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추리
-Discovery: 12 Contemporary Artists from Korea [후기]
정재연
물론 회화라는 매체를 다루는 전시는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러니 회화 작품의 집합이 갖는 공통성과 이질성을 강조하며,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있었던 전시의 짧은 기록을 후기로 남기고자 한다. 한 번도 미술 사조에서 혼돈의 시기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 늘 전위를 부르짖고 비형상주의를 자처했다. 작가는 자기 충실을 이행하기 위해 내면에 온갖 생명력과 집중력을 기울인다. 회화는 긴 역사를 거치며 많은 풍파를 거쳤는데, 모더니즘, 미니멀리즘과 개념주의를 지나며 맞닥뜨린 위기를 극복하고 이미지의 회귀와 함께 다시 미술 형식의 중요한 표현형식으로 돌아왔다. 미술의 동 시대성은 과학기술에 의한 시각체계, 작품 제작 자체에 있어 디지털 도구의 사용은 회화 표현의 다양하게 나타난다. 작가들은 언제나 그렇듯 지속적으로 다각적인 시도를 해왔다. 물론 다양한 매체와 시도가 있어도 평면적인 공간에 구성되고 묘사되는 이미지를 만들어 벽에 얌전히 설치되는 아쉬움을 일단 뒤로하자.
아주 정직한 제목의 전시는 오랜만이다. 한국의 동시대 미술 12명의 작가를 소개하는 자리가 꽤나 명당이다. 모든 작가를 한데 모아 개괄식으로 소개하는 글은 아니다. 이미 국내외에서 미술씬에서 탄탄히 자리 잡은 문성식, 박진아, 이은우의 작품을 논하기엔 한 점의 회화로 표현하긴 어렵다. 다만 MZ 세대 젊은 작가인 김찬송, 이희준, 정현두, 현승의, 정하슬린의 각기 다른 표현방식에 주목하고 싶다. 어떤 법칙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운 창작 방식으로 새로운 매체를 실험하며 작업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이들의 자율성에 감탄한다. -요즘 작가들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다양한 형식의 공존과 각자가 추구하는 스타일에 따라 자기들 삶의 변화와 현상에 대해 면밀히 분석하고 장면을 멋스럽게 연출하며, 자신들의 내면을 부연한다. 그러니 한 사건의 순간을 재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사건을 서사하는 것이다. 물론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이미지 이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다. 그래서 작가들은 작업의 과정, 물질과 행위의 이질성 속에서 서식한다. 김찬송은 사람과 사물, 존재와 경계에 대한 깊은 고찰을 기록하는데 그의 신체 일부를 그리는 연작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선보인 <When the Air Touches the Skin>(2021), <Anonymous feet>(2022) 는 신체 일부인 손과 발을 포착한 작품을 내걸었다. 여기서 보이는 ‘손’과 ‘발’은 색감이 두르는 덩어리로 표현된 살갗인데, 붓 터치는 투박해 보이고 신체는 나약해 보인다. 특히, 힘을 제대로 떠받질 못하는 발은 그 혼란 사이를 거닐며[1] 신체 한계 정도를 가늠하는 듯하다. 물감이 얇게 발린 손의 묘사와 다르게, 발은 두껍고 투박하게 그리고 둔탁한 터치가 눈에 띈다. 몸을 짊어지는 기능을 하는 발이 어느 자극도 받지 못할 정도의 극도의 긴장감과 피로감이 느껴진다. 이는 신체 일부분의 연장으로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나의 두 발은 어디로 사라졌나. 짐작할 수 없는 침묵 속에 숨겨두었나. 짐작할 수 없는 온도 속에 묻어두었나. 위안 없는 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뎌내지[2]
김찬송, When the Air Touches the Skin, 2021 (좌) Anonymous feet, 2022 (우)/사진제공Artue
정현두, Face of the Sun and Moon, 2016 (좌) Birds, Trees and, 2017 (우)/사진제공Artue
