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김정욱 개인전 《모든 것》 전시 서문
이상동몽
異床同夢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안 가져왔니?”
“뭘요, 샘?”
“정신머리”
“집에 두고 왔어요ㅠㅠ 어쩐지, 오늘도 허전하더라…”
나는 유물론자이다.
정신머리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정신의 근간도 물질 작용이란 이야기일 뿐. 사랑, 믿음, 배려, 기쁨, 정성 전부 중요하다 나에게도.
무신론자가 아니다.
운명도 업보도 인연도 내세도 부정하지 않는다. 행여 존재한다면 그것도 다 물질 작용이고 자연의 일부란 것. 신도 마찬가지이겠다.
‘초자연Supernature’은 없다.
얼마 전 끝난 이정근 작가의 개인전 제목이 SUPERNATURAL이다. 상식을 벗어난 속성을 강조하려 비유적으로 쓴 표현일 뿐이다. 초자연은 없다. 모든 것이 곧 자연이다. 규명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섞여 있다. 덜 규명되어 흐리거나 투명한 부위를 난 ‘신비’라 부른다.
김정욱, 한지에 먹, 130x 162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170x116.5cm, 2023
그러던 어느 날, 초자연적인 작가를 발견했다. 김정욱.
깊게 가라앉은 먹빛 바탕, 차분하면서 한편으로 굳고 단호한 표정의 인물들. 십여 년 전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난 이지적이고 명쾌하며 차갑고 논리적인 사람이리라 여겼다.
“마법 지팡이에요. 4개째 깎고 있어요.”
“아, 네…”
정 반대였다. 갖은 생각, 넘치는 호기심, 돋보이는 섬세함, 반짝이는 꿈 덩어리였다. 그리고 앞서 ‘신비’라 칭한 것들과 친하다. 신비? ‘까다 만 열매’ 같다. 어중간하고 찝찝하다. 알듯 말듯 미묘한 것들, 언급하고 지칭하고 용어화하기 애매한 것들 말이다. 그는 쉽게 품었다. 거처도 좌표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들에 정답다. 구술, 기술, 묘사하기 어색하고 모호한 것들에 기껍다.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하다, 설명한다는 사실에 ‘현타’가 오길 되풀이하는 그를 보며 알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것을 다룬다는 걸. 그리고 분명해졌다. 분명하지 못한 것을 만지는 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사명을 타고난 듯싶다.
‘신비’란 나에게 그저 ‘규명 전의 불신’을 포장하는 말이었다. 그에겐 ‘삼라만상의 속성’일 것이다. 신비로 가득한 일상. 신비에 상냥하기. 초자연을 인정하기.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미감은 아마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꿈은 꿈 대로 남겨둬’라는 가수 김종서의 노랫말이 문득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꽉 잡을 수 없는 게 심지어 또렷하면 약만 더 오를 것이다. 몽롱하고 아득한 맛이 있어야 함께 오래 가지. 돌이켜보면 난 ‘통제 밖 빈칸’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이제 좀 남겨둘 줄도 알아야겠다.
아무개 : “지원자 3번 아무개입니다. 저는 유기적인 예술을 추구합니다.”
나 : “어디가 ‘유기적’이죠? 무슨 의미예요?”
‘본질’, ‘관념’, ‘구조’ 등과 더불어 무분별하게 쓰이는 단어 ‘유기적’. 나는 이 말을 무척 경계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유기적이다. 생각보다 훨씬. 김정욱이 작업을 통해 확인하는 건 오직 그것이다. 오롯이 독야청청은 없다. 아무도 무관하지 않다[1]. 결국 우린 한 덩어리이다. 앞서 그 불안한 신비를 외면하지 못한 건, 나 역시 당사자이기 때문이리라. 전시 제목 《모든 것》에는 나도 모르게 내가 편입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작업은 나보다 빠르다”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세월이 지나 그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의 의미를. 어떤 감정이나 다짐, 소중한 가치는 때때로, 뭇 종교에서 논하는 무언가와 무척 비슷했다. 마치 성화나 탱화가 연상되는 형상과 형식은 그런 연유이자, 거부감 없는 경험 덕이다. 서로 외딴 생각이 어느새 이어진다. 관계없던 것들의 관계를 깨닫는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인다. 어두컴컴해도 희미한 실루엣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작업에 딱 들어맞는 과학 이론과 철학, 원리를 종종 마주한다. 그때 팔짱 끼며 다가오는 놀람과 기쁨, 그건 땅속의 맨틀 같은 작업 원동력이다. 알고 보면 예술은 첨단이다. 무엇보다 이르고 빠르다. 규명은 헐레벌떡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놀람과 보람도. 이런 ‘작업 유레카’는 주변을 보다 섬세하고 더듬고 의미를 탐색할 용기로 돌아온다.
