을 망각한 사람이 더 많다. 기억은 실로 이러한 과정 없이 실체와 생명력을 가지지 못한다. 주어지는 정보와 단서, 재료는 항상 부족하고, 늘 부정확하다. 그게 ‘기억스러운’ 모든 것의 태생적 속성이다. 인정하면 상상할 수 있다. 자유로워진다.
기대와 좌절로 매일이 희로애락이던 학생 시절, 답답한 마음에 밤 산책을 자주 했다. 컴컴한 공원을 열 손처럼 가득 감싼 거무죽죽한 나무 실루엣들, 그 사이를 비집고 나름의 한 줄기 정취를 동냥처럼 던지던 불그스레한 가로등 빛은 이십 년이 흘러도 생생하다. 특히 눈이 오는 날 만큼은 거르는 법이 없었다. 풀이 다 죽어 쭈글쭈글한 점퍼 한 벌에 다 닳아 이미 민둥 바닥인 운동화를 끌며 뒤뚱뒤뚱. 남들 발자국 찍힌 설원을 내 발자국으로 지워가며 실컷 헤맨 끝에, 쌓인 눈에 두 톤은 밝아진 가로등에 주황색으로 물든 새벽을 맞곤 했다. 아마 안경수도 느낀 모양이다. 마로니에 공원의 성탄 전야를 캔버스에 흩뿌리면서. 흰 눈 덮어쓴 시커먼 나뭇가지 헤치며 일렁이는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이야말로, 여러 의미로 저마다 젊고 뜨겁던 순간을 부르는 주문임을.
전시를 얼추 다 섭렵한 기분으로 빨간 벽돌 계단을 나서다 마무리로 화장실 한번 들르곤 한다. 이현종의 사운드 작업 〈화장실 명언(2023)〉이 반갑게 맞는다. 흥겨운 리듬에 맞춰 어깨춤을 추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스스로가 문득 우습다. 볼일은 안 보고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배선은 어떻게 했는지 두리번두리번 거울에 비친 꼴은 더 우습다. 심도 있는 감상을 위해 괜히 좌변기 칸에 한번 앉은 상황은 더더욱 우습다. 여간하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화장실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허우적대던 기억은 앞으로 영영 잊지 못할 듯싶다. 아르코미술관 화장실이란 장소를 지날 때마다. 도입과 마무리를 맡은 이현종의 역할이 실로 선명하고 지대하다.
한껏 들뜬 기분으로 손을 씻고 깔끔한 모양새로 나서려는 데 웬걸, 끝이 아니다. 건너편 프로젝트 스페이스엔 다이아거널 써츠(Diagonal Thoughts, 이름도 참 심오하다)의 체험형 작업 〈앉히다:다리가 자유로워질 때〉가 진정한 마지막을 장식하려 대기 중이다. 오랜만에 느낀다. 마치 보스를 깨면 진짜 최종 보스가 등장하는 클리셰, 게임의 대단원을 대하는 그 느낌. 한 계단 낮은 전시장엔 세 종류의 목조 의자가 덩그러니 서(있거나 널브러져)있다. 제목 그대로 앉아 보는 작업이다. 딱 그러고 싶게 생겼다. 그리고 길게 앉기 부적합하다. 그저, 딱 ‘앉다’의 의미를 생각해 볼 만한 작은 짬을 선물한다. 물건을 둘러싸고 멀거니 서서 사진이나 찍는, 화물신앙에 심취한 오지 원주민 같은 짬 말고. 엉덩이와 두 다리에 오가는 무게감과, 벽돌 창틀 너머의 풍경과, 괜히 부는 바람과, 마침 그때 자리한 뭇사람의 말소리를 체험하고 기억하는 그런 짬 말이다.
본문 제목에 ‘2’가 붙은 건, 2021년 OCI미술관에서 열린 양정욱 작가의 개인전 《Maybe It's Like That》의 전시 서문 「있잖아 그거」와 제목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서두의 ‘기억의 일반적인 속성’은 바로, 기껏 떠오른 기억이란 게 대개 ‘있잖아 그거’란 점이다. 기억은 하늘에서 불쑥 떨어진다. 말로 하기 어려운 모양새로만. 생각해보면, 삶의 단면은 말의 조합과 거리가 멀다. 애석하게도 모든 경험은, 말보단, 말과 말 사이의 것들로 탱탱 채워진다. 시각 예술의 역할, 이미지의 위력은 그런 틈새에서 나온다. 그래서 미술은 덜 애석하다.
2023.07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ly.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