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윤택 개인전 《진술하는 회화》 전시 서문
줄기차게, 흐드러지게도 꽃피는 빈칸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미술에서 작업의 지속성과 연속성은 외면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작업관 구축과, 관점의 신뢰도/설득력에 힘을 싣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사윤택은, 이런저런 순간을 한 화면으로 능숙히 잇고 깁고 겹쳐 왔다. 이미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일정 부분 성공적으로 세상과 공유하고 있다. 그에 머물지 않고 매번 다른 각도와 파장으로 새 생각을 토핑하며 작업은 변모를 거듭한다. 그의 작업은 자고 나면 실황이 바뀌는 전쟁터이다. 생각은 계속해서 공급된다. 생각 유통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여전히 꾸준히 부지런히 생각’해댄’다. 대상을 둘러싼 시선이나 사건, 감정, 사색, 깨달음은 반투명한 무채색을 띤 어떤 ‘기운’ 혹은 ‘힘’을 연상시키며 화면에 개입한다. 태초의 한두 가닥은 그저 간을 보며 조심스레 변두리를 맴돌지만, 이윽고 서로 맞닿고 겹치고 뒤얽히며, 편평한 표면이 점차 출렁인다. 마침내 사방을 짓쳐 가로지르며, 브릴리언트 컷으로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듯 보다 섬세히 화면을 쪼고 깎는다. 잔상이나 프리즘이 떠오르는 다양한 형태는 화면 속 상황에 개입하기도, 또 모른 척 짐짓 한 발 빼거나 아예 유리되기도 한다.
이전보다 한층 복잡다단한 화면이지만 오히려 나는 편안을 느꼈다. 그의 텁텁한 생각과 시선은 이제 화면이 대신(또한 노골적으로) 가득 짊어진 덕에, 자잘한 생각 파편을 촘촘히 훑으려 시선을 더 이상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문득 북어가 떠올랐다. 납작 두드려 패 편편한 북어. 온전히 그려 내긴 힘들지만 부분적으로 상상 가능한, 4차원 혹은 그 이상의 입체도형을 평면에 두드려 펴서 널어 둔, 딱 그것 말이다. 조각 단편의 모양, 커팅한 각 면에 일일이 집착하기보단 수십 차원 세상을 북어 삼아 두드려 편 전개도를 떠올리자, 비로소 화면 전체가 한 덩이로 이미지화했다.
‘이미지화’란 다름 아니라 저작물의 차수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무언가가 실물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화면 캡처를 생각하면 쉽다. 모니터 속 화면은 특정 코드의 실행 광경이다. 그러나 저장한 스크린샷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코드가 생성된 것이다. 추상화의 결과물로서의 텍스트가 이미지화하면 오히려 새로운 실체가 된다. 어떤 사건을 특정 색상의 점으로 표현할 때, 이 점의 집합은, 비슷한 성격의 다른 사건과 연상을 공유하여 일종의 코드로 작용할 수도, 혹은 새로운 이미지를 낳는 실체 노릇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가 추상화라면 후자는 이미지화에 해당한다. ‘차원을 뛰어넘는다’는 표현은 이러한 면에서, 미술 창작 행위에 대한 매우 적합하고 본질적인(=잣대나 규범처럼 구는) 묘사이다.
“이게 바로 물감입니다. 짜 놓은 물감 덩어리!”와 같이, 재료의 물성을 강조하는 작업이 아닌 이상, 현대 회화는 기본적으로 대상이나 생각 자체보다는 그에서 파생한 이미지를 다룬다. ‘논리적 완결’, ‘충분한 합리성 확보’, ‘이성적인 구성’ 따위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지점이 창조성을 담보한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를 위해 화면을 이미지화하려 든다.