김정욱, 세라믹, 24.5x16x20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33.5x 24.5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120x120cm, 2023
넘치는 에너지
따가운 시선
외면할 수 없는 열망
누구나 종종 목격한다. 물리적 차원 너머, 넓은 뜻의 에너지. 김정욱에게 생각과 말과 눈빛은 실체이며 유효한 힘이다. 힘은 작용이다. 의지, 염원, 끌림, 진심, 정성, 열정, 분노, 이해를 비롯, 보이지 않는 온갖 연과 선과 끈으로 세상은 종횡무진 얽히고설켜 무언가 주고받는다. 다만 눈에 보이는 건 극히 일부이다. 우리가 보는 건 그저, 셀 수 없이 교차하며 작용하는 와중 언뜻언뜻 비치는 실 전화기의 실루엣이나 그림자 같은 것. 종합하면 이번 개인전 전시장은 작품 감상의 장(hall)을 넘어, 이와 같은 갖은 힘이 동서남북 교차하는 일종의 장(field)이다.
게다가 모든 얽힘은 독창적이다. 어느 실 전화의 떨림에 영감을 받고, 어떻게 작업에 이르는가부터 이미 의미이다. 동기와 발단, 재료의 의미와 인상, 작업에 임하는 사연과 마음가짐, 그리고 실제 제작 과정은 모두 그 자체로 서로 다른 효과와 아우라를 지닌다. 도자를 굽길 거듭한다. 아무리 균일하게 빚고 칠해도 저마다 어딘가 늘 다르다. 막대한 시간이 듦에도 전개는 으레 예측 불가능하다. 도와주던 분이 돌아가시면 실 전화도 끊긴다. 그 작업, 다신 만날 수 없다. 겉보기에 비슷한 것은 흉내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얽힘을 달래고 간추리는 모든 여정이 곧 의미이고, 과정과 결과에 경계가 없다.
그런 중요한 것들이 의지를 아교 삼아 뭉친 결과물, 즉 작업은 운명이 저절로 함께한다. 보는 이의 호기심을 끌고, 질문을 부르고, 감정이 동하고, 피할 수 없는 교감을 일으킨다. 그렇지 못한 이들이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스치며 들러리를 선다. 관객의 다양성에 십분 기여하며 관람 풍경을 완성한다. 고민이 다르다 나와는. ‘어떻게 해야 관객이 일부라도 짐작하고 감지하고 공감할까, 이 소중한 스토리를?’ 유물론자이자 효과/결과주의자이자 인식론에 매몰된 나와는 얼핏 대척점에 자리한 듯하다.
이상의 인생 역정을 헤치며, 출산하듯 하나하나 힘겹게 낸 그의 작업은 얼핏 기괴하다. 종종 귀엽다고도 한다. 합쳐서 강렬하다. 양극단보다 강한 것이 바로 공존과 대비. ‘뻔한 것’은 덜 끌린다. 상반된(듯한) 속성이 공존 대비하며 오묘함을 띄는 것이야말로 힘을 지니는 가장 요긴한 길이다. 텅 비었으면서 몽땅 들어찬 먹색에 눈이 간다. 귀엽고 섬뜩해야 오래 새롭다. 상냥하면서 때론 상황에 걸맞은 강단이 있어야, 아이의 천진과 어른의 성숙을 아울러야 사람도 매력적이다. 리코더 소리, 귀여운 구름과 나무, 알록달록 울타리를 두른 모래밭에서 총알이 미간을 헤집으며 동네방네 피분수를 뿜은 덕에 《오징어 게임(2021)》은 시각적으로 강렬했다. 밝으면서 어둡고, 알 듯하면서 말 듯도 한 그의 작업도 강렬할 운명이다.
