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어-오역하기: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로부터
조현아 (미술비평)
“언어는 느슨하기 때문에 (성립) 가능하고,
우리는 서로를 오해할 수 있기에 (오히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1]-리웡초이
우리는 아시아가 무수히 많은 점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드넓은 ‘이곳’에서 배양된 작품 간의 대화와 공유가 충분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시각예술간 섞임이 정치경제적 쟁점의 표면을 매끄러워 보이게 만드는 피상적인 문화 교류 이상의 연결로 자리잡으면서, ‘아시아 미술’에 대한 합의된 서사 정립에 대한 조급함도 항시 작동해왔다. 지역적 문제에 집중하기에도 벅찼던[2] 미술 작품은 각 국가만의 근현대 미술사 완성을 위해 ‘선별’을 거쳐 물리적·서사적으로 산더미를 이룰 만큼 소장되어왔다. 이후 3개 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 싱가포르미술관, 퀸즐랜드주립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은 서로가 무엇을 모아왔는지를, ‘가장 비싼 작품이 아닌, 서로가 가장 이상하게 여겼던 부분을 질문의 촉매로 삼아 공동을 만드는 요소가 되는 작품을 살펴보는’[3] 계기로 여섯 개 실천어를 길잡이로 두고 헤쳐갈 장을 만들었다.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이하 《산》)를 구성했다.
하지만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나 작품 설명이 전하는 정보값에 관계없이, 관객이 작품의 서사와 그들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오역이 발생한다. 오역은 6개의 실천어, “사랑하기, 추상하기와 침묵하기, 번역하기, 세우기, 섬하기, 물갈퀴 만들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도 생겨난다. 3명의 큐레이터는 “일반명사는 같은 언어로 적혀 있더라도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명제에 동의하며, 일반명사에 ‘하기’를 더했다. 이러한 약속은 이미지의 수보다 전할 이야기가 많은 아시아 미술을, 다른 언어와 상징을 배우는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기존의 미술사나 담론에 기대지 않은 채 알아가겠다는 의지이자 방편으로 읽혔다. 이렇게 《산》에서 작품을 수식하고 묶어내는 실천어는 한 곳에 모인 ‘동시대 미술 작품’이 개념미술의 넓은 범주 안에서 작동되고 있고[4], 각국의 소장품이 여럿이 등반할 수 있는 산이 되려면 번역 가능한 기호가 장치로써 필요하다는 내부적 의견에 따라 생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획자들과 마찬가지로) 관람객은 실천어에 내재된 뜻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다.[5] 다만, 나름의 생각을 덧붙여 오역함으로써 받아들이고, 헤아려 가고자 노력할 뿐이다. 더불어 이 지점에서, 언어와 상징체계를 주로 이용해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들의 경향 때문인지 《산》에서 필자가 직관적으로 받은 인상은 무채색, 즉 미감의 부족이었다. 이와 같은 감흥을 밝히는 이유는 오역의 경험을 꺼냄으로써 대화를 시작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브라이언 푸아타, 〈벗어난 교육(실수의 기회)〉, 3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16:9, 58분 35초, 2021.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3-2024. 이미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사진 촬영: 코코아 픽쳐스
브라이언 푸아타, 〈벗어난 교육(실수의 기회)〉, 3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16:9, 58분 35초, 2021. ⓒ 조현아
