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윤성필 개인전 《뵈는 게 없다》 전시 서문
눈에 뵈는 게 없지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그냥 허-연 사진이 덜렁 걸렸다
한참을 훑어도 도무지 ‘뵈는 게 없다’
‘혹시 아직 설치 중?’ ‘잘못 들어왔나?’ 전시 기간을 슬쩍 곁눈질하며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각오로 다시금 눈에 힘을 준다. 잠깐의 적막을 비집고, 핏발 선 눈동자에 희미한 건더기가 얼핏 집힌다. 확신 없는 느낌. 불안감. 조심스럽다. 이럴 때 작아진다. 감상은 당당해야 한다던데.
잠깐, 잘하면 뭔가 보일 것도 같다. 사람 얼굴? 도통 감을 못 잡고 갸웃거리는 뒤태가 안쓰러운지 지킴이 한 분이 참지 못하고 귀띔한다. ‘…부처? 그러네!?’ “그럼 이건 여왕?” 옳단다. 자신감이 솟는다. 갓 눈뜬 심봉사처럼 으쓱대며 다음 사진도 뚫어져라 노려본다. 응, 누군지 모르겠다. ’얼굴’은 맞는데. “작가님이세요.” ‘누가 알려달랬나 참내’ 어차피 못 맞췄겠지만, 괜히 눈 흘기며 마지막 액자를 마주한다. ‘보인다고 나도 이제’
눈 비비고 각 잡아도, 10초가 흐르고 20초가 지나도 초점이 없다. 그런 날 훔쳐보는 지킴이. 마스크 너머로 ‘웃참’하는 착각이 든다. 뭐 그럴 만은 했다. 빈 액자였으니까.
신상 맥가이버 칼이 고색창연한 엑스칼리버를 압도한다. 사진을 전공하고 대포를 이고 지며 비바람을 헤치지 않아도 ‘폰카’ 하나면 그럴듯한 이미지를 뽑을 수 있다. 견문발검이든 견문발포든 매한가지로 모기는 피떡이다. 핸드폰조차 내장 카메라 렌즈와 이미지센서의 성능이 일상적인 요구를 이미 한참 넘었다. 파는 이와 쓰는 이 모두에게 남은 건 ‘우월’이란 타이틀이다. 칼이든 대포든, 장만했으니 안 쓰면 손해. 새 폰 인증샷 찍고, 한 물 간 친구 폰과 비교샷 찍고, 음식 냄새에 취해 찍고, 갬성 터져서 찍고, 좋아요 100개 기념으로 또 찍어 댄다. 1억 화소 고화질 이미지는 과잉 생산되고 세상 구석구석 재고로 쌓인다.
윤성필 개인전 '뵈는 게 없다' 전시 전경
오늘날 지구상에 넘쳐흐르는 이미지의 대부분은 대중이 생산했다.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소비자에 불과했던 그들 말이다. 형편없이 치우쳤던 이미지 생산력은 분배의 정의를 이룩했고 꿀 같던 권력은 그대로 동났다. 그 최전선에 사진기의 보급이 있다.[1] 역사상 가장 많은 재생 횟수를 차지한 음원은 BTS도 뭣도 아니고 카메라 셔터 소리일 것이다. 하나 둘 그렇게 다 가져갔다. 기록, 시선, 감성, 자세와 집념은 물론이고 시야 환기, 재조명, 문제 제기, 매체 특성에 기댄 담론까지 대중에 다 내어준 사진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따로 없다. “어휴, 난 이제 대체 뭘 찍나?”
십수 년간 이 화두를 고민해 온 윤성필은 진짜를 담기(寫眞, 사진)로 한다. 은염사진은 이름처럼, 인화지의 감광층이 함유한 (할로겐 계열의)은 화합물(銀鹽, 은염)이 빛을 쬐면 분해되어 어두워지는 성질을 이용한다. 감광의 정도의 차이가 바로 사진의 내용(像, 상)이다. 그 차이를 뻥튀기해 눈에 보이게 만드는 과정이 현상이다. 정지제로 반응을 멈추고, 고정제로 감광을 막으면 우리가 보는 젤라틴 실버 프린트가 된다.
