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결말은 애초부터 없었다.
There Was Never a Beginning or End in the First Place
Candy Koh, <10:30> (Space 776, 9.30 – 10. 15, 2023)
정재연
독립큐레이터(NYC-SEOUL)
무언가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Candy Koh의 작품을 보며 느낀 첫 감정이었다. 작품은 말하고 있었다. 난 왜 딴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피곤할까. 난 왜 늘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진정 존귀한 그녀 자체가 뭔지 모르며 연기하는 허수아비처럼. 그런데 왜 그림에선 해방감이 느껴질까? 왜 희망이 보일까? 힘찬 드로잉이 목놓아 우는 것 같이 애절하지만 반면에 아주 강해 보인다. 두껍고 구불구불한 드로잉 사이로 스며 나오는 그녀의 변주곡.
Untitled (20180605-Orange Head), 2018
graphite, watercolor, and oil pastel on paper
9.4 x 12.6 in
© Candy Koh, 2018
붓을 이용해 작품을 그리지만 붓을 사용하지 않은 듯한 불규칙한 선 그리고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터치로 잠시 길을 잃었다. 그렇게 작품을 30초 이상 바라보고 있으면 그때야 함께 발을 맞춰 걷고 있음을 감지한다. 엇나가고 꼬인 드로잉은 논리적이지 않고, 충동적이며, 어떤 욕망의 표출이란 것을. 계속해서 갈등을 만들어 내지만 갈등을 풀어나가는 것 또한 스스로의 몫이다. 무언가 억압되어 있지만 그 억압을 풀기 위한 열쇠로 그녀는 소통과 타협이란 방법을 선택했다. 소통과 타협이란 시도가 이번 전시에 그대로 녹여져 있다고 본다. 주로 드로잉 적인 회화와 재빠른 제스처에 의한 드로잉 작품을 통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담은 작품들이다. 이런 회화는 즉흥적이고 암시적이다. 작업 과정을 살펴봐도 2020년 이전 작품들은 선이 휘갈겨져 있고 그 무게도 무거워 보인다. 단순하면서 복잡하다. 앞서 말했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지점과 뚜렷하고 선명한 색을 쓰기보단 2-3가지 이상의 색을 섞고 묽게 만들어 어색한 색을 사용했다. 뭉개고 문지르고 무엇인가 답답함을 그림으로 애써 풀어내려 하지만 풀어내려 할수록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집요한 방식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다가 다시 응집시킨다. 2020년 이후의 작품을 보면 그녀의 시선은 모호하지만 너그럽다. 좀 더 뚜렷한 색감을 사용하고 붓의 속도감도 늦췄다.
Untitled (202012-Oil), 2020
acrylic on canvas
20 x 16 in
© Candy Koh, 2020
고캔디가 추구하는 의식의 흐름은 무엇인가? 자신이 겪은 일, 그 일을 통해 떠오르는 과거의 경험과 생각, 느낌을 날것 그대로를 표출해 내는 것이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울부짖고 토해내는 것. 융(Carl Jung)은 꿈의 일반적 기능은 꿈의 소재를 생성함으로써 심리적 균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무엇인가 그녀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본다면 미래에 대한 심적인 상황이나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융은 근원적 종교, 문화에 대한 오랜 원형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Koh 의 작품에서도 우리는 샤머니즘 표상과 함께 전통적 주제에 의거한 표현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녀가 2018년부터 지속해서 이어오는 퍼포먼스 “Teller”는 마치 작가 스스로가 ‘점쟁이’ 같은 임무를 수행하며 관람객과 소통하며 감정적인 교감을 이어 나간다. 융이 꿈과 기억을 되살리고, 원형과 집단무의식을 불러내는 주술사라면 그녀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해결사를 자처한다. 이론적인 관점은 버리고 타인의 이야기와 꿈을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역할. 그렇게 예술 실천을 이어 나간다. 결국 빼앗아 가는 것도 사람, 채워줄 수 있는 것도 사람인가 보다. 필자도 과거와 미래를 채워주는 희망을 그려 철근 조각에 묶어두고 나왔다. 두꺼운 철근의 거친 표면을 매만지며 과거를 회복시키고 미래를 어루만지는 메모를.