《산》에서 필자가 주목한 실천어는 ‘오역하기’와 가깝고도 비근한 “번역하기”와 “추상하기와 침묵하기”였다. 그중 추상하기와 침묵하기로 묶인 작품들은 구체적인 시청각 자료로 아시아 미술을 제시하는 대신 몸짓이나 소리, 언어로 작가가 제도 안에서 경험한 바를 전달하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푸아타의 <벗어난 교육(실수의 기회)>(2021)을 《산》의 요지가 압축된 하나의 요약본으로 보고, 이를 전시 탐색의 시작점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고 싶다. 1950년대 일본 부토의 영향을 흡수한 사모아계 호주인 푸아타는, 퀸즐랜드주립미술관에서 10분간의 퍼포먼스를 끊어가고, 지속하며 아시아 미술, 미술관의 건물과 노동자들에게 말을 건다. 그는 이 1인극에서 싱가포르 작가 자이 쿠닝의 퍼포먼스를 ‘아시아 미술 컬렉션’ 앞에서 언급한 후 아이웨이웨이를 쫒아내는 드라마 퀸이자, 영어를 사용하는 영적인 동물이 된다. 아시아 미술을 말소리와 숨소리로 호명하는 푸아타의 ‘교육’은 극적인 정치경제적 격변과 외부적 상황으로부터 기인한 물리적인 작품 대신, 디지털 이미지를 형성하는 랩탑과 스마트폰, 카메라 앞에서 진행된다. 그는 “알람이 울리면 바로 그 때가 퍼포먼스를 마칠 때랍니다”라고 여상하게 말한 후 “작품이 놓인 곳은 저기 바깥 어딘가였다 저기 바깥 어딘가 바깥 저기 어딘가 저기 바깥 어딘가”,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O 동물 O 동물 O”, “이건 뭐랄까 누락과 삭제의 행 행 행동이 존재한다. 거기서 나는 아이웨이웨이에게 작별을 고한다”, “사라지라 말했다 아이웨이웨이 사라지는 소리”라고 격정적으로 외친다. 이어 그는 카메라 너머의 관객에게 “상상해봐”라고 명령한다. 작가의 지령에 관람객은 일시적일지라도 아시아 현대미술사가 구체적인 형상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추상화되고 번역되는지를 목격한다.
‘소장된’ 푸아타의 작품은 아시아 미술이 다른 아시아 미술에 개념적으로 침투할 수 있음을 새삼스레 증명한다. 작가의 ‘벗어난 교육’은 뒤샹, 그러니까 서구미술사를 아버지로 삼거나 이에 의식적으로 반격하고자 했던 선배 미술가들[6]이 형성한 사적 줄기를 대범하게 논외로 두고, 눈물을 흘리고 고함을 지르며 그가 체화한 지식을 외부로 꺼내어 아시아 미술간의 반향을 하나의 작업에 녹여낸다. 작가의 ‘추상하기’는 《산》에 모인 다른 퍼포먼스 작업과 임시적 존재를 언급하는 작품 읽기의 동력을 생성한다.
키리 달레나, 〈지워진 슬로건〉, 포토래그 바리타 면섬유의 광택 종이에 잉크젯 프린트, 91.4×141.3cm, 2014. 제공: 작가, 서울시립미술관
히만 청, 〈기하학에 관한 단편 소설〉, 단편소설과 장기 현장 퍼포먼스, 2009. 제공: 작가, 서울시립미술관
푸아타의 작품과 연결짓고자 하는 작품들은 정보를 나열하는 방법이 아닌, 한계가 명확한 전시 공간에서 상상력을 끌어내어 오역의 가능성을 높이는 상징적인 창작물이기도 하다. 구전되는 히만 청의 <기하학에 관한 단편 소설>(2009), 고착된 민족적 정체성을 뒤집어쓴 개인의 모습을 지적하는 리웬의 <이상한 과일>(2003), 밟힐 만큼 작은 규모로 제작된 탕다우의 <수브 나카사티엔 기념비>(1991)와 마주한, 베니스로 이동하지 못한 머라이언의 이미지와 조작된 성공신화를 담은 림차이추엔의 <마이크>(2005)가 그것이다. 한편, 림차이추엔이 언어와 이미지로 머라이언 밑에 깔려 보이지 않던 제도와 언론 보도의 문제에 일격을 가한 것처럼, 마이클 리의 연작 <계획된 도시: 기념물 추적하기>(2006~2007)는 1945년부터 2005년까지 도시 계획에 의해 건립되었다가 사라진 건물을 건축 자재가 지녔을 색채나 특성이 휘발된 백색 모형과 텍스트로 언제나 개발중인 ‘국가’가 제거한 것이 비물질적인 정서적 경험과 교류, 질문의 방식이었음을 환유적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소거의 방식으로 말하는 작품 중에는 키리 달레나의 <지워진 슬로건>(2008~)도 있다. 과거 시위자들이 썼을 문구를 디지털 툴로 지워내며 독재 정권의 검열으로 무음(無音) 처리되어온 군중의 소리를 시각화한 작품의 발화법은 파이어룰 달마의 연작이 식민을 겪지 않았던 말레이인 조상들과 식민 이후 외세를 등에 업고 이 지역으로 걸어들어온 ‘조상’의 얼굴을 지우고 잘린 신체 일부만을 보여주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이는 부재의 감각조차 결여된 아시아, 그리고 아시아간의 이해 방식을 현시한다.