이어지는 단순한 붓질로 매체의 ‘살’과 관념적 ‘살’을 넘나드는 작업을 하며 추상의 풍경을 제공하는 정현두 작업은 한마디로 혼돈의 풍경화다. 그의 움직임과 붓질, 미세한 색의 변화, 개인적인 표현 방식이 담겨있는 풍경화는 그가 얼마나 자연에 대한 감정이입과 상상력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는지 알 수 있다. 거칠고 즉각적이면서 순간 여러 색을 반복적으로 입혀 나간다. 추상적 풍경화를 이뤄내면서 작업 과정, 물질과의 행위 속에서 몸의 체험은 꽤나 긴 여행을 하고 온 듯하다. 몰입된 추상적 풍경화는 보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몰입의 틈을 주고 있지 않은 느낌이 든다. 반복되는 추상 작업 과정에서 자기 기술과 시각언어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조형적 규칙을 계속해서 탐험하고 있는 느낌이다. 근데 그 과정마저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법칙과 완전한 공식이 된 것 같다. 답은 우리들의 몫인 것. “그다음은 친구여, 그대 하기에 달렸다.”[3]
오늘날의 회화는 단순히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닌 이미지의 편집 과정을 거쳐 작가들이 짠 구성을 통해 실현되는 일종의 기술적 과정을 동반한다. 어디서나 편하게 찍을 수 있는 카메라는 인간의 눈으로 보고 있는 모든 것을 기계의 눈으로 보는 방식을 공유한다.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버린 지금의 사진을 미술작품의 재료로써 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에 있어서 도구로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저장한 정보나 이미지를 불러 확대/축소하고 필요한 부분을 편집하고 변형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요즘. 렌즈를 통해 본 대상과 그 대상이 포함된 공간을 선택할 때 틀은 세상과 경계하는 새로운 공간이 된다. 이희준은 삶의 풍경에서 얻은 이미지를 추상 회화로 옮겨 담는다. 거기에 여행하며 얻은 축적된 경험과 일상 이미지를 수집, 편집된 일상을 점, 선, 면 등의 건축적 요소와 기하학적 형태를 더해 이미지가 재생성 된 것 같다. 길거리에서 얻은 직선과 아치, 건축물에서 보이는 비례와 균형을 자신만의 시각 언어로 풀어낸다. 이미지를 구성할 때 조형적이며, 기하학적 능력을 요하는데 이 능력에선 아주 탁월한 기술을 가진 듯하다. 선택된 이미지 화면 속에서 그의 의도를 가진 공간 배치로 인해 이미지에 집중할 기회를 선사했다. 캔버스 위 화면 속 적당한 건축적 비율로 사진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드러냈고, 회화의 물질성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관람자는 대상과 함께 배경의 공간까지 포함하여 사각형 화면 하나의 장면으로 인식할 수 있게 했다. 평면회화에서는 구상적 형태들이 사각의 캔버스 화면 안으로 들어와 이미지화되면서 다양한 경험을 유도한다. 정형화되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어 보이는 안정감은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태블릿이나 휴대폰에 몰입한 시선을 반영하는 듯 보인다. 작가는 틀을 설정함으로써 이미지의 의미들을 자신의 특별한 의미 부여로 새롭게 배치한다. 이미지의 의미와 더불어 물질이 더해졌을 때, ‘회화적 장면’을 통해 순간의 과정을 생성하기도 한다. 정하슬린은 레이어에 기반한 작업에 중점을 둔다. 레이어는 물감 덩어리 사이 공간에서 시간을 품는 것이다.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결과를 어느 정도 유추하고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정을 살필수록 결과물에 신뢰를 둔다. 과정의 투명성 덕분이랄까? 다만, 작품 앞에서 단시간에 과정을 흡수하긴 힘들다. 오래 사유하고, 재료의 근간을 살피고, 그에 따른 결과물을 느끼는 경험이 중요하다. 그러니 그가 작업 과정에서 어떤 재료의 단서를 두거나, 물감의 층위를 얼마나 두었는지, 이미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가만히 두고 살펴야 할 것이다.[4] 알고 보면 더 재미있고, 모르고 보면 무엇을 말하는지 회화 작업의 심층적 탐문이 필요 하다. 앞으로 기대가 되는 동시에 한편으론 얼마나 긴 시간을 재료의 물질성과 함께 캔버스 안에 품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희준, Beyond the Horizon of a Black Hole, 2023 (좌) Utopia, 2023 (우)/사진제공Artue
정하슬린, 18!practice, 2018/사진제공Artue
현승의, The Smile Spot, 2023/사진제공Artue