최근작은 그런 면에서 한층 김정욱스럽다. 대놓고 화면 가득 들어찬 얼굴, 부릅뜬 눈과 쏟아지는 광선(?), 더 풍부하고 더 강렬하면서 더 미묘하게 넓어진 표정 스펙트럼, 마구 뒤섞인 눈코입은 단번에 두 가지 생각을, 보는 이의 뇌리에 때려 박는다. ‘도무지 딱 짚을 수 없다’ 그리고 ‘확신이 넘친다’. 한마디로 신비롭고 단호하다. 매력이란 건 신비나 단호에서 나오지 않는다. 신비로운 가운데 오묘한 확신이 느껴지는 그 순간, 영역 교차와 이종의 접목, 그 지점의 시너지를 우린 매력이라 부른다. 그런 매력의 별 무더기를 화폭에 뿌리는 그의 이미지는, 작업실에 나뒹구는 깎다 만 마법 지팡이가 불현듯 떠오르는 이 순간엔 ‘마법사’에 사뭇 가깝다.
김정욱, 한지에 먹, 120x120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162x112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162x130.5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162x130cm, 2023
기실 ‘기괴하다’거나 ‘귀엽다’와 같은 감상에서 작업의 근원적인 속성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무모할 것이다. 다만 확실한 하나는, 앞서 신비를 향한 몸가짐, 초자연을 꿰뚫는 시선, 믿음과 합치하는 유기적인 화면 구성과 같은 작업 특성은, 미의 유형에 ‘독특’이 있음을 확언한다. 목표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겹치지 않기’. 전시 분위기는 얽힘의 장을 가득 채운 ‘독특’이란 미감이 우려낸 대추차 같은 것이며, 상반된 감상은 이를 맛본 관객의 감식안이 내지르는 일련의 탄성인 셈. 이 미감을 작업에 비치는 그의 태도(=과정)와 생각(=시선), 표현(=화면 구성) 삼면에 대입하면 그 박자가 꼭 들어맞는다. 독특하려 겉껍질을 요란히 분지르고 찢고 태우고 갖다 바르는 뭇 작가들이 ‘독특’보단 차라리 ‘관종’에 준하는 눈총을 받는 내막이 여기에 있다. 삼면이 아니라 달랑 일면만 갖춰서 나오니 그럴 수밖에. 겹쳐 있지만 무엇과도 겹치지 않는다? 모두가 공유한 x, y, z축에 자신만의 축 하나가 더 있어, 그 축의 방향으로 뒤틀려 있다는 이야기이다. 말로 못 해도 다들 감지한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다.
모두가 공유한 축이 자연이라면, 무엇과도 겹치지 않는 축은 곧 초자연적인 요소이다. 그 초자연의 축을 나는 규명해야 할 숙제처럼, 반면 김정욱은 응당 겸손히 인정할 신비로 (그리고 뒤늦게 규명될 때마다 “유레카!” 외치며 작업 원동력으로)여겼다. 그가 《모든 것》이라 명명한 자연과 초자연은 결국, 나의 규명된 그리고 규명할 자연의 합과 동치이다. 서로 딴 걸 보는 줄 알았건만, 알고 보니 우린 같은 꿈을 꿨던 셈이다. 이상동몽(異床同夢)이랄까?
김정욱, 한지에 먹, 채색, 90x160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채색, 162x130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채색, 꼴라주,125x162cm, 2023
[1] 무관하지 않은 정도론 사실 부족하고, 총체성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유기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글 한 편이 되기에 말을 아낀다.