별안간 그는 락스를 들이붓는다. 기껏 뽑은 사진 표면의 고정층이 손상되고, 상을 이루던 은 이온은 도로 화합물을 생성한다. 그래서 하얗게 탈색한다. 거의 다 지워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은 입자는 살았다. 복원제를 긴급 수혈하면 아직 살릴 수 있다. 그대로 정착시킨다. 매몰찬 확인사살. 이젠 돌이킬 수 없다. 그럼에도 은 입자 감광 사실(眞)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럼 이 이미지는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존재란, 작용의 원인과 결과인가? 아니면 작용 자체인가? 무언가를 두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칭한다면, 인식한 것인가 아닌가?
윤성필 개인전 '뵈는 게 없다' 전시 전경
존재론과 인식론의 대결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철저한 유물론자이다. 아니 땐 굴뚝엔 연기가 없다. 현상은 물론이고 인식 또한 작용의 결과이다. 미규명은 신비감의 근원이자 실체이다. ‘영영 규명할 수 없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김빠지고 힘 빠지는 사실은 이미 괴델(Kurt Friedrich Gödel, 1906-1978) 선배가 규명했다. 그러니 안 보이고 안 집히는 건 언제까지나 우릴 괴롭힐 것이다. 근데 윤성필은 한 술 더 떠서 ’존재하는 정도가 아니라 쌔고 쌨다, 거의 전부 그래’란다. 볼 수 없는 것, 움켜쥘 수 없는 것의 집합이 훨씬 크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2]의 구성비가 우주의 96%에 달한다는 건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게 있고! 많고! 대부분!’이라는 밤하늘의 시커먼 고함이다. 보이는 만큼 있는 게 아니다.
마지막 사진이 보인다면 작가가 직접 심안의 소유자로 임명한다. 애초 아무것도 없으니 몽골 유목민이 안경을 쓴 들 보일 리가. 아무리 보는 게 다가 아니라지만, 뭔가 거꾸로 된 기분이다. 안 보여주는 사진이라니? 아니, 眞은 안 보이니까. ‘보이지 않는 걸 보여 주는 사진’이 낫겠다. 그런 작업, 그런 전시이다.
윤성필-비합리적 인식 85x117cm 젤라틴 실버프린트 2019
윤성필-비합리적 인식 85x117cm 젤라틴 실버프린트 2019
사전적 의미의 사진은 실물(眞)의 인용(寫)이다. 그런데 그에게 ‘眞’은 피사체 실물보다 세상의 원리 자체이다. 그런 ‘진짜’는 대개 이름값, 얼굴값을 하려 든다. 둘러싼 안개도 짙고, 가깝고도 멀고, 눈에 힘줘도 잘 안 보이고, 호락호락 집히지도 않고… 희다 못해 당황스러운 그의 사진 액자는, 말하자면 ‘진짜를 담은 시험관 샘플’ 같은 것이다. ‘안 보임’이 참으로 선명하게 잘 찍혔다. 주변에 짙게 낀 안개 같은 ‘보임’은 락스로 다 지웠으니. 원래 그리 생겼건만 이제야 조금 더 제대로 보는 원리의 표본, 원리의 누드이다. 사진가들이 일찍이 선보인 적 없는 작업으로, 사진의 의미를 다시금 곰곰이 짚게 한다.
아니, 사진이 문제가 아니다. 시각예술의 끝자락은 어디까지일까? 시각을 내던지는 예술도 이제 시각예술이다. 시각에 미련 없는 시각예술가. ‘시각에 발목 잡히지 말고, 시각에 연연하지 말고, 시각의 미혹을 극복하라’고 시각으로 말하는 시각예술가라니. 일확천금 꿈도 꾸지 말라는 로또방 주인이 문득 떠오른다. 이건 숫제 제 살 베어 물며 고기의 참맛을 찾는 미식가 아닌가.
[1] 이등 공신은 아마도 AI 이미징이 될 것이다. 둘은 상보적이다. 사진 집합은 무궁무진한 AI 학습샘플 풀이 되고, 사진 생산에서 AI의 개입은 더 많은 소스를 살리고 건질 것이다.