Untitled (202209-Blot), 2022
acrylic on canvas
20 x 16 in
© Candy Koh, 2022
<Untitled>라는 연속적인 제목의 작품들은 오히려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autograph처럼 보인다. 항상 똑같은 위치; 오른쪽 아래부분에 날짜를 기입한다. 사인은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최종 진술과도 같다. 내가 나 자신임을 드러내고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자의식에서 나오는 강인함이 지금의 그녀를 만드는 듯 하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드로잉 선을 유연하게 따라가다 보면 또 다름을 만날 것이다. 거칠고 단순화된 2023년의 드로잉은 유머러스함이 가미 되었다. 문학과 미술 비평을 전공한 탓인지 드로잉도 마치 질서, 체계의 구조로 되어 있는 텍스트처럼 읽히기도 한다. ‘읽을 수 없는 텍스트’의 모양을 하고 ‘쓸 수 있는 텍스트’다. 그녀가 그린 것을 나는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지만 ‘받아들입니다.’로 해석하기로 하자. 로스쿨을 다니기 전부터 악화된 건강과 나빠진 시력 그리고 관절염이 그녀의 작품활동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에게 큰 도전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세상을 연결하고자 하지만, 가장 바깥에 서 있는 기분일 것이다. 사람들과의 격차, 다른 이들의 시선, 추상적인 의미, 실력에 대하여, 언제나 그에게 숙제이고, 그 숙제 속에서 이해 받지 못한 그가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완성되지 않아도 매일 무언가를 그렸을 그를 생각한다. 결심하고 그리는 시작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기 위한 그림은 기쁨뿐이다. 몇 장의 드로잉은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지 않아도 그게 너무 그 같아서 좋았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의 일이고, 오랫동안 그리길 바란다. 기쁨의 시작과 동시에 불행이 끝인 그가 그려내는 제각각 모양이 그녀가 바라는 결말로 맺어지길 원한다. 다시, 지금보다 더 가까운 마음으로.
손바닥을 펴보면 수많은 손금들이 그어져 있다. 손금은 전 인류가 보는 일종의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기술이다. 하얀 종이에 그려진 무수한 선은 그녀의 손금을 보는 것 같다. 무수한 선 갈래 속에서 하나의 지점으로 모여들고 다시 갈래로 흩어진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운명 같은 것들이 그녀의 손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들. 필자가 보기에 고캔디는 그림을 그리는 손이다. 선을 긋고 붓을 들어 휘갈기는 것만으로도 본인이 만족하는 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이번 전시가 그녀에게 의미가 크다고 보인다. 지금의 고캔디보다 더 그녀 같은 작품을 이어나가길 바란다. 앞으로 수없이 망가지고 넘어질 수많은 위기가 있더라도 말이다. 그녀의 이름처럼.
Untitled (202206/07-Peach Green), 2022
acrylic on canvas
20 x 16 in
© Candy Koh, 2022
Peach (20230807), 2023
graphite, acrylic marker, and oil pastel on paper
18 x 24 in
© Candy Koh, 2023
2023.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Octobe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시작과 결말은 애초부터 없었다.
There Was Never a Beginning or End in the First Place
Candy Koh, <10:30> (Space 776, 9.30 – 10. 15, 2023)
정재연
독립큐레이터(NYC-SEOUL)
무언가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Candy Koh의 작품을 보며 느낀 첫 감정이었다. 작품은 말하고 있었다. 난 왜 딴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피곤할까. 난 왜 늘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진정 존귀한 그녀 자체가 뭔지 모르며 연기하는 허수아비처럼. 그런데 왜 그림에선 해방감이 느껴질까? 왜 희망이 보일까? 힘찬 드로잉이 목놓아 우는 것 같이 애절하지만 반면에 아주 강해 보인다. 두껍고 구불구불한 드로잉 사이로 스며 나오는 그녀의 변주곡.
Untitled (20180605-Orange Head), 2018
graphite, watercolor, and oil pastel on paper
9.4 x 12.6 in
© Candy Koh, 2018
붓을 이용해 작품을 그리지만 붓을 사용하지 않은 듯한 불규칙한 선 그리고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터치로 잠시 길을 잃었다. 그렇게 작품을 30초 이상 바라보고 있으면 그때야 함께 발을 맞춰 걷고 있음을 감지한다. 엇나가고 꼬인 드로잉은 논리적이지 않고, 충동적이며, 어떤 욕망의 표출이란 것을. 계속해서 갈등을 만들어 내지만 갈등을 풀어나가는 것 또한 스스로의 몫이다. 무언가 억압되어 있지만 그 억압을 풀기 위한 열쇠로 그녀는 소통과 타협이란 방법을 선택했다. 소통과 타협이란 시도가 이번 전시에 그대로 녹여져 있다고 본다. 주로 드로잉 적인 회화와 재빠른 제스처에 의한 드로잉 작품을 통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담은 작품들이다. 이런 회화는 즉흥적이고 암시적이다. 작업 과정을 살펴봐도 2020년 이전 작품들은 선이 휘갈겨져 있고 그 무게도 무거워 보인다. 단순하면서 복잡하다. 앞서 말했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지점과 뚜렷하고 선명한 색을 쓰기보단 2-3가지 이상의 색을 섞고 묽게 만들어 어색한 색을 사용했다. 뭉개고 문지르고 무엇인가 답답함을 그림으로 애써 풀어내려 하지만 풀어내려 할수록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집요한 방식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다가 다시 응집시킨다. 2020년 이후의 작품을 보면 그녀의 시선은 모호하지만 너그럽다. 좀 더 뚜렷한 색감을 사용하고 붓의 속도감도 늦췄다.