이미지화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이미 공유된 논리의 폐기를 선언하거나, 자신만의 논리를 세워 다른 논리를 강제로 대체하거나, 익숙한 논리를 극도로 축소, 확대, 중첩, 개인화하거나, 심지어 풀이할 수 없는(혹은 풀이가 빗나가게끔 의도한) 장치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등의 방식으로 ‘흐리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조금 다르다. 물론 회화 작가인 이상, 궁극적으로 이미지화의 유혹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섣불리 뭉개려 들진 않는다. 그는 차분히 설명한다. 작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행위 중 하나, 설명 말이다. 그의 설명은 늘 변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매 설명의 순간마다 그는, 각각의 순간을 사는 서로 다른 사람이니까. 때론 조곤조곤, 종종 구구절절, 가끔 답답함에 목청을 돋우며 한없이 격렬히, 그러다 괜스레 부끄럽기도 하고 머쓱한 기분에 문득 소심하게, 지지부진한 손끝에 때론 절망적으로, 어느 날에는 해탈한 사람처럼 멀거니, 그러다가도 동료 작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늦은 밤 질투심에 불타, 또 마지막 작업이 될 것처럼 절박하게. 다른 각도, 다른 순간, 다른 시각, 다른 평면을 타고 거슬러 자꾸만 피어나는 빈칸에 진술하고 또 진술한다. 설명을 비트는 또 다른 설명의 향연. 저지르고 후회하길 반복하며 그의 화면은 이미지화한다. 천재 수학자 라마누잔이 발산하는 자연수를 쌓아 역설적으로 수렴해 내듯(라마누잔합, Ramanujan Summation), 그는 설명에 무한급수를 취하여 역으로 탈 설명화, 이미지화한다. 그만의 이러한 회화 메커니즘을 고려하면, 전시 제목 한번 그럴싸하다.
그는 회화 속에서 회화를 벗어나려 든다. 파고 깎고 겹치고 뒤집고 표면을 깨부순다. 의외로 그러기 적합한 게 또 회화이다. 회화답기 좋은 게 회화이며, 또 한계를 벗어나려 몸부림칠 때 그 몸부림이 가장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것 역시 회화이다. 작업을 두루 살피며 그는 줄곧 ‘헛헛해’했다. 무에 그리 헛헛한 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처음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 이미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그렇지 않은 것들’이겠거니 대수롭잖게 여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꾸만 새로 피어나는, 진술할 빈칸을 감지하는 사윤택 특유의 능력 탓이 아닐까 싶다.
2023.08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ugust.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사윤택 개인전 《진술하는 회화》 전시 서문
줄기차게, 흐드러지게도 꽃피는 빈칸
김영기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미술에서 작업의 지속성과 연속성은 외면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작업관 구축과, 관점의 신뢰도/설득력에 힘을 싣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사윤택은, 이런저런 순간을 한 화면으로 능숙히 잇고 깁고 겹쳐 왔다. 이미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일정 부분 성공적으로 세상과 공유하고 있다. 그에 머물지 않고 매번 다른 각도와 파장으로 새 생각을 토핑하며 작업은 변모를 거듭한다. 그의 작업은 자고 나면 실황이 바뀌는 전쟁터이다. 생각은 계속해서 공급된다. 생각 유통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여전히 꾸준히 부지런히 생각’해댄’다. 대상을 둘러싼 시선이나 사건, 감정, 사색, 깨달음은 반투명한 무채색을 띤 어떤 ‘기운’ 혹은 ‘힘’을 연상시키며 화면에 개입한다. 태초의 한두 가닥은 그저 간을 보며 조심스레 변두리를 맴돌지만, 이윽고 서로 맞닿고 겹치고 뒤얽히며, 편평한 표면이 점차 출렁인다. 마침내 사방을 짓쳐 가로지르며, 브릴리언트 컷으로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듯 보다 섬세히 화면을 쪼고 깎는다. 잔상이나 프리즘이 떠오르는 다양한 형태는 화면 속 상황에 개입하기도, 또 모른 척 짐짓 한 발 빼거나 아예 유리되기도 한다.
이전보다 한층 복잡다단한 화면이지만 오히려 나는 편안을 느꼈다. 그의 텁텁한 생각과 시선은 이제 화면이 대신(또한 노골적으로) 가득 짊어진 덕에, 자잘한 생각 파편을 촘촘히 훑으려 시선을 더 이상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문득 북어가 떠올랐다. 납작 두드려 패 편편한 북어. 온전히 그려 내긴 힘들지만 부분적으로 상상 가능한, 4차원 혹은 그 이상의 입체도형을 평면에 두드려 펴서 널어 둔, 딱 그것 말이다. 조각 단편의 모양, 커팅한 각 면에 일일이 집착하기보단 수십 차원 세상을 북어 삼아 두드려 편 전개도를 떠올리자, 비로소 화면 전체가 한 덩이로 이미지화했다.
