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경계
:이성경과 김찬송의 작업 속 경계들
정희라,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선임큐레이터
회화에는 유난히 경계에 대한 언급이 많다. 아마도 선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선을 사용하고 이용하는 회화 작가들은 긋고 그리는 선 안에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찾는다. 그중에서도 이성경과 김찬송은 선으로 경계에 대해 말한다. 정확히는 이들은 경계를 언급함으로써 경계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선은 어떠한 경계를 규정하지 않는다. 이미지에서 작가의 생각이 비로소 뚜렷해지는 것을 목도한다.
부푼 선과 경계[1]
이성경의 부푼 선에는 경계가 없다. 부푼 선은 작가의 기억과 우리 기억의 파편 조각들의 틈일 것이고, 그 틈에서 불러일으켜 지는 감정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감정적인 간극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발화하는 불꽃)일 것이다. 현장도 아닌, 실제 공간도 아닌 이성경의 풍경화는 타자가 바라보는 자아와도 같다. 갑작스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선에 스며든 풍경은 그의 반복 행위를 통한 작업과정이 더해져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이며,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그 다른 세계에 묶인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또 다른 세계는 뭐라 단정 짓기 어려운 어떤 먹먹함을 담아내어 빛의 이면과 같은 ‘그림자’에 천착하고 파고든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작품에 대해 ‘그림자 기억’이라는 표현을 해본다. 이성경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림자 기억’은 그의 흐릿해진 기억과 실제 일어났던 일의 틈새, 이쪽과 저쪽의 경계 그리고 작업과정의 행위에 대한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볼 때 그림자에만 중점을 둔다면, 이성경의 작품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기에, 보는 이와 작가의 기억 속을 파고드는 어떤 감정이 완벽하게 함께 해야 한다. 이성경은 자신이 가지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어두운’ 혹은 ‘부정적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의 그림 앞에서 그러한 감정들을 구체적인 사건과 연결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힘을 희미하게 잃어버린다.
이성경, 또 다른 그림자 1-3_장지에 채색, 목탄_ 190x420cm_ 2019
이미지 작가 제공
이성경, 또 다른 그림자 1-1_장지에 채색, 목탄_ 190x140cm_ 2019
이미지 작가 제공
이러하니 이성경의 작품은 선과 선에 경계가 없다. 경계 그 사이의 아주 작은 틈에는 이성경의 ‘그림자 기억’이 담겨 있다. 이성경의 풍경화에는 그림자에 대한 해석이 뒤따른다. 그림자를 드러나게 하는 빛에 반사된 창, 어둠에 의한 주변 일상의 흔적. 그리고 우리가 겪어온 어두운 경험과 그것에 기대어 보게 되는 풍경. 그리고 그 기억에 동반되어 따라오는 우리의 시선. 이성경은 이것을 그림자 풍경이라 칭한다. 이성경은 나무로 만들어진 한지에 나무를 태워 만들어진 목탄으로 작업한다. 그는 목탄으로 그리고, 문지르고, 지우고, 다시 그린다. 시간에 의해 날아가 버린 목탄의 흔적들도 남겨둔다. 목탄이 날리면서 그의 한지에 내려앉는다. 이성경은 작업 중간중간 정착 과정을 반복해서 선을 쌓아 올린다. 그리하면 목탄의 선은 한지의 특성에 의해 부풀고, 선의 명확한 경계는 사라진다. 목탁의 촉각적인 느낌을 즐기듯 작업하는 그는 그를 담담히 받아내는 한지와 건식재료인 목탄으로 그의 정서적인 부분을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은 완전한 한계에 다다르고자 하는 육체적인 행위에서 비롯되는데, 기억된 감정을 반복 경험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 구체적인 사건이나 명확하게 떠오르는 풍경을 그린다기보다는 그것들이 남긴 흔적들이 작업으로 이어진다.