이에 더해 장은하, 텡옌후이, 루하 피피타가 3개 미술관 소장품 중 ‘무제’라 명명된 작품을 주제로 써낸 에세이는 전시의 서사 속 서사 역할을 하는데, 이는 넘쳐나는 ‘무제’ 앞에서 ‘아는 것 없이 그것을 알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산》이 소개하는 작품은 아시아-태평양 미술의 일부이며, 어느 정도의 멸균 과정을 거쳐 선보여진 것으로, 이를 적합한 ‘공동의 자원’으로 삼는 것에 전부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시는 저곳의 아시아에서 남쪽의 지대로 시각문화를 노출하고, 소장품을 일상의 차원에서 관찰하는 프로젝트를 포함해 아시아-태평양 미술이라는 광활한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실천으로 의미를 지니며, 개별 작품이 담지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시도로[7] 이에 대한 완전한 이해보다 공동의 오역하기를 긍정하는 지점이 되어준다.
《산》은 ‘타국과 우리가 점유한 지대를 ‘공동의 것’으로, 이로부터 비롯된 예술이야말로 “공유 자원”으로 삼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관람자의 손에 쥐여준다. 그러면서, 소장품, 즉 각각의 섬이 “대륙으로 이어진 유럽적 지식의 형태”와 차별되는 군도로서의 연결되어 있음을 전한다. 이 섬이 갖춘 문화의 지형을 담은 작품들 사이를 오역의 위험을 감수하자는 다짐으로 빚어낸 물갈퀴로 헤엄쳐 갈 때, 전시는 온전히 이 지역 미술간의 차이를 익히는 지점, 미완의 미술사 속으로 우리가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는 입구로서 수용된다. 여기에 ‘서양인 아버지’들의 작품은 없다. 아시아-태평양 미술로 아시아-태평양 미술만을 말하는 일의 자연스러운 포용은 《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또 하나의 결실이기도 하다.
장은하, 텡옌후이, 루하 피피타, 〈무제 프로젝트〉, 2023.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전시 전경.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사진 촬영: 코코아 픽쳐스.
[1] Lee Weng Choy, 「Metonym and Metaphor, Islands and Continents: Reflections on Curating Contemporary Art from Southeast Asia」, 『Charting Thoughts: Essays on Art in Southeast Asia』, p.345.
[2] T.K. Sabapathy, 「Reading Conceptual Art in Southeast Asia: A Beginning」, 『Charting Thoughts: Essays on Art in Southeast Asia』, p.236.
[3] 2023년 12월 8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린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개막 프로그램 ‘공공 미팅’ 패널들의 대담.
[4] T.K. Sabapathy, 「Reading Conceptual Art in Southeast Asia: A Beginning」, 『Charting Thoughts: Essays on Art in Southeast Asia』, p.237. 사바패시는 20세기 말의 개념미술이 “남동아시아 예술 분야에서 널리 수용되고 있었”고, 아피난 포샤난다의 글을 인용하며 1970년대 초 제도에 도전했던 동남아시아의 ‘개념적’ 움직임의 예시를 언급하고 있다.