2024.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3 김정욱 개인전 《모든 것》 전시 서문
이상동몽
異床同夢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안 가져왔니?”
“뭘요, 샘?”
“정신머리”
“집에 두고 왔어요ㅠㅠ 어쩐지, 오늘도 허전하더라…”
나는 유물론자이다.
정신머리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정신의 근간도 물질 작용이란 이야기일 뿐. 사랑, 믿음, 배려, 기쁨, 정성 전부 중요하다 나에게도.
무신론자가 아니다.
운명도 업보도 인연도 내세도 부정하지 않는다. 행여 존재한다면 그것도 다 물질 작용이고 자연의 일부란 것. 신도 마찬가지이겠다.
‘초자연Supernature’은 없다.
얼마 전 끝난 이정근 작가의 개인전 제목이 SUPERNATURAL이다. 상식을 벗어난 속성을 강조하려 비유적으로 쓴 표현일 뿐이다. 초자연은 없다. 모든 것이 곧 자연이다. 규명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섞여 있다. 덜 규명되어 흐리거나 투명한 부위를 난 ‘신비’라 부른다.
김정욱, 한지에 먹, 130x 162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170x116.5cm, 2023
그러던 어느 날, 초자연적인 작가를 발견했다. 김정욱.
깊게 가라앉은 먹빛 바탕, 차분하면서 한편으로 굳고 단호한 표정의 인물들. 십여 년 전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난 이지적이고 명쾌하며 차갑고 논리적인 사람이리라 여겼다.
“마법 지팡이에요. 4개째 깎고 있어요.”
“아, 네…”
정 반대였다. 갖은 생각, 넘치는 호기심, 돋보이는 섬세함, 반짝이는 꿈 덩어리였다. 그리고 앞서 ‘신비’라 칭한 것들과 친하다. 신비? ‘까다 만 열매’ 같다. 어중간하고 찝찝하다. 알듯 말듯 미묘한 것들, 언급하고 지칭하고 용어화하기 애매한 것들 말이다. 그는 쉽게 품었다. 거처도 좌표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들에 정답다. 구술, 기술, 묘사하기 어색하고 모호한 것들에 기껍다.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하다, 설명한다는 사실에 ‘현타’가 오길 되풀이하는 그를 보며 알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것을 다룬다는 걸. 그리고 분명해졌다. 분명하지 못한 것을 만지는 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사명을 타고난 듯싶다.
‘신비’란 나에게 그저 ‘규명 전의 불신’을 포장하는 말이었다. 그에겐 ‘삼라만상의 속성’일 것이다. 신비로 가득한 일상. 신비에 상냥하기. 초자연을 인정하기.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미감은 아마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꿈은 꿈 대로 남겨둬’라는 가수 김종서의 노랫말이 문득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꽉 잡을 수 없는 게 심지어 또렷하면 약만 더 오를 것이다. 몽롱하고 아득한 맛이 있어야 함께 오래 가지. 돌이켜보면 난 ‘통제 밖 빈칸’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이제 좀 남겨둘 줄도 알아야겠다.
아무개 : “지원자 3번 아무개입니다. 저는 유기적인 예술을 추구합니다.”
나 : “어디가 ‘유기적’이죠? 무슨 의미예요?”
‘본질’, ‘관념’, ‘구조’ 등과 더불어 무분별하게 쓰이는 단어 ‘유기적’. 나는 이 말을 무척 경계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유기적이다. 생각보다 훨씬. 김정욱이 작업을 통해 확인하는 건 오직 그것이다. 오롯이 독야청청은 없다. 아무도 무관하지 않다[1]. 결국 우린 한 덩어리이다. 앞서 그 불안한 신비를 외면하지 못한 건, 나 역시 당사자이기 때문이리라. 전시 제목 《모든 것》에는 나도 모르게 내가 편입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작업은 나보다 빠르다”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세월이 지나 그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의 의미를. 어떤 감정이나 다짐, 소중한 가치는 때때로, 뭇 종교에서 논하는 무언가와 무척 비슷했다. 마치 성화나 탱화가 연상되는 형상과 형식은 그런 연유이자, 거부감 없는 경험 덕이다. 서로 외딴 생각이 어느새 이어진다. 관계없던 것들의 관계를 깨닫는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인다. 어두컴컴해도 희미한 실루엣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작업에 딱 들어맞는 과학 이론과 철학, 원리를 종종 마주한다. 그때 팔짱 끼며 다가오는 놀람과 기쁨, 그건 땅속의 맨틀 같은 작업 원동력이다. 알고 보면 예술은 첨단이다. 무엇보다 이르고 빠르다. 규명은 헐레벌떡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놀람과 보람도. 이런 ‘작업 유레카’는 주변을 보다 섬세하고 더듬고 의미를 탐색할 용기로 돌아온다.
