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에 젖은 작가를 위한 자문서
안건 : 황지윤 작가 작품 훼손 사건
자문 :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본인은 13년째 미술관에 재직 중인 미술기획자입니다. 관내외 각종 전시 기획 이외에도 레지던시, 작가 교류 프로그램, 작품 소장/연구/관리 등 학예업무 전반을 총괄해 왔습니다. 관외 활동(평론, 강의, 심사, 자문 등)에 대해서는 따로 기술하지 않겠습니다.
미술관에는 전시장만 있는 게 아닙니다. 각종 프로그램이나 교육 콘텐츠를 진행하는 교육관, 행사를 진행하는 강당, 자료를 아카이빙하는 자료실, 학예연구를 비롯한 각종 업무를 보는 학예실, 그리고 미술관의 가장 큰 특징이자 경쟁력의 하나인 소장 작품을 보관하는 수장고도 있지요. 저희 미술관에도 자체 수장고만 3개를 운영합니다. 입고작품은 이중구조 조습패널 벽체와 스테인레스제 랙, 항온항습으로 24시간 보호합니다. 항온항습기 설치와 가동, 유지보수에는 막대한 비용이 지속적으로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작품 상태와 가치의 보존 보호를 위해 투자 관리합니다. 반기마다 박스 포장을 풀고 야외에서 통풍을 시켜주고 표면을 검사합니다. 물에 젖으면 대충 닦아 써도 문제없다면, 여태껏 돈을 허공에 태운 셈이겠지요?
미술작품은 그 민감성에 대응해, 실제 전시장에서도 컨디션 관리 기준이 대단히 섬세하고 까다롭습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모든 전시장은 모든 전시 작품의 컨디션 체크(육안, 사진, 영상 등)를 매일 시행합니다. 굉장히 번거롭고 시간과 수고가 드는 일이지요. 습도에 따른 균열 크기의 변화나 표면의 흠집 성장 여부까지 세심히 견주어야 합니다. 일례로 무광 벨벳 재질 마감의 작업에, 반입 설치때와 다른 방향의 손자국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안경닦이 극세사 천 아시지요? 비슷합니다. 반대쪽으로 쓸어주면 자국이 사라지겠지요. 보험사에서도 손상으로 인정해 보험처리했습니다. 철제 원통을 쌓은 작업을 관객이 쓰러뜨려 전손에 준하는 보험처리를 한 적도 있어요. 찌그러진 양철 캔 펴듯 펴서 다시 쓸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산에 젖어 본 적 있으세요? 비에 젖지 않으려고 쓰는 우산에 말입니다. 황지윤 작가는 여태껏 작업한 그림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그림을 이고 사방이 트인 논밭으로 뛰어나가 폭풍우를 뒤집어쓴 게 아닙니다. 가장 안전해야 할, 가장 포근하고 가장 신뢰할 공간인 자신의 아파트에 애지중지 고이 모셔 둔 작품에 물이 쏟아졌죠. 비현실적인 현실이란 이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업 위로 스프링클러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들이치고, 햇볕 눈부신 창밖과, 무릎까지 차오른 구정물에 비친 일그러진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는 작가의 모습이요. 그래서 최근 그의 개인전 제목이 “신세계”입니다. 백화점 이름보다, 영화 제목보다 안성맞춤이죠?
황지윤 Wet1 116x89cm 캔버스에 과슈 목탄 2023
황지윤 Wet2 53x45.5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3 53x45.5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4 53x45.5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5 53x45.5 캔버스에 과슈 2023
우산이나 비옷이 작품이어도, 실제로 물을 들이붓거나 비를 맞히진 않습니다. 그런 상황을 작가의 의도에 포함해 설계하지 않는 한 말이죠. 작가들은 때때로, 기성품을 차용해 새로운 맥락에 가져다 놓을 때 발생하는 의미적 괴리를 활용하곤 합니다. 일명 ‘레디 메이드(ready-made)라고 불러요. 기성품 우산이나 비옷을 작품에 활용했다 하여 물을 뿌려도 괜찮은 게 아닙니다. 우산이나 비옷의 의미를 차용한 것이지, 그 기능성 증명을 위해 산업안전인증시험을 시행하고 등급을 부여하는 게 아니니까요. 설령 물을 뿌리는 상황을 의도한다 해도, 그건 작가가 결정하는 것이지, 옆에서 ‘별 문제없겠네? 괜찮지 뭐~’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물며 애초 물과 상극인 매체를 장기간 사용한 작업들을 앞에서는 제논이나 프로타고라스가 살아 돌아와도 재론의 여지조차 없겠죠. ‘얼마나 괜찮은가’를 따지는 행위조차 글로벌한 웃음거리로 전락하기 딱 좋은 촌극입니다. 주문한 화장지를 한강물에 푹 적셔 갖다 드리면 “사은품으로 물티슈까지?! 흠흠 뭘 이런 걸 다…”하며 즐겁게 쓰실 분이 있나요? 말려서 쓰면 된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건지 제법 흥미롭습니다.