[5] 가령, 《산》의 큐레이터인 박가희, 옹푸이킴, 루벤 키한은 서신을 통해 ‘사랑하기’에 대한 각자의 정의를 제시했다. 박가희는 “사랑은 [나와 나(타인)에 관한] 배움”으로, 옹푸이킴은 “자아를 소유하거나, 억압하거나, 희생하거나, 통제하려는 인간의 감정과 본능”으로, 루벤 키한은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 … 생존 이상의 의미를 찾는 일상적 투쟁”으로 서술했다. 박가희·옹푸이킴·루벤 키한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2023, pp.12-14.
[6] T.K. Sabapathy, 「Reading Conceptual Art in Southeast Asia: A Beginning」, 『Charting Thoughts: Essays on Art in Southeast Asia』, pp.240-241. 해당 문헌에는 2012년 싱가포르에서 토니 고드프리(Tony Godfrey)가 기획하고 큐레이팅한 전시 《남동아시아의 마르셀 뒤샹》이 언급된다. “뒤샹의 방문은 허구적으로 연출되며, 이 예술가를 기억하기 위한 부조리한 장치로 활용된다. 이렇게 유머러스하며 우호적인 태도의 기저에는 역사적인 무게와 까다로운 문화적 의도가 숨어 있다. 그 의도란, “뒤샹의 존재감이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남아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뒤샹은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곳에서 예술을 새롭게 창조하고 이해하는 원초적인 근원이 되었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가령 남동아시아에서) 아이디어로서의 뒤샹, 존재로서의 뒤샹은 남동아시아에서 예술을 만들고 바라보는 데 널리 퍼져 있으며 결과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7] Lee Weng Choy, 「Metonym and Metaphor, Islands and Continents: Reflections on Curating Contemporary Art from Southeast Asia」, 『Charting Thoughts: Essays on Art in Southeast Asia』, p.346.
2024.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실천어-오역하기: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로부터
조현아 (미술비평)
“언어는 느슨하기 때문에 (성립) 가능하고,
우리는 서로를 오해할 수 있기에 (오히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1]-리웡초이
우리는 아시아가 무수히 많은 점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드넓은 ‘이곳’에서 배양된 작품 간의 대화와 공유가 충분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시각예술간 섞임이 정치경제적 쟁점의 표면을 매끄러워 보이게 만드는 피상적인 문화 교류 이상의 연결로 자리잡으면서, ‘아시아 미술’에 대한 합의된 서사 정립에 대한 조급함도 항시 작동해왔다. 지역적 문제에 집중하기에도 벅찼던[2] 미술 작품은 각 국가만의 근현대 미술사 완성을 위해 ‘선별’을 거쳐 물리적·서사적으로 산더미를 이룰 만큼 소장되어왔다. 이후 3개 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 싱가포르미술관, 퀸즐랜드주립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은 서로가 무엇을 모아왔는지를, ‘가장 비싼 작품이 아닌, 서로가 가장 이상하게 여겼던 부분을 질문의 촉매로 삼아 공동을 만드는 요소가 되는 작품을 살펴보는’[3] 계기로 여섯 개 실천어를 길잡이로 두고 헤쳐갈 장을 만들었다.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이하 《산》)를 구성했다.