김정욱, 세라믹, 24.5x16x20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33.5x 24.5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120x120cm, 2023
넘치는 에너지
따가운 시선
외면할 수 없는 열망
누구나 종종 목격한다. 물리적 차원 너머, 넓은 뜻의 에너지. 김정욱에게 생각과 말과 눈빛은 실체이며 유효한 힘이다. 힘은 작용이다. 의지, 염원, 끌림, 진심, 정성, 열정, 분노, 이해를 비롯, 보이지 않는 온갖 연과 선과 끈으로 세상은 종횡무진 얽히고설켜 무언가 주고받는다. 다만 눈에 보이는 건 극히 일부이다. 우리가 보는 건 그저, 셀 수 없이 교차하며 작용하는 와중 언뜻언뜻 비치는 실 전화기의 실루엣이나 그림자 같은 것. 종합하면 이번 개인전 전시장은 작품 감상의 장(hall)을 넘어, 이와 같은 갖은 힘이 동서남북 교차하는 일종의 장(field)이다.
게다가 모든 얽힘은 독창적이다. 어느 실 전화의 떨림에 영감을 받고, 어떻게 작업에 이르는가부터 이미 의미이다. 동기와 발단, 재료의 의미와 인상, 작업에 임하는 사연과 마음가짐, 그리고 실제 제작 과정은 모두 그 자체로 서로 다른 효과와 아우라를 지닌다. 도자를 굽길 거듭한다. 아무리 균일하게 빚고 칠해도 저마다 어딘가 늘 다르다. 막대한 시간이 듦에도 전개는 으레 예측 불가능하다. 도와주던 분이 돌아가시면 실 전화도 끊긴다. 그 작업, 다신 만날 수 없다. 겉보기에 비슷한 것은 흉내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얽힘을 달래고 간추리는 모든 여정이 곧 의미이고, 과정과 결과에 경계가 없다.
그런 중요한 것들이 의지를 아교 삼아 뭉친 결과물, 즉 작업은 운명이 저절로 함께한다. 보는 이의 호기심을 끌고, 질문을 부르고, 감정이 동하고, 피할 수 없는 교감을 일으킨다. 그렇지 못한 이들이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스치며 들러리를 선다. 관객의 다양성에 십분 기여하며 관람 풍경을 완성한다. 고민이 다르다 나와는. ‘어떻게 해야 관객이 일부라도 짐작하고 감지하고 공감할까, 이 소중한 스토리를?’ 유물론자이자 효과/결과주의자이자 인식론에 매몰된 나와는 얼핏 대척점에 자리한 듯하다.
이상의 인생 역정을 헤치며, 출산하듯 하나하나 힘겹게 낸 그의 작업은 얼핏 기괴하다. 종종 귀엽다고도 한다. 합쳐서 강렬하다. 양극단보다 강한 것이 바로 공존과 대비. ‘뻔한 것’은 덜 끌린다. 상반된(듯한) 속성이 공존 대비하며 오묘함을 띄는 것이야말로 힘을 지니는 가장 요긴한 길이다. 텅 비었으면서 몽땅 들어찬 먹색에 눈이 간다. 귀엽고 섬뜩해야 오래 새롭다. 상냥하면서 때론 상황에 걸맞은 강단이 있어야, 아이의 천진과 어른의 성숙을 아울러야 사람도 매력적이다. 리코더 소리, 귀여운 구름과 나무, 알록달록 울타리를 두른 모래밭에서 총알이 미간을 헤집으며 동네방네 피분수를 뿜은 덕에 《오징어 게임(2021)》은 시각적으로 강렬했다. 밝으면서 어둡고, 알 듯하면서 말 듯도 한 그의 작업도 강렬할 운명이다.