안과 밖. 이성경의 작품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가에 대하여 한참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림자’는 어디에 존재하는지 찾아 헤매게 한다. 익숙한 주변 풍경을 낯설게 그리는 그의 그림에서 ‘그림자’는 왜 중요한 ‘화두’인지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 점은 안과 밖의 경계에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다. 창 혹은 창문은 그림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창의 안이 어둠일까, 창의 바깥이 어둠일까? 이것에 대한 의문은 이성경의 초기 작품을 보고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작업 초기에 식물에서 모티브를 딴 목탄 작업을 하였다. 선을 위주로 그리는 행위의 흔적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신을 분출하듯이 그려진 비정형화 된 선들은 감정적이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 집과 작업실 주변을 주로 산책하다가 그의 시선에 포착되는 풍경으로 작업이 나아가면서, 그의 내면에서 그의 주변 바깥으로 작업 내용의 방향이 변하게 된다. 안과 밖은 어둠과 빛이자, 그의 내면이고 그가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다. 그리고 그 경계에 그의 그림이 서 있다. 일상에서 멀지 않은 풍경을 그리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작품이 그에게 일정 부분 실제로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닿는 부분이 있어야 함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유하는 경계[2]
김찬송은 살갗 위의 풍경을 회화로 표현함으로써 떠도는 표면에 대해 말한다. 피부 위를 맴도는 시선들은 표면 위에 머무르기도 하고, 그 안으로 통과되기도 한다. 투과되는 외부의 자극은 경계가 되는 살갗 - 캔버스 표면에 영향을 미치고, 표면을 맴도는 작가의 시선은 겉에서 안으로 스미는 회화의 물성으로 나타난다. 미끄러지며 혼합되는 물감들의 형상은 분리되는 상황과 결합하는 자극들을 표현하며 얄팍해지는 경계에 대해 말한다. 뮤지엄 공간과 어우러지며 부유하는 김찬송의 신체와 풍경 조각들은 부서지며 섞이는 표면의 경계를 마주하게 한다.
김찬송, Wind and Skin_91x91cm_oil on canvas_2022
이미지 작가 제공
김찬송은 경계를 언급함으로써 경계를 매듭짓지 않으려 한다. 그의 작품은 마치 시와 같아서 무엇을 규정짓지 않는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섞여가는 물감 속 그의 흔적은 구분하기 어려운 안과 밖 사이에 놓인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김찬송은 자신이 경험한 프랑스 정원과 모로코의 자연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이 사실은 다른 곳에서 온 존재임을 깨닫고, 개입을 통해 새로운 것이 도착하여 기존의 것을 흐리며 다시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 간다고 느낀다. 이 낯선 개입은 대체로 살아 움직이는 것들로, 무엇과 무엇을 이으며 그 사이에 혼란을 낳고,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한다. 작업 속에 종종 등장하는 소재인 발은 그 혼란 사이를 거닐며 정도를 가늠하는 듯하다. 눈과 손, 발, 그리고 신체를 실물보다 확대한 그림들은 몸에서 떼어낼 수 없는 마음-감정을 내세운다. 신체 풍경처럼 보이는 이 작업들은 어떠한 개입을 통해 변화가 안착되어 가는 과정들을 담아내며, 과정의 통로가 되는 우리의 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신체와 동일시되는 자연 속 소재가 등장하는 그림들도 마찬가지이다.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자극과 반응, 낯선 것이 다가왔을 때 느끼는 감각과 감정 이 모든 것이 우리 몸을 통과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결국 김찬송의 부유하는 표면들은 통로가 되는 우리 한 명 한 명이 경계로서 존재함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존재를 흐트러진 붓질로 만들어진 흐려진 형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견고하고 단단하게 자리매김한 물감의 층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찬송, The Object_oil on canvas_130.3x193.9cm_2023
이미지 작가 제공
Boder of Skin 전시 전경
이미지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제공
[1] 정희라,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14기 입주작가 결과보고 평론 내용 중에서
[2] 정희라, Boder of Skin 김찬송 개인전 기획글 중에서
2023.0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선〓경계
:이성경과 김찬송의 작업 속 경계들
정희라,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선임큐레이터
회화에는 유난히 경계에 대한 언급이 많다. 아마도 선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선을 사용하고 이용하는 회화 작가들은 긋고 그리는 선 안에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찾는다. 그중에서도 이성경과 김찬송은 선으로 경계에 대해 말한다. 정확히는 이들은 경계를 언급함으로써 경계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선은 어떠한 경계를 규정하지 않는다. 이미지에서 작가의 생각이 비로소 뚜렷해지는 것을 목도한다.