유일하게 동양화 작업을 선보인 현승의는 이번 전시에 함께 참여한 이희준과 함께 2022년 제20회 금호영아티스트 선정 작가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자연과 공간을 탐구하며,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제주도의 자본화 된 도시의 어두운 측면들을 다루고 있다. 제주도가 관광지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이 희생되는지 집중하는 ‘평범한 ■씨’의 제주 휴가로 제주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씨’는 가상 인물로 우리 모두가 해당하는 인물이다. 필자에게도 파라다이스와 같은 제주도는 푸른 초원의 파란 사막(오름)의 조각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인스타그램으로 #제주맛집 #제주카페 #제주명소 #제주핫플 #제주오름을 찾아본 적 있는가? 당신도 노란 유채꽃밭 사이 사진 스폿(spot)에서 사진을 찍었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제주도 생태계 파괴의 공범이 되었다. 우리가 밟은 땅이 길이 만들어지고 그 길 위를 걸어 다니는 무수한 사람들. 관광지 개발과 생태계 파괴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녀의 검은 먹색은 광선이 사라지고 무채색의 어두운 이면을 나타내는 것 같다. -물론 그가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주제와 색이 맞아떨어진다- 라틴어로 검은색은 Ater 및 Darken, Atere 로 ‘잔인함’과 ‘끔찍함’을 말한다. 아마 제주도라는 이상화된 파라다이스를 넘어 자연을 해치는 개발과 넘쳐나는 생활 폐기물의 끔찍함을 단면으로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이문정 미술평론가와의 인터뷰[5]에서 그는 “나는 내가 솜씨가 아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정직하게 그리는 게 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자연히 작업 방식이나 분위기에 그 태도가 드러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작가의 설명 없이도 어느 정도 그 느낌이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작업한다.” 익숙한 기법의 사용이나 필요한 기술의 습득은 필수적이지만, 작품의 완성은 결국 개인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이미지, 매체, 공간 결정이다. 그의 의도와 생각이 내면에 축척된 것들과 함께 시각화되고 표현된다. 그러하니 작업 전 그가 의도한 바를 명확히 인지할 때 비로소 작품이 완결되는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동양화의 한계를 설정하지 말자. 구분 짓지도 그 한계를 벗어나려고도 하지 말자. 회화의 위기가 있긴 했던가? 있었다면 그 위기는 유예하며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기억하자.
*이 전시는 '글로벌 온라인 미술 거래 플랫폼' 아투 “Artue”를 운영하는 아비투스 어소시에이트(Habitus Associates)가 뉴욕 록펠러 센터에서 8월 27일까지 "Discovery: 12 Contemporary Artists From Korea"라는 주제의 한국작가 12명이 참여한 기획전이다. “Artue”는 예술 감상에서 작품 소장으로 이어지는 전통 방식에 디지털 트윈,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하여 '예술 산업의 디지털 전환'을 모색하는 아트 플랫폼이다. (artue.io)
참여작가: 김찬송, 나윤희, 문성식, 박찬욱, 박진아, 이희준, 이은우, 정하슬린, 정현두, 조석, 조현아, 현승의 (가나다순)
[1] 현재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진행되고 있는 김찬송 개인전 < MIMESIS SE 17 Border of Skin>기획한 정희라 선임큐레이터의 글 중 한 문장을 가지고 왔다. 이 전시는 8월 13일 부터 9월 24일 까지 진행된다.
[2] 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 중 <발 없는 새>, 창비, 2010
[3] 올리비아 랭, 『이상한 날씨』, 어크로스, 2021, p15 에서 한 문장을 가지고 왔다. 예술작품의 이해는 늘 관람자의 몫이고, 우린 예술가가 만든 단편적 의미들 중 몇 가지를 이해하고 거른다. 결국 수 많은 의미를 곱씹고 뒤틀고를 거쳐 우리의 것으로 흡수한다. 우리가 그들의 세계에 침입자인 동시에 공유자이기에 기꺼이 향유 후 책임은 공동의 몫이다.