최근작은 그런 면에서 한층 김정욱스럽다. 대놓고 화면 가득 들어찬 얼굴, 부릅뜬 눈과 쏟아지는 광선(?), 더 풍부하고 더 강렬하면서 더 미묘하게 넓어진 표정 스펙트럼, 마구 뒤섞인 눈코입은 단번에 두 가지 생각을, 보는 이의 뇌리에 때려 박는다. ‘도무지 딱 짚을 수 없다’ 그리고 ‘확신이 넘친다’. 한마디로 신비롭고 단호하다. 매력이란 건 신비나 단호에서 나오지 않는다. 신비로운 가운데 오묘한 확신이 느껴지는 그 순간, 영역 교차와 이종의 접목, 그 지점의 시너지를 우린 매력이라 부른다. 그런 매력의 별 무더기를 화폭에 뿌리는 그의 이미지는, 작업실에 나뒹구는 깎다 만 마법 지팡이가 불현듯 떠오르는 이 순간엔 ‘마법사’에 사뭇 가깝다.
김정욱, 한지에 먹, 120x120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162x112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162x130.5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162x130cm, 2023
기실 ‘기괴하다’거나 ‘귀엽다’와 같은 감상에서 작업의 근원적인 속성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무모할 것이다. 다만 확실한 하나는, 앞서 신비를 향한 몸가짐, 초자연을 꿰뚫는 시선, 믿음과 합치하는 유기적인 화면 구성과 같은 작업 특성은, 미의 유형에 ‘독특’이 있음을 확언한다. 목표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겹치지 않기’. 전시 분위기는 얽힘의 장을 가득 채운 ‘독특’이란 미감이 우려낸 대추차 같은 것이며, 상반된 감상은 이를 맛본 관객의 감식안이 내지르는 일련의 탄성인 셈. 이 미감을 작업에 비치는 그의 태도(=과정)와 생각(=시선), 표현(=화면 구성) 삼면에 대입하면 그 박자가 꼭 들어맞는다. 독특하려 겉껍질을 요란히 분지르고 찢고 태우고 갖다 바르는 뭇 작가들이 ‘독특’보단 차라리 ‘관종’에 준하는 눈총을 받는 내막이 여기에 있다. 삼면이 아니라 달랑 일면만 갖춰서 나오니 그럴 수밖에. 겹쳐 있지만 무엇과도 겹치지 않는다? 모두가 공유한 x, y, z축에 자신만의 축 하나가 더 있어, 그 축의 방향으로 뒤틀려 있다는 이야기이다. 말로 못 해도 다들 감지한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다.
모두가 공유한 축이 자연이라면, 무엇과도 겹치지 않는 축은 곧 초자연적인 요소이다. 그 초자연의 축을 나는 규명해야 할 숙제처럼, 반면 김정욱은 응당 겸손히 인정할 신비로 (그리고 뒤늦게 규명될 때마다 “유레카!” 외치며 작업 원동력으로)여겼다. 그가 《모든 것》이라 명명한 자연과 초자연은 결국, 나의 규명된 그리고 규명할 자연의 합과 동치이다. 서로 딴 걸 보는 줄 알았건만, 알고 보니 우린 같은 꿈을 꿨던 셈이다. 이상동몽(異床同夢)이랄까?
김정욱, 한지에 먹, 채색, 90x160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채색, 162x130cm, 2023
김정욱, 한지에 먹, 채색, 꼴라주,125x162cm, 2023
[1] 무관하지 않은 정도론 사실 부족하고, 총체성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유기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글 한 편이 되기에 말을 아낀다.
2024.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anuary.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