부푼 선과 경계[1]
이성경의 부푼 선에는 경계가 없다. 부푼 선은 작가의 기억과 우리 기억의 파편 조각들의 틈일 것이고, 그 틈에서 불러일으켜 지는 감정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감정적인 간극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발화하는 불꽃)일 것이다. 현장도 아닌, 실제 공간도 아닌 이성경의 풍경화는 타자가 바라보는 자아와도 같다. 갑작스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선에 스며든 풍경은 그의 반복 행위를 통한 작업과정이 더해져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이며,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그 다른 세계에 묶인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또 다른 세계는 뭐라 단정 짓기 어려운 어떤 먹먹함을 담아내어 빛의 이면과 같은 ‘그림자’에 천착하고 파고든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작품에 대해 ‘그림자 기억’이라는 표현을 해본다. 이성경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림자 기억’은 그의 흐릿해진 기억과 실제 일어났던 일의 틈새, 이쪽과 저쪽의 경계 그리고 작업과정의 행위에 대한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볼 때 그림자에만 중점을 둔다면, 이성경의 작품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기에, 보는 이와 작가의 기억 속을 파고드는 어떤 감정이 완벽하게 함께 해야 한다. 이성경은 자신이 가지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어두운’ 혹은 ‘부정적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의 그림 앞에서 그러한 감정들을 구체적인 사건과 연결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힘을 희미하게 잃어버린다.
이성경, 또 다른 그림자 1-3_장지에 채색, 목탄_ 190x420cm_ 2019
이미지 작가 제공
이성경, 또 다른 그림자 1-1_장지에 채색, 목탄_ 190x140cm_ 2019
이미지 작가 제공
이러하니 이성경의 작품은 선과 선에 경계가 없다. 경계 그 사이의 아주 작은 틈에는 이성경의 ‘그림자 기억’이 담겨 있다. 이성경의 풍경화에는 그림자에 대한 해석이 뒤따른다. 그림자를 드러나게 하는 빛에 반사된 창, 어둠에 의한 주변 일상의 흔적. 그리고 우리가 겪어온 어두운 경험과 그것에 기대어 보게 되는 풍경. 그리고 그 기억에 동반되어 따라오는 우리의 시선. 이성경은 이것을 그림자 풍경이라 칭한다. 이성경은 나무로 만들어진 한지에 나무를 태워 만들어진 목탄으로 작업한다. 그는 목탄으로 그리고, 문지르고, 지우고, 다시 그린다. 시간에 의해 날아가 버린 목탄의 흔적들도 남겨둔다. 목탄이 날리면서 그의 한지에 내려앉는다. 이성경은 작업 중간중간 정착 과정을 반복해서 선을 쌓아 올린다. 그리하면 목탄의 선은 한지의 특성에 의해 부풀고, 선의 명확한 경계는 사라진다. 목탁의 촉각적인 느낌을 즐기듯 작업하는 그는 그를 담담히 받아내는 한지와 건식재료인 목탄으로 그의 정서적인 부분을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은 완전한 한계에 다다르고자 하는 육체적인 행위에서 비롯되는데, 기억된 감정을 반복 경험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 구체적인 사건이나 명확하게 떠오르는 풍경을 그린다기보다는 그것들이 남긴 흔적들이 작업으로 이어진다.