[2] 우주 가속 팽창 모델에서 납득이 불충분한 부분의 설명을 위한 가정(Ad Hoc). 직접적 관측으로 특성을 밝힐 수 없는 인자이기에 ‘암흑(dark)’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2023.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Octobe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3 윤성필 개인전 《뵈는 게 없다》 전시 서문
눈에 뵈는 게 없지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그냥 허-연 사진이 덜렁 걸렸다
한참을 훑어도 도무지 ‘뵈는 게 없다’
‘혹시 아직 설치 중?’ ‘잘못 들어왔나?’ 전시 기간을 슬쩍 곁눈질하며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각오로 다시금 눈에 힘을 준다. 잠깐의 적막을 비집고, 핏발 선 눈동자에 희미한 건더기가 얼핏 집힌다. 확신 없는 느낌. 불안감. 조심스럽다. 이럴 때 작아진다. 감상은 당당해야 한다던데.
잠깐, 잘하면 뭔가 보일 것도 같다. 사람 얼굴? 도통 감을 못 잡고 갸웃거리는 뒤태가 안쓰러운지 지킴이 한 분이 참지 못하고 귀띔한다. ‘…부처? 그러네!?’ “그럼 이건 여왕?” 옳단다. 자신감이 솟는다. 갓 눈뜬 심봉사처럼 으쓱대며 다음 사진도 뚫어져라 노려본다. 응, 누군지 모르겠다. ’얼굴’은 맞는데. “작가님이세요.” ‘누가 알려달랬나 참내’ 어차피 못 맞췄겠지만, 괜히 눈 흘기며 마지막 액자를 마주한다. ‘보인다고 나도 이제’
눈 비비고 각 잡아도, 10초가 흐르고 20초가 지나도 초점이 없다. 그런 날 훔쳐보는 지킴이. 마스크 너머로 ‘웃참’하는 착각이 든다. 뭐 그럴 만은 했다. 빈 액자였으니까.
신상 맥가이버 칼이 고색창연한 엑스칼리버를 압도한다. 사진을 전공하고 대포를 이고 지며 비바람을 헤치지 않아도 ‘폰카’ 하나면 그럴듯한 이미지를 뽑을 수 있다. 견문발검이든 견문발포든 매한가지로 모기는 피떡이다. 핸드폰조차 내장 카메라 렌즈와 이미지센서의 성능이 일상적인 요구를 이미 한참 넘었다. 파는 이와 쓰는 이 모두에게 남은 건 ‘우월’이란 타이틀이다. 칼이든 대포든, 장만했으니 안 쓰면 손해. 새 폰 인증샷 찍고, 한 물 간 친구 폰과 비교샷 찍고, 음식 냄새에 취해 찍고, 갬성 터져서 찍고, 좋아요 100개 기념으로 또 찍어 댄다. 1억 화소 고화질 이미지는 과잉 생산되고 세상 구석구석 재고로 쌓인다.
윤성필 개인전 '뵈는 게 없다' 전시 전경
오늘날 지구상에 넘쳐흐르는 이미지의 대부분은 대중이 생산했다.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소비자에 불과했던 그들 말이다. 형편없이 치우쳤던 이미지 생산력은 분배의 정의를 이룩했고 꿀 같던 권력은 그대로 동났다. 그 최전선에 사진기의 보급이 있다.[1] 역사상 가장 많은 재생 횟수를 차지한 음원은 BTS도 뭣도 아니고 카메라 셔터 소리일 것이다. 하나 둘 그렇게 다 가져갔다. 기록, 시선, 감성, 자세와 집념은 물론이고 시야 환기, 재조명, 문제 제기, 매체 특성에 기댄 담론까지 대중에 다 내어준 사진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따로 없다. “어휴, 난 이제 대체 뭘 찍나?”
십수 년간 이 화두를 고민해 온 윤성필은 진짜를 담기(寫眞, 사진)로 한다. 은염사진은 이름처럼, 인화지의 감광층이 함유한 (할로겐 계열의)은 화합물(銀鹽, 은염)이 빛을 쬐면 분해되어 어두워지는 성질을 이용한다. 감광의 정도의 차이가 바로 사진의 내용(像, 상)이다. 그 차이를 뻥튀기해 눈에 보이게 만드는 과정이 현상이다. 정지제로 반응을 멈추고, 고정제로 감광을 막으면 우리가 보는 젤라틴 실버 프린트가 된다.