[4] 정하슬린의 글을 두루두루 찾다 발견한 최정윤 독립큐레이터의 <과정안에 머무르기: 정하슬린의 작품에 관하여>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한다. 기록저장소 https://redquinoa8.tistory.com/377
[5] 이문정, “[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101) 현승의 작가] ‘멋진 제주’의 저 뒤쪽에 자리잡은 희끄무레한 것들까지”, CNB JOURNAL, 2023. 6. 30일 기사, https://m.weekly.cnbnews.com/m/m_article.html?no=151682
2023.0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회화의 추리
-Discovery: 12 Contemporary Artists from Korea [후기]
정재연
물론 회화라는 매체를 다루는 전시는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러니 회화 작품의 집합이 갖는 공통성과 이질성을 강조하며,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있었던 전시의 짧은 기록을 후기로 남기고자 한다. 한 번도 미술 사조에서 혼돈의 시기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 늘 전위를 부르짖고 비형상주의를 자처했다. 작가는 자기 충실을 이행하기 위해 내면에 온갖 생명력과 집중력을 기울인다. 회화는 긴 역사를 거치며 많은 풍파를 거쳤는데, 모더니즘, 미니멀리즘과 개념주의를 지나며 맞닥뜨린 위기를 극복하고 이미지의 회귀와 함께 다시 미술 형식의 중요한 표현형식으로 돌아왔다. 미술의 동 시대성은 과학기술에 의한 시각체계, 작품 제작 자체에 있어 디지털 도구의 사용은 회화 표현의 다양하게 나타난다. 작가들은 언제나 그렇듯 지속적으로 다각적인 시도를 해왔다. 물론 다양한 매체와 시도가 있어도 평면적인 공간에 구성되고 묘사되는 이미지를 만들어 벽에 얌전히 설치되는 아쉬움을 일단 뒤로하자.
아주 정직한 제목의 전시는 오랜만이다. 한국의 동시대 미술 12명의 작가를 소개하는 자리가 꽤나 명당이다. 모든 작가를 한데 모아 개괄식으로 소개하는 글은 아니다. 이미 국내외에서 미술씬에서 탄탄히 자리 잡은 문성식, 박진아, 이은우의 작품을 논하기엔 한 점의 회화로 표현하긴 어렵다. 다만 MZ 세대 젊은 작가인 김찬송, 이희준, 정현두, 현승의, 정하슬린의 각기 다른 표현방식에 주목하고 싶다. 어떤 법칙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운 창작 방식으로 새로운 매체를 실험하며 작업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이들의 자율성에 감탄한다. -요즘 작가들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다양한 형식의 공존과 각자가 추구하는 스타일에 따라 자기들 삶의 변화와 현상에 대해 면밀히 분석하고 장면을 멋스럽게 연출하며, 자신들의 내면을 부연한다. 그러니 한 사건의 순간을 재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사건을 서사하는 것이다. 물론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이미지 이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다. 그래서 작가들은 작업의 과정, 물질과 행위의 이질성 속에서 서식한다. 김찬송은 사람과 사물, 존재와 경계에 대한 깊은 고찰을 기록하는데 그의 신체 일부를 그리는 연작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선보인 <When the Air Touches the Skin>(2021), <Anonymous feet>(2022) 는 신체 일부인 손과 발을 포착한 작품을 내걸었다. 여기서 보이는 ‘손’과 ‘발’은 색감이 두르는 덩어리로 표현된 살갗인데, 붓 터치는 투박해 보이고 신체는 나약해 보인다. 특히, 힘을 제대로 떠받질 못하는 발은 그 혼란 사이를 거닐며[1] 신체 한계 정도를 가늠하는 듯하다. 물감이 얇게 발린 손의 묘사와 다르게, 발은 두껍고 투박하게 그리고 둔탁한 터치가 눈에 띈다. 몸을 짊어지는 기능을 하는 발이 어느 자극도 받지 못할 정도의 극도의 긴장감과 피로감이 느껴진다. 이는 신체 일부분의 연장으로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나의 두 발은 어디로 사라졌나. 짐작할 수 없는 침묵 속에 숨겨두었나. 짐작할 수 없는 온도 속에 묻어두었나. 위안 없는 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뎌내지[2]
김찬송, When the Air Touches the Skin, 2021 (좌) Anonymous feet, 2022 (우)/사진제공Artue
정현두, Face of the Sun and Moon, 2016 (좌) Birds, Trees and, 2017 (우)/사진제공Artue