안과 밖. 이성경의 작품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가에 대하여 한참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림자’는 어디에 존재하는지 찾아 헤매게 한다. 익숙한 주변 풍경을 낯설게 그리는 그의 그림에서 ‘그림자’는 왜 중요한 ‘화두’인지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 점은 안과 밖의 경계에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다. 창 혹은 창문은 그림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창의 안이 어둠일까, 창의 바깥이 어둠일까? 이것에 대한 의문은 이성경의 초기 작품을 보고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작업 초기에 식물에서 모티브를 딴 목탄 작업을 하였다. 선을 위주로 그리는 행위의 흔적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신을 분출하듯이 그려진 비정형화 된 선들은 감정적이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 집과 작업실 주변을 주로 산책하다가 그의 시선에 포착되는 풍경으로 작업이 나아가면서, 그의 내면에서 그의 주변 바깥으로 작업 내용의 방향이 변하게 된다. 안과 밖은 어둠과 빛이자, 그의 내면이고 그가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다. 그리고 그 경계에 그의 그림이 서 있다. 일상에서 멀지 않은 풍경을 그리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작품이 그에게 일정 부분 실제로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닿는 부분이 있어야 함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유하는 경계[2]
김찬송은 살갗 위의 풍경을 회화로 표현함으로써 떠도는 표면에 대해 말한다. 피부 위를 맴도는 시선들은 표면 위에 머무르기도 하고, 그 안으로 통과되기도 한다. 투과되는 외부의 자극은 경계가 되는 살갗 - 캔버스 표면에 영향을 미치고, 표면을 맴도는 작가의 시선은 겉에서 안으로 스미는 회화의 물성으로 나타난다. 미끄러지며 혼합되는 물감들의 형상은 분리되는 상황과 결합하는 자극들을 표현하며 얄팍해지는 경계에 대해 말한다. 뮤지엄 공간과 어우러지며 부유하는 김찬송의 신체와 풍경 조각들은 부서지며 섞이는 표면의 경계를 마주하게 한다.
김찬송, Wind and Skin_91x91cm_oil on canvas_2022
이미지 작가 제공
김찬송은 경계를 언급함으로써 경계를 매듭짓지 않으려 한다. 그의 작품은 마치 시와 같아서 무엇을 규정짓지 않는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섞여가는 물감 속 그의 흔적은 구분하기 어려운 안과 밖 사이에 놓인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김찬송은 자신이 경험한 프랑스 정원과 모로코의 자연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이 사실은 다른 곳에서 온 존재임을 깨닫고, 개입을 통해 새로운 것이 도착하여 기존의 것을 흐리며 다시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 간다고 느낀다. 이 낯선 개입은 대체로 살아 움직이는 것들로, 무엇과 무엇을 이으며 그 사이에 혼란을 낳고,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한다. 작업 속에 종종 등장하는 소재인 발은 그 혼란 사이를 거닐며 정도를 가늠하는 듯하다. 눈과 손, 발, 그리고 신체를 실물보다 확대한 그림들은 몸에서 떼어낼 수 없는 마음-감정을 내세운다. 신체 풍경처럼 보이는 이 작업들은 어떠한 개입을 통해 변화가 안착되어 가는 과정들을 담아내며, 과정의 통로가 되는 우리의 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신체와 동일시되는 자연 속 소재가 등장하는 그림들도 마찬가지이다.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자극과 반응, 낯선 것이 다가왔을 때 느끼는 감각과 감정 이 모든 것이 우리 몸을 통과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결국 김찬송의 부유하는 표면들은 통로가 되는 우리 한 명 한 명이 경계로서 존재함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존재를 흐트러진 붓질로 만들어진 흐려진 형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견고하고 단단하게 자리매김한 물감의 층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찬송, The Object_oil on canvas_130.3x193.9cm_2023
이미지 작가 제공
Boder of Skin 전시 전경
이미지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제공
[1] 정희라,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14기 입주작가 결과보고 평론 내용 중에서
[2] 정희라, Boder of Skin 김찬송 개인전 기획글 중에서
2023.0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