하지만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나 작품 설명이 전하는 정보값에 관계없이, 관객이 작품의 서사와 그들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오역이 발생한다. 오역은 6개의 실천어, “사랑하기, 추상하기와 침묵하기, 번역하기, 세우기, 섬하기, 물갈퀴 만들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도 생겨난다. 3명의 큐레이터는 “일반명사는 같은 언어로 적혀 있더라도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명제에 동의하며, 일반명사에 ‘하기’를 더했다. 이러한 약속은 이미지의 수보다 전할 이야기가 많은 아시아 미술을, 다른 언어와 상징을 배우는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기존의 미술사나 담론에 기대지 않은 채 알아가겠다는 의지이자 방편으로 읽혔다. 이렇게 《산》에서 작품을 수식하고 묶어내는 실천어는 한 곳에 모인 ‘동시대 미술 작품’이 개념미술의 넓은 범주 안에서 작동되고 있고[4], 각국의 소장품이 여럿이 등반할 수 있는 산이 되려면 번역 가능한 기호가 장치로써 필요하다는 내부적 의견에 따라 생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획자들과 마찬가지로) 관람객은 실천어에 내재된 뜻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다.[5] 다만, 나름의 생각을 덧붙여 오역함으로써 받아들이고, 헤아려 가고자 노력할 뿐이다. 더불어 이 지점에서, 언어와 상징체계를 주로 이용해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들의 경향 때문인지 《산》에서 필자가 직관적으로 받은 인상은 무채색, 즉 미감의 부족이었다. 이와 같은 감흥을 밝히는 이유는 오역의 경험을 꺼냄으로써 대화를 시작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브라이언 푸아타, 〈벗어난 교육(실수의 기회)〉, 3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16:9, 58분 35초, 2021.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3-2024. 이미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사진 촬영: 코코아 픽쳐스
브라이언 푸아타, 〈벗어난 교육(실수의 기회)〉, 3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16:9, 58분 35초, 2021. ⓒ 조현아
《산》에서 필자가 주목한 실천어는 ‘오역하기’와 가깝고도 비근한 “번역하기”와 “추상하기와 침묵하기”였다. 그중 추상하기와 침묵하기로 묶인 작품들은 구체적인 시청각 자료로 아시아 미술을 제시하는 대신 몸짓이나 소리, 언어로 작가가 제도 안에서 경험한 바를 전달하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푸아타의 <벗어난 교육(실수의 기회)>(2021)을 《산》의 요지가 압축된 하나의 요약본으로 보고, 이를 전시 탐색의 시작점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고 싶다. 1950년대 일본 부토의 영향을 흡수한 사모아계 호주인 푸아타는, 퀸즐랜드주립미술관에서 10분간의 퍼포먼스를 끊어가고, 지속하며 아시아 미술, 미술관의 건물과 노동자들에게 말을 건다. 그는 이 1인극에서 싱가포르 작가 자이 쿠닝의 퍼포먼스를 ‘아시아 미술 컬렉션’ 앞에서 언급한 후 아이웨이웨이를 쫒아내는 드라마 퀸이자, 영어를 사용하는 영적인 동물이 된다. 아시아 미술을 말소리와 숨소리로 호명하는 푸아타의 ‘교육’은 극적인 정치경제적 격변과 외부적 상황으로부터 기인한 물리적인 작품 대신, 디지털 이미지를 형성하는 랩탑과 스마트폰, 카메라 앞에서 진행된다. 그는 “알람이 울리면 바로 그 때가 퍼포먼스를 마칠 때랍니다”라고 여상하게 말한 후 “작품이 놓인 곳은 저기 바깥 어딘가였다 저기 바깥 어딘가 바깥 저기 어딘가 저기 바깥 어딘가”,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소리 동물 O 동물 O 동물 O”, “이건 뭐랄까 누락과 삭제의 행 행 행동이 존재한다. 거기서 나는 아이웨이웨이에게 작별을 고한다”, “사라지라 말했다 아이웨이웨이 사라지는 소리”라고 격정적으로 외친다. 이어 그는 카메라 너머의 관객에게 “상상해봐”라고 명령한다. 작가의 지령에 관람객은 일시적일지라도 아시아 현대미술사가 구체적인 형상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추상화되고 번역되는지를 목격한다.