이어지는 단순한 붓질로 매체의 ‘살’과 관념적 ‘살’을 넘나드는 작업을 하며 추상의 풍경을 제공하는 정현두 작업은 한마디로 혼돈의 풍경화다. 그의 움직임과 붓질, 미세한 색의 변화, 개인적인 표현 방식이 담겨있는 풍경화는 그가 얼마나 자연에 대한 감정이입과 상상력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는지 알 수 있다. 거칠고 즉각적이면서 순간 여러 색을 반복적으로 입혀 나간다. 추상적 풍경화를 이뤄내면서 작업 과정, 물질과의 행위 속에서 몸의 체험은 꽤나 긴 여행을 하고 온 듯하다. 몰입된 추상적 풍경화는 보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몰입의 틈을 주고 있지 않은 느낌이 든다. 반복되는 추상 작업 과정에서 자기 기술과 시각언어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조형적 규칙을 계속해서 탐험하고 있는 느낌이다. 근데 그 과정마저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법칙과 완전한 공식이 된 것 같다. 답은 우리들의 몫인 것. “그다음은 친구여, 그대 하기에 달렸다.”[3]
오늘날의 회화는 단순히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닌 이미지의 편집 과정을 거쳐 작가들이 짠 구성을 통해 실현되는 일종의 기술적 과정을 동반한다. 어디서나 편하게 찍을 수 있는 카메라는 인간의 눈으로 보고 있는 모든 것을 기계의 눈으로 보는 방식을 공유한다.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버린 지금의 사진을 미술작품의 재료로써 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에 있어서 도구로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저장한 정보나 이미지를 불러 확대/축소하고 필요한 부분을 편집하고 변형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요즘. 렌즈를 통해 본 대상과 그 대상이 포함된 공간을 선택할 때 틀은 세상과 경계하는 새로운 공간이 된다. 이희준은 삶의 풍경에서 얻은 이미지를 추상 회화로 옮겨 담는다. 거기에 여행하며 얻은 축적된 경험과 일상 이미지를 수집, 편집된 일상을 점, 선, 면 등의 건축적 요소와 기하학적 형태를 더해 이미지가 재생성 된 것 같다. 길거리에서 얻은 직선과 아치, 건축물에서 보이는 비례와 균형을 자신만의 시각 언어로 풀어낸다. 이미지를 구성할 때 조형적이며, 기하학적 능력을 요하는데 이 능력에선 아주 탁월한 기술을 가진 듯하다. 선택된 이미지 화면 속에서 그의 의도를 가진 공간 배치로 인해 이미지에 집중할 기회를 선사했다. 캔버스 위 화면 속 적당한 건축적 비율로 사진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드러냈고, 회화의 물질성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관람자는 대상과 함께 배경의 공간까지 포함하여 사각형 화면 하나의 장면으로 인식할 수 있게 했다. 평면회화에서는 구상적 형태들이 사각의 캔버스 화면 안으로 들어와 이미지화되면서 다양한 경험을 유도한다. 정형화되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어 보이는 안정감은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태블릿이나 휴대폰에 몰입한 시선을 반영하는 듯 보인다. 작가는 틀을 설정함으로써 이미지의 의미들을 자신의 특별한 의미 부여로 새롭게 배치한다. 이미지의 의미와 더불어 물질이 더해졌을 때, ‘회화적 장면’을 통해 순간의 과정을 생성하기도 한다. 정하슬린은 레이어에 기반한 작업에 중점을 둔다. 레이어는 물감 덩어리 사이 공간에서 시간을 품는 것이다.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결과를 어느 정도 유추하고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정을 살필수록 결과물에 신뢰를 둔다. 과정의 투명성 덕분이랄까? 다만, 작품 앞에서 단시간에 과정을 흡수하긴 힘들다. 오래 사유하고, 재료의 근간을 살피고, 그에 따른 결과물을 느끼는 경험이 중요하다. 그러니 그가 작업 과정에서 어떤 재료의 단서를 두거나, 물감의 층위를 얼마나 두었는지, 이미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가만히 두고 살펴야 할 것이다.[4] 알고 보면 더 재미있고, 모르고 보면 무엇을 말하는지 회화 작업의 심층적 탐문이 필요 하다. 앞으로 기대가 되는 동시에 한편으론 얼마나 긴 시간을 재료의 물질성과 함께 캔버스 안에 품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희준, Beyond the Horizon of a Black Hole, 2023 (좌) Utopia, 2023 (우)/사진제공Artue
정하슬린, 18!practice, 2018/사진제공Artue
현승의, The Smile Spot, 2023/사진제공Artue