별안간 그는 락스를 들이붓는다. 기껏 뽑은 사진 표면의 고정층이 손상되고, 상을 이루던 은 이온은 도로 화합물을 생성한다. 그래서 하얗게 탈색한다. 거의 다 지워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은 입자는 살았다. 복원제를 긴급 수혈하면 아직 살릴 수 있다. 그대로 정착시킨다. 매몰찬 확인사살. 이젠 돌이킬 수 없다. 그럼에도 은 입자 감광 사실(眞)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럼 이 이미지는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존재란, 작용의 원인과 결과인가? 아니면 작용 자체인가? 무언가를 두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칭한다면, 인식한 것인가 아닌가?
윤성필 개인전 '뵈는 게 없다' 전시 전경
존재론과 인식론의 대결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철저한 유물론자이다. 아니 땐 굴뚝엔 연기가 없다. 현상은 물론이고 인식 또한 작용의 결과이다. 미규명은 신비감의 근원이자 실체이다. ‘영영 규명할 수 없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김빠지고 힘 빠지는 사실은 이미 괴델(Kurt Friedrich Gödel, 1906-1978) 선배가 규명했다. 그러니 안 보이고 안 집히는 건 언제까지나 우릴 괴롭힐 것이다. 근데 윤성필은 한 술 더 떠서 ’존재하는 정도가 아니라 쌔고 쌨다, 거의 전부 그래’란다. 볼 수 없는 것, 움켜쥘 수 없는 것의 집합이 훨씬 크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2]의 구성비가 우주의 96%에 달한다는 건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게 있고! 많고! 대부분!’이라는 밤하늘의 시커먼 고함이다. 보이는 만큼 있는 게 아니다.
마지막 사진이 보인다면 작가가 직접 심안의 소유자로 임명한다. 애초 아무것도 없으니 몽골 유목민이 안경을 쓴 들 보일 리가. 아무리 보는 게 다가 아니라지만, 뭔가 거꾸로 된 기분이다. 안 보여주는 사진이라니? 아니, 眞은 안 보이니까. ‘보이지 않는 걸 보여 주는 사진’이 낫겠다. 그런 작업, 그런 전시이다.
윤성필-비합리적 인식 85x117cm 젤라틴 실버프린트 2019
윤성필-비합리적 인식 85x117cm 젤라틴 실버프린트 2019
사전적 의미의 사진은 실물(眞)의 인용(寫)이다. 그런데 그에게 ‘眞’은 피사체 실물보다 세상의 원리 자체이다. 그런 ‘진짜’는 대개 이름값, 얼굴값을 하려 든다. 둘러싼 안개도 짙고, 가깝고도 멀고, 눈에 힘줘도 잘 안 보이고, 호락호락 집히지도 않고… 희다 못해 당황스러운 그의 사진 액자는, 말하자면 ‘진짜를 담은 시험관 샘플’ 같은 것이다. ‘안 보임’이 참으로 선명하게 잘 찍혔다. 주변에 짙게 낀 안개 같은 ‘보임’은 락스로 다 지웠으니. 원래 그리 생겼건만 이제야 조금 더 제대로 보는 원리의 표본, 원리의 누드이다. 사진가들이 일찍이 선보인 적 없는 작업으로, 사진의 의미를 다시금 곰곰이 짚게 한다.
아니, 사진이 문제가 아니다. 시각예술의 끝자락은 어디까지일까? 시각을 내던지는 예술도 이제 시각예술이다. 시각에 미련 없는 시각예술가. ‘시각에 발목 잡히지 말고, 시각에 연연하지 말고, 시각의 미혹을 극복하라’고 시각으로 말하는 시각예술가라니. 일확천금 꿈도 꾸지 말라는 로또방 주인이 문득 떠오른다. 이건 숫제 제 살 베어 물며 고기의 참맛을 찾는 미식가 아닌가.
[1] 이등 공신은 아마도 AI 이미징이 될 것이다. 둘은 상보적이다. 사진 집합은 무궁무진한 AI 학습샘플 풀이 되고, 사진 생산에서 AI의 개입은 더 많은 소스를 살리고 건질 것이다.
[2] 우주 가속 팽창 모델에서 납득이 불충분한 부분의 설명을 위한 가정(Ad Hoc). 직접적 관측으로 특성을 밝힐 수 없는 인자이기에 ‘암흑(dark)’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2023.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Octobe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