‘소장된’ 푸아타의 작품은 아시아 미술이 다른 아시아 미술에 개념적으로 침투할 수 있음을 새삼스레 증명한다. 작가의 ‘벗어난 교육’은 뒤샹, 그러니까 서구미술사를 아버지로 삼거나 이에 의식적으로 반격하고자 했던 선배 미술가들[6]이 형성한 사적 줄기를 대범하게 논외로 두고, 눈물을 흘리고 고함을 지르며 그가 체화한 지식을 외부로 꺼내어 아시아 미술간의 반향을 하나의 작업에 녹여낸다. 작가의 ‘추상하기’는 《산》에 모인 다른 퍼포먼스 작업과 임시적 존재를 언급하는 작품 읽기의 동력을 생성한다.
키리 달레나, 〈지워진 슬로건〉, 포토래그 바리타 면섬유의 광택 종이에 잉크젯 프린트, 91.4×141.3cm, 2014. 제공: 작가, 서울시립미술관
히만 청, 〈기하학에 관한 단편 소설〉, 단편소설과 장기 현장 퍼포먼스, 2009. 제공: 작가, 서울시립미술관
푸아타의 작품과 연결짓고자 하는 작품들은 정보를 나열하는 방법이 아닌, 한계가 명확한 전시 공간에서 상상력을 끌어내어 오역의 가능성을 높이는 상징적인 창작물이기도 하다. 구전되는 히만 청의 <기하학에 관한 단편 소설>(2009), 고착된 민족적 정체성을 뒤집어쓴 개인의 모습을 지적하는 리웬의 <이상한 과일>(2003), 밟힐 만큼 작은 규모로 제작된 탕다우의 <수브 나카사티엔 기념비>(1991)와 마주한, 베니스로 이동하지 못한 머라이언의 이미지와 조작된 성공신화를 담은 림차이추엔의 <마이크>(2005)가 그것이다. 한편, 림차이추엔이 언어와 이미지로 머라이언 밑에 깔려 보이지 않던 제도와 언론 보도의 문제에 일격을 가한 것처럼, 마이클 리의 연작 <계획된 도시: 기념물 추적하기>(2006~2007)는 1945년부터 2005년까지 도시 계획에 의해 건립되었다가 사라진 건물을 건축 자재가 지녔을 색채나 특성이 휘발된 백색 모형과 텍스트로 언제나 개발중인 ‘국가’가 제거한 것이 비물질적인 정서적 경험과 교류, 질문의 방식이었음을 환유적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소거의 방식으로 말하는 작품 중에는 키리 달레나의 <지워진 슬로건>(2008~)도 있다. 과거 시위자들이 썼을 문구를 디지털 툴로 지워내며 독재 정권의 검열으로 무음(無音) 처리되어온 군중의 소리를 시각화한 작품의 발화법은 파이어룰 달마의 연작이 식민을 겪지 않았던 말레이인 조상들과 식민 이후 외세를 등에 업고 이 지역으로 걸어들어온 ‘조상’의 얼굴을 지우고 잘린 신체 일부만을 보여주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이는 부재의 감각조차 결여된 아시아, 그리고 아시아간의 이해 방식을 현시한다.
이에 더해 장은하, 텡옌후이, 루하 피피타가 3개 미술관 소장품 중 ‘무제’라 명명된 작품을 주제로 써낸 에세이는 전시의 서사 속 서사 역할을 하는데, 이는 넘쳐나는 ‘무제’ 앞에서 ‘아는 것 없이 그것을 알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산》이 소개하는 작품은 아시아-태평양 미술의 일부이며, 어느 정도의 멸균 과정을 거쳐 선보여진 것으로, 이를 적합한 ‘공동의 자원’으로 삼는 것에 전부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시는 저곳의 아시아에서 남쪽의 지대로 시각문화를 노출하고, 소장품을 일상의 차원에서 관찰하는 프로젝트를 포함해 아시아-태평양 미술이라는 광활한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실천으로 의미를 지니며, 개별 작품이 담지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시도로[7] 이에 대한 완전한 이해보다 공동의 오역하기를 긍정하는 지점이 되어준다.