‘이미지화’란 다름 아니라 저작물의 차수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무언가가 실물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화면 캡처를 생각하면 쉽다. 모니터 속 화면은 특정 코드의 실행 광경이다. 그러나 저장한 스크린샷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코드가 생성된 것이다. 추상화의 결과물로서의 텍스트가 이미지화하면 오히려 새로운 실체가 된다. 어떤 사건을 특정 색상의 점으로 표현할 때, 이 점의 집합은, 비슷한 성격의 다른 사건과 연상을 공유하여 일종의 코드로 작용할 수도, 혹은 새로운 이미지를 낳는 실체 노릇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가 추상화라면 후자는 이미지화에 해당한다. ‘차원을 뛰어넘는다’는 표현은 이러한 면에서, 미술 창작 행위에 대한 매우 적합하고 본질적인(=잣대나 규범처럼 구는) 묘사이다.
“이게 바로 물감입니다. 짜 놓은 물감 덩어리!”와 같이, 재료의 물성을 강조하는 작업이 아닌 이상, 현대 회화는 기본적으로 대상이나 생각 자체보다는 그에서 파생한 이미지를 다룬다. ‘논리적 완결’, ‘충분한 합리성 확보’, ‘이성적인 구성’ 따위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지점이 창조성을 담보한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를 위해 화면을 이미지화하려 든다.
이미지화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이미 공유된 논리의 폐기를 선언하거나, 자신만의 논리를 세워 다른 논리를 강제로 대체하거나, 익숙한 논리를 극도로 축소, 확대, 중첩, 개인화하거나, 심지어 풀이할 수 없는(혹은 풀이가 빗나가게끔 의도한) 장치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등의 방식으로 ‘흐리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조금 다르다. 물론 회화 작가인 이상, 궁극적으로 이미지화의 유혹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섣불리 뭉개려 들진 않는다. 그는 차분히 설명한다. 작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행위 중 하나, 설명 말이다. 그의 설명은 늘 변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매 설명의 순간마다 그는, 각각의 순간을 사는 서로 다른 사람이니까. 때론 조곤조곤, 종종 구구절절, 가끔 답답함에 목청을 돋우며 한없이 격렬히, 그러다 괜스레 부끄럽기도 하고 머쓱한 기분에 문득 소심하게, 지지부진한 손끝에 때론 절망적으로, 어느 날에는 해탈한 사람처럼 멀거니, 그러다가도 동료 작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늦은 밤 질투심에 불타, 또 마지막 작업이 될 것처럼 절박하게. 다른 각도, 다른 순간, 다른 시각, 다른 평면을 타고 거슬러 자꾸만 피어나는 빈칸에 진술하고 또 진술한다. 설명을 비트는 또 다른 설명의 향연. 저지르고 후회하길 반복하며 그의 화면은 이미지화한다. 천재 수학자 라마누잔이 발산하는 자연수를 쌓아 역설적으로 수렴해 내듯(라마누잔합, Ramanujan Summation), 그는 설명에 무한급수를 취하여 역으로 탈 설명화, 이미지화한다. 그만의 이러한 회화 메커니즘을 고려하면, 전시 제목 한번 그럴싸하다.
그는 회화 속에서 회화를 벗어나려 든다. 파고 깎고 겹치고 뒤집고 표면을 깨부순다. 의외로 그러기 적합한 게 또 회화이다. 회화답기 좋은 게 회화이며, 또 한계를 벗어나려 몸부림칠 때 그 몸부림이 가장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것 역시 회화이다. 작업을 두루 살피며 그는 줄곧 ‘헛헛해’했다. 무에 그리 헛헛한 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처음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 이미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그렇지 않은 것들’이겠거니 대수롭잖게 여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꾸만 새로 피어나는, 진술할 빈칸을 감지하는 사윤택 특유의 능력 탓이 아닐까 싶다.
2023.08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ugust.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