Untitled (202012-Oil), 2020
acrylic on canvas
20 x 16 in
© Candy Koh, 2020
고캔디가 추구하는 의식의 흐름은 무엇인가? 자신이 겪은 일, 그 일을 통해 떠오르는 과거의 경험과 생각, 느낌을 날것 그대로를 표출해 내는 것이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울부짖고 토해내는 것. 융(Carl Jung)은 꿈의 일반적 기능은 꿈의 소재를 생성함으로써 심리적 균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무엇인가 그녀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본다면 미래에 대한 심적인 상황이나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융은 근원적 종교, 문화에 대한 오랜 원형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Koh 의 작품에서도 우리는 샤머니즘 표상과 함께 전통적 주제에 의거한 표현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녀가 2018년부터 지속해서 이어오는 퍼포먼스 “Teller”는 마치 작가 스스로가 ‘점쟁이’ 같은 임무를 수행하며 관람객과 소통하며 감정적인 교감을 이어 나간다. 융이 꿈과 기억을 되살리고, 원형과 집단무의식을 불러내는 주술사라면 그녀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해결사를 자처한다. 이론적인 관점은 버리고 타인의 이야기와 꿈을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역할. 그렇게 예술 실천을 이어 나간다. 결국 빼앗아 가는 것도 사람, 채워줄 수 있는 것도 사람인가 보다. 필자도 과거와 미래를 채워주는 희망을 그려 철근 조각에 묶어두고 나왔다. 두꺼운 철근의 거친 표면을 매만지며 과거를 회복시키고 미래를 어루만지는 메모를.
Untitled (202209-Blot), 2022
acrylic on canvas
20 x 16 in
© Candy Koh, 2022
<Untitled>라는 연속적인 제목의 작품들은 오히려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autograph처럼 보인다. 항상 똑같은 위치; 오른쪽 아래부분에 날짜를 기입한다. 사인은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최종 진술과도 같다. 내가 나 자신임을 드러내고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자의식에서 나오는 강인함이 지금의 그녀를 만드는 듯 하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드로잉 선을 유연하게 따라가다 보면 또 다름을 만날 것이다. 거칠고 단순화된 2023년의 드로잉은 유머러스함이 가미 되었다. 문학과 미술 비평을 전공한 탓인지 드로잉도 마치 질서, 체계의 구조로 되어 있는 텍스트처럼 읽히기도 한다. ‘읽을 수 없는 텍스트’의 모양을 하고 ‘쓸 수 있는 텍스트’다. 그녀가 그린 것을 나는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지만 ‘받아들입니다.’로 해석하기로 하자. 로스쿨을 다니기 전부터 악화된 건강과 나빠진 시력 그리고 관절염이 그녀의 작품활동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에게 큰 도전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세상을 연결하고자 하지만, 가장 바깥에 서 있는 기분일 것이다. 사람들과의 격차, 다른 이들의 시선, 추상적인 의미, 실력에 대하여, 언제나 그에게 숙제이고, 그 숙제 속에서 이해 받지 못한 그가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완성되지 않아도 매일 무언가를 그렸을 그를 생각한다. 결심하고 그리는 시작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기 위한 그림은 기쁨뿐이다. 몇 장의 드로잉은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지 않아도 그게 너무 그 같아서 좋았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의 일이고, 오랫동안 그리길 바란다. 기쁨의 시작과 동시에 불행이 끝인 그가 그려내는 제각각 모양이 그녀가 바라는 결말로 맺어지길 원한다. 다시, 지금보다 더 가까운 마음으로.
손바닥을 펴보면 수많은 손금들이 그어져 있다. 손금은 전 인류가 보는 일종의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기술이다. 하얀 종이에 그려진 무수한 선은 그녀의 손금을 보는 것 같다. 무수한 선 갈래 속에서 하나의 지점으로 모여들고 다시 갈래로 흩어진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운명 같은 것들이 그녀의 손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들. 필자가 보기에 고캔디는 그림을 그리는 손이다. 선을 긋고 붓을 들어 휘갈기는 것만으로도 본인이 만족하는 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이번 전시가 그녀에게 의미가 크다고 보인다. 지금의 고캔디보다 더 그녀 같은 작품을 이어나가길 바란다. 앞으로 수없이 망가지고 넘어질 수많은 위기가 있더라도 말이다. 그녀의 이름처럼.
Untitled (202206/07-Peach Green), 2022
acrylic on canvas
20 x 16 in
© Candy Koh, 2022
Peach (20230807), 2023
graphite, acrylic marker, and oil pastel on paper
18 x 24 in
© Candy Koh, 2023
2023.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October. 2023,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