《산》은 ‘타국과 우리가 점유한 지대를 ‘공동의 것’으로, 이로부터 비롯된 예술이야말로 “공유 자원”으로 삼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관람자의 손에 쥐여준다. 그러면서, 소장품, 즉 각각의 섬이 “대륙으로 이어진 유럽적 지식의 형태”와 차별되는 군도로서의 연결되어 있음을 전한다. 이 섬이 갖춘 문화의 지형을 담은 작품들 사이를 오역의 위험을 감수하자는 다짐으로 빚어낸 물갈퀴로 헤엄쳐 갈 때, 전시는 온전히 이 지역 미술간의 차이를 익히는 지점, 미완의 미술사 속으로 우리가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는 입구로서 수용된다. 여기에 ‘서양인 아버지’들의 작품은 없다. 아시아-태평양 미술로 아시아-태평양 미술만을 말하는 일의 자연스러운 포용은 《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또 하나의 결실이기도 하다.
장은하, 텡옌후이, 루하 피피타, 〈무제 프로젝트〉, 2023.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전시 전경.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사진 촬영: 코코아 픽쳐스.
[1] Lee Weng Choy, 「Metonym and Metaphor, Islands and Continents: Reflections on Curating Contemporary Art from Southeast Asia」, 『Charting Thoughts: Essays on Art in Southeast Asia』, p.345.
[2] T.K. Sabapathy, 「Reading Conceptual Art in Southeast Asia: A Beginning」, 『Charting Thoughts: Essays on Art in Southeast Asia』, p.236.
[3] 2023년 12월 8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린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개막 프로그램 ‘공공 미팅’ 패널들의 대담.
[4] T.K. Sabapathy, 「Reading Conceptual Art in Southeast Asia: A Beginning」, 『Charting Thoughts: Essays on Art in Southeast Asia』, p.237. 사바패시는 20세기 말의 개념미술이 “남동아시아 예술 분야에서 널리 수용되고 있었”고, 아피난 포샤난다의 글을 인용하며 1970년대 초 제도에 도전했던 동남아시아의 ‘개념적’ 움직임의 예시를 언급하고 있다.
[5] 가령, 《산》의 큐레이터인 박가희, 옹푸이킴, 루벤 키한은 서신을 통해 ‘사랑하기’에 대한 각자의 정의를 제시했다. 박가희는 “사랑은 [나와 나(타인)에 관한] 배움”으로, 옹푸이킴은 “자아를 소유하거나, 억압하거나, 희생하거나, 통제하려는 인간의 감정과 본능”으로, 루벤 키한은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 … 생존 이상의 의미를 찾는 일상적 투쟁”으로 서술했다. 박가희·옹푸이킴·루벤 키한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2023, pp.12-14.
[6] T.K. Sabapathy, 「Reading Conceptual Art in Southeast Asia: A Beginning」, 『Charting Thoughts: Essays on Art in Southeast Asia』, pp.240-241. 해당 문헌에는 2012년 싱가포르에서 토니 고드프리(Tony Godfrey)가 기획하고 큐레이팅한 전시 《남동아시아의 마르셀 뒤샹》이 언급된다. “뒤샹의 방문은 허구적으로 연출되며, 이 예술가를 기억하기 위한 부조리한 장치로 활용된다. 이렇게 유머러스하며 우호적인 태도의 기저에는 역사적인 무게와 까다로운 문화적 의도가 숨어 있다. 그 의도란, “뒤샹의 존재감이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남아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뒤샹은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곳에서 예술을 새롭게 창조하고 이해하는 원초적인 근원이 되었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가령 남동아시아에서) 아이디어로서의 뒤샹, 존재로서의 뒤샹은 남동아시아에서 예술을 만들고 바라보는 데 널리 퍼져 있으며 결과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7] Lee Weng Choy, 「Metonym and Metaphor, Islands and Continents: Reflections on Curating Contemporary Art from Southeast Asia」, 『Charting Thoughts: Essays on Art in Southeast Asia』, p.346.
2024.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