황지윤 Wet6 53x45.5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7 53x40.9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9 40.9x53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10 53x40.9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11 53x40.9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작가는 베이스 재료로 종이, 천, 나무, 쇠못(타카)을 사용합니다. 물감이 지용성(유지oil계열의 용매medium와 섞어 쓰도록 제작한 안료)인 것과 ‘방수’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물감 또한 대단히 민감한 재료로 보관 온도와 습도는 물론, 기간 제약도 커서 미술가들은 작품에 붓질 한 번을 하기 전에도 항상 물감의 상태를 테스트합니다. 현재 피해를 입은 작품들은 실물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사실상 상실했다 보아도 좋습니다. 상태는 계속해서 안 좋아집니다. 집에 잠깐 누수가 되어도 그 부분을 완전히 복구할 수 없는데, 건축 자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게 예민한 재료로 섬세하게 만진 작업물이 어떻게 될는지는, 80억 인구 누구든 예상(그리고 필요에 따라 양심을 팔며 선택적 외면) 가능합니다. 판매할 수 없죠. 사무실이나, 건물 로비나, 자택 응접실에 곰팡이 디퓨저를 걸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수장고에 들어가면 더욱 볼만하겠죠? 옆, 그리고 또 그 옆의 작품들을 점차 오염시켜 나갈 것이고 종내엔 거대한 곰팡이 석실을 이뤄 미생물학자들의 군침이 마르지 않을 예정입니다. 훼손된 작품을 이 작가의 대표작이랍시고 전시할 수 없으니, 10년을 허송세월한 셈입니다. 포트폴리오가 다 날아갔죠. 종합하면, 재화로서의 가치와 작가적 자산 모두를 탈취당한 상황입니다.
그는 83년생이고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본격적인 동시대 미술씬 데뷔 이후 이미 10여년을 꾸준히 활동해 온 중견급 작가입니다. 한창 창작과 전시에 전념하고 활약을 이어 점차 대형 작가로 성장할 기로에 서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이 시점에, 이런 예상치 못한 일방적, 장기적, 치명적인 피해는 그저 일시적인 휘청임을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루하루 기회를 잃고 있는 중이죠. 어제도 오늘도 잃었고 내일도 더 잃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발목을 절단하고 두 눈을 뺏기는 정도의 치명상이라 해도 약소하죠. 그만큼 한국 미술씬도 좋은 작가를 잃고 퇴보하는 꼴이지요. 물세례는 아파트 1층이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에 쏟아진 겁니다.
2024. 2. 11.
2024.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우산에 젖은 작가를 위한 자문서
안건 : 황지윤 작가 작품 훼손 사건
자문 :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본인은 13년째 미술관에 재직 중인 미술기획자입니다. 관내외 각종 전시 기획 이외에도 레지던시, 작가 교류 프로그램, 작품 소장/연구/관리 등 학예업무 전반을 총괄해 왔습니다. 관외 활동(평론, 강의, 심사, 자문 등)에 대해서는 따로 기술하지 않겠습니다.
미술관에는 전시장만 있는 게 아닙니다. 각종 프로그램이나 교육 콘텐츠를 진행하는 교육관, 행사를 진행하는 강당, 자료를 아카이빙하는 자료실, 학예연구를 비롯한 각종 업무를 보는 학예실, 그리고 미술관의 가장 큰 특징이자 경쟁력의 하나인 소장 작품을 보관하는 수장고도 있지요. 저희 미술관에도 자체 수장고만 3개를 운영합니다. 입고작품은 이중구조 조습패널 벽체와 스테인레스제 랙, 항온항습으로 24시간 보호합니다. 항온항습기 설치와 가동, 유지보수에는 막대한 비용이 지속적으로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작품 상태와 가치의 보존 보호를 위해 투자 관리합니다. 반기마다 박스 포장을 풀고 야외에서 통풍을 시켜주고 표면을 검사합니다. 물에 젖으면 대충 닦아 써도 문제없다면, 여태껏 돈을 허공에 태운 셈이겠지요?
미술작품은 그 민감성에 대응해, 실제 전시장에서도 컨디션 관리 기준이 대단히 섬세하고 까다롭습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모든 전시장은 모든 전시 작품의 컨디션 체크(육안, 사진, 영상 등)를 매일 시행합니다. 굉장히 번거롭고 시간과 수고가 드는 일이지요. 습도에 따른 균열 크기의 변화나 표면의 흠집 성장 여부까지 세심히 견주어야 합니다. 일례로 무광 벨벳 재질 마감의 작업에, 반입 설치때와 다른 방향의 손자국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안경닦이 극세사 천 아시지요? 비슷합니다. 반대쪽으로 쓸어주면 자국이 사라지겠지요. 보험사에서도 손상으로 인정해 보험처리했습니다. 철제 원통을 쌓은 작업을 관객이 쓰러뜨려 전손에 준하는 보험처리를 한 적도 있어요. 찌그러진 양철 캔 펴듯 펴서 다시 쓸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산에 젖어 본 적 있으세요? 비에 젖지 않으려고 쓰는 우산에 말입니다. 황지윤 작가는 여태껏 작업한 그림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그림을 이고 사방이 트인 논밭으로 뛰어나가 폭풍우를 뒤집어쓴 게 아닙니다. 가장 안전해야 할, 가장 포근하고 가장 신뢰할 공간인 자신의 아파트에 애지중지 고이 모셔 둔 작품에 물이 쏟아졌죠. 비현실적인 현실이란 이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업 위로 스프링클러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들이치고, 햇볕 눈부신 창밖과, 무릎까지 차오른 구정물에 비친 일그러진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는 작가의 모습이요. 그래서 최근 그의 개인전 제목이 “신세계”입니다. 백화점 이름보다, 영화 제목보다 안성맞춤이죠?