유일하게 동양화 작업을 선보인 현승의는 이번 전시에 함께 참여한 이희준과 함께 2022년 제20회 금호영아티스트 선정 작가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자연과 공간을 탐구하며,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제주도의 자본화 된 도시의 어두운 측면들을 다루고 있다. 제주도가 관광지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이 희생되는지 집중하는 ‘평범한 ■씨’의 제주 휴가로 제주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씨’는 가상 인물로 우리 모두가 해당하는 인물이다. 필자에게도 파라다이스와 같은 제주도는 푸른 초원의 파란 사막(오름)의 조각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인스타그램으로 #제주맛집 #제주카페 #제주명소 #제주핫플 #제주오름을 찾아본 적 있는가? 당신도 노란 유채꽃밭 사이 사진 스폿(spot)에서 사진을 찍었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제주도 생태계 파괴의 공범이 되었다. 우리가 밟은 땅이 길이 만들어지고 그 길 위를 걸어 다니는 무수한 사람들. 관광지 개발과 생태계 파괴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녀의 검은 먹색은 광선이 사라지고 무채색의 어두운 이면을 나타내는 것 같다. -물론 그가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주제와 색이 맞아떨어진다- 라틴어로 검은색은 Ater 및 Darken, Atere 로 ‘잔인함’과 ‘끔찍함’을 말한다. 아마 제주도라는 이상화된 파라다이스를 넘어 자연을 해치는 개발과 넘쳐나는 생활 폐기물의 끔찍함을 단면으로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이문정 미술평론가와의 인터뷰[5]에서 그는 “나는 내가 솜씨가 아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정직하게 그리는 게 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자연히 작업 방식이나 분위기에 그 태도가 드러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작가의 설명 없이도 어느 정도 그 느낌이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작업한다.” 익숙한 기법의 사용이나 필요한 기술의 습득은 필수적이지만, 작품의 완성은 결국 개인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이미지, 매체, 공간 결정이다. 그의 의도와 생각이 내면에 축척된 것들과 함께 시각화되고 표현된다. 그러하니 작업 전 그가 의도한 바를 명확히 인지할 때 비로소 작품이 완결되는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동양화의 한계를 설정하지 말자. 구분 짓지도 그 한계를 벗어나려고도 하지 말자. 회화의 위기가 있긴 했던가? 있었다면 그 위기는 유예하며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기억하자.
*이 전시는 '글로벌 온라인 미술 거래 플랫폼' 아투 “Artue”를 운영하는 아비투스 어소시에이트(Habitus Associates)가 뉴욕 록펠러 센터에서 8월 27일까지 "Discovery: 12 Contemporary Artists From Korea"라는 주제의 한국작가 12명이 참여한 기획전이다. “Artue”는 예술 감상에서 작품 소장으로 이어지는 전통 방식에 디지털 트윈,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하여 '예술 산업의 디지털 전환'을 모색하는 아트 플랫폼이다. (artue.io)
참여작가: 김찬송, 나윤희, 문성식, 박찬욱, 박진아, 이희준, 이은우, 정하슬린, 정현두, 조석, 조현아, 현승의 (가나다순)
[1] 현재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진행되고 있는 김찬송 개인전 < MIMESIS SE 17 Border of Skin>기획한 정희라 선임큐레이터의 글 중 한 문장을 가지고 왔다. 이 전시는 8월 13일 부터 9월 24일 까지 진행된다.
[2] 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 중 <발 없는 새>, 창비, 2010
[3] 올리비아 랭, 『이상한 날씨』, 어크로스, 2021, p15 에서 한 문장을 가지고 왔다. 예술작품의 이해는 늘 관람자의 몫이고, 우린 예술가가 만든 단편적 의미들 중 몇 가지를 이해하고 거른다. 결국 수 많은 의미를 곱씹고 뒤틀고를 거쳐 우리의 것으로 흡수한다. 우리가 그들의 세계에 침입자인 동시에 공유자이기에 기꺼이 향유 후 책임은 공동의 몫이다.
[4] 정하슬린의 글을 두루두루 찾다 발견한 최정윤 독립큐레이터의 <과정안에 머무르기: 정하슬린의 작품에 관하여>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한다. 기록저장소 https://redquinoa8.tistory.com/377
[5] 이문정, “[이문정 평론가의 더 갤러리 (101) 현승의 작가] ‘멋진 제주’의 저 뒤쪽에 자리잡은 희끄무레한 것들까지”, CNB JOURNAL, 2023. 6. 30일 기사, https://m.weekly.cnbnews.com/m/m_article.html?no=151682
2023.0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