황지윤 Wet1 116x89cm 캔버스에 과슈 목탄 2023
황지윤 Wet2 53x45.5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3 53x45.5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4 53x45.5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5 53x45.5 캔버스에 과슈 2023
우산이나 비옷이 작품이어도, 실제로 물을 들이붓거나 비를 맞히진 않습니다. 그런 상황을 작가의 의도에 포함해 설계하지 않는 한 말이죠. 작가들은 때때로, 기성품을 차용해 새로운 맥락에 가져다 놓을 때 발생하는 의미적 괴리를 활용하곤 합니다. 일명 ‘레디 메이드(ready-made)라고 불러요. 기성품 우산이나 비옷을 작품에 활용했다 하여 물을 뿌려도 괜찮은 게 아닙니다. 우산이나 비옷의 의미를 차용한 것이지, 그 기능성 증명을 위해 산업안전인증시험을 시행하고 등급을 부여하는 게 아니니까요. 설령 물을 뿌리는 상황을 의도한다 해도, 그건 작가가 결정하는 것이지, 옆에서 ‘별 문제없겠네? 괜찮지 뭐~’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물며 애초 물과 상극인 매체를 장기간 사용한 작업들을 앞에서는 제논이나 프로타고라스가 살아 돌아와도 재론의 여지조차 없겠죠. ‘얼마나 괜찮은가’를 따지는 행위조차 글로벌한 웃음거리로 전락하기 딱 좋은 촌극입니다. 주문한 화장지를 한강물에 푹 적셔 갖다 드리면 “사은품으로 물티슈까지?! 흠흠 뭘 이런 걸 다…”하며 즐겁게 쓰실 분이 있나요? 말려서 쓰면 된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건지 제법 흥미롭습니다.
황지윤 Wet6 53x45.5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7 53x40.9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9 40.9x53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10 53x40.9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Wet11 53x40.9 캔버스에 과슈 2023
황지윤 작가는 베이스 재료로 종이, 천, 나무, 쇠못(타카)을 사용합니다. 물감이 지용성(유지oil계열의 용매medium와 섞어 쓰도록 제작한 안료)인 것과 ‘방수’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물감 또한 대단히 민감한 재료로 보관 온도와 습도는 물론, 기간 제약도 커서 미술가들은 작품에 붓질 한 번을 하기 전에도 항상 물감의 상태를 테스트합니다. 현재 피해를 입은 작품들은 실물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사실상 상실했다 보아도 좋습니다. 상태는 계속해서 안 좋아집니다. 집에 잠깐 누수가 되어도 그 부분을 완전히 복구할 수 없는데, 건축 자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게 예민한 재료로 섬세하게 만진 작업물이 어떻게 될는지는, 80억 인구 누구든 예상(그리고 필요에 따라 양심을 팔며 선택적 외면) 가능합니다. 판매할 수 없죠. 사무실이나, 건물 로비나, 자택 응접실에 곰팡이 디퓨저를 걸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수장고에 들어가면 더욱 볼만하겠죠? 옆, 그리고 또 그 옆의 작품들을 점차 오염시켜 나갈 것이고 종내엔 거대한 곰팡이 석실을 이뤄 미생물학자들의 군침이 마르지 않을 예정입니다. 훼손된 작품을 이 작가의 대표작이랍시고 전시할 수 없으니, 10년을 허송세월한 셈입니다. 포트폴리오가 다 날아갔죠. 종합하면, 재화로서의 가치와 작가적 자산 모두를 탈취당한 상황입니다.
그는 83년생이고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본격적인 동시대 미술씬 데뷔 이후 이미 10여년을 꾸준히 활동해 온 중견급 작가입니다. 한창 창작과 전시에 전념하고 활약을 이어 점차 대형 작가로 성장할 기로에 서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이 시점에, 이런 예상치 못한 일방적, 장기적, 치명적인 피해는 그저 일시적인 휘청임을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루하루 기회를 잃고 있는 중이죠. 어제도 오늘도 잃었고 내일도 더 잃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발목을 절단하고 두 눈을 뺏기는 정도의 치명상이라 해도 약소하죠. 그만큼 한국 미술씬도 좋은 작가를 잃고 퇴보하는 꼴이지요. 물세례는 아파트 1층이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에 쏟아진 겁니다.
2024. 2. 11.
2024.3.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rch.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