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이규선 개인전 《회사원 이씨》
자화상(自畵像)? 자화상(自話像)!!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2023년 11월 29일 마지막 임무_oil on canvas259x197cm_2023
범상치 않은 형제들 틈에서도 홱! 눈길을 잡아채는 그림이 하나 있다. 〈2023년 11월 19일, 마지막 임무〉는 창작이란 신성한 행위의 한 점 증거이며, 전시 준비의 마침표 같은 그림이다. 욕심과 의무감에 얼룩진, 캔버스와의 싸움 한판을 매조지는 ‘기념 샷’이다. 그야말로 홀가분한 그림이다.
잘하는 방법? …잘하려 들지 않기!
그때 난 이 말을 곱씹었다. 별다른 각오도 없었는데, 하다 보니 ‘무심코 근사할 때’가 있다. 출품작 가운데 단연 ‘내려놓은’ 그림, 붓질의 쾌락과 유희에 순응한 그림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절충과 균형이 절묘하다.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마침내 홀랑 벗고 묵묵히 물감을 씻는 나체의 작가. 엉거주춤, 차렷도 한껏 짝다리도 아니다. 샤워헤드를 비집고 물감 묻은 손을 들이받는 물줄기의 하찮은 수압이 괜히 머쓱하다. 가끔 보름달 닮은 오렌지색 전등, 칠이 다 나간 싸구려 손잡이가 덜렁이는 거무튀튀한 나무 문짝, 소용돌이치는 붓질 몇 번에 일필휘지 쓸데없이 멋있게 마감한 변기, 닦지 않아도 보는 덴 지장 없는 낡은 거울이, 초보 보디빌더들처럼 엉성한 자태를 제각기 뽐낸다. 희멀건 벽 타일, 자줏빛이 사뭇 과감한데 역시나 촌스러운 바닥 타일도 하품 삼킨 훈련병처럼 어영부영 줄지어 선다. 가지런하지도, 들쑥날쑥 답 없는 오합지졸도 아니다. 데면데면한 와중에 또 비슷한 쪽을 바라본다. 다 모으면 소실점까진 아니고 대충 소실’면’쯤 될까? 방향과 갈피와 가닥만 두루뭉술 잡아 둔 공간 설정에, 빨려드는 듯한 화면이 그리 작위적이거나 피곤하지 않다. 번듯한 묘사도 군데군데 밀고 날린 나이프 자국도 얼추 서로 죽이 맞다. 강렬하고 과감한 색상도 희멀건 회색 톤의 눈치를 보며 못이긴 척 슬며시 어우러진다. 머뭇대지도 저돌적이지도, 다 감추지도 몽땅 까발리지도, 점잔 빼지도 경망스럽지도 않은, 알맞고 걸맞고 딱 맞은 이 중간적 어조에 새삼 ‘적당’, ‘적절’, ‘적합’의 의미를 되새긴다.
조형이든 내용이든, ‘양면성’은 매력의 근원이다. 이 점에서 이규선은 곡예사라 부를 만하다. 형태를 잡다 풀고, 찍다 (나이프로)밀고, 모으다 흩뜨리기를 거듭하며 아찔한 균형을 줄 타듯 즐긴다. 손 가는 대로 막 밀 수 없다. 다시 그려 넣으면 탁하고 부자연스럽다. 스텝을 되밟으면 이미지에 갇힌다. 어떤 결과에 닿는 길은, 정확히 규명할 수 없다. 그 순간 그렇게 해야 간신히 만나는 특이점이 있다. 다시 스치지 못할 이성의 연락처를 따듯, 번뜩이는 결단이 중요하다. 이 조율이 바로 감각이고 재능이다. 사소한 기술이 아니라 이미지의 매력이 갈린다. 가늠이 서툴면 퇴짜 맞듯 매력이 반감한다. 때문에 작가 모드를 켜면, 극도의 집중으로 예리한 리듬을 지키려 애쓴다. 디지털 작업처럼 ‘Undo/Redo’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웠을 듯싶다. 그렇게, 될 때까지 길들인, 제어에 성공한 우연을 필연처럼 모은다. 이런 섬세하고 오묘한 줄타기가 잘 도드라지는 형식이 바로 회화이다. 회화여야 하는 이유가 참 명확한 작가랄까.
줄타기는 서사에도 여전하다. 회사원과 미술 작가, 생업과 작업, 구명과 사명 사이에서 고뇌와 즐거움이 뒤얽힌 줄타기를 즐긴다. 타이틀 이미지 〈직면 된 자화상〉은 회사와 작업실을 오가며 삶의 각도와 걸음걸이를 가다듬는 모습이다. ‘그래도 안 넘어지고 한 계단 더 올랐구나’ 외롭고 불안한 길을 걷는 스스로를 향한 대견과 연민이 뒤섞인 양가적 시선이 돋보인다.
진지함과 유쾌함을 넘나드는 작품 조합도 이 균형에 지분이 좀 있다. 가끔은 벼랑 끝에서 건곤일척 운명과 결판이라도 낼 듯 비장하다. 때론 일 끝나고 막걸리 한잔 걸친 시장통 아재처럼 편안하다.
창작에 임하는 각오도 사인 곡선처럼 진동한다. 캔버스라는 물적 전제와 회화라는 형식 전제에 스스로를 옭아맬 때와 전시 준비를 마치며 기념하듯 홀가분하게 나를 박제할 때의 붓질은 다르다. 그 틈새에서 솟은 뜻밖의 시너지에 작가 자신도 종종 놀란다. ‘이런 리듬도 괜찮은 거구나’, ‘그것도 나구나’. 의도를 새기고 지우는 자기 컨트롤이야말로 훌륭한 작업 요령임을 깨닫는다고.
결국 그림이든 작업 태도이든, 비장함 속에 즐길 게 있으면 된다. 핵심은 균형이다. 균형 있는 작업 모둠을 내보일 수 있어야 매력적이고, 없던 깊이도 생겨 길게 간다. ‘줄타기’와 ‘붓 잘 놓기’는 작가 대부분, 특히 회화 작가에게는 평생의 동반자 같은 고민이다. 현업 작가 레벨에서의 ‘잘 그린다’는 사실 그걸 잘 한다는 이야기이다.
막걸리아저씨_oil on tela_21x29.7cm_2023
신작_oil on canvas_582x259cm_2022
현대미술을 억지로 한 문장으로 줄이면 ‘겹치지 않기 배틀’이다. 희고 큰 벽에, 자기 이름을 자신의 색상과 필체로 휘갈긴다. 처음엔 쉽다. 아무 데나 쓰면 되니까. 여백은 줄어만 가고 점차 쓸 곳이 마땅찮다. 끄트머리 살짝 겹치는 건 도리 없다. 글씨는 점점 작아지고, 겹칠 확률은 자꾸 오른다. 동시대 미술가들이 이름 쓸 남은 칸은 이제 밤하늘의 별처럼 드문드문 점 몇 개쯤 된다. 가장 원시적이며 기초적인 형식인 회화는 이 배틀의 극한이다. 참신한 전략은 50년 전 선배들이 써먹었고, 쓸만한 레파토리는 100년 전 선배들이 해먹었다. 회화의 간명한 형식성은 조밀한 선점을 오히려 부추기는 셈. 반면 후발주자에겐 한층 가혹한 참신을 청구한다.
그런데, 다양성을 가장한 불확실성이 지붕을 뚫는 동시대 미술씬에선 참신과 매력으로도 부족하다. 금방 익숙해지고 질리고 잊히고 버려진다. 작가 생활을 꿰는 축으로 쭉 이어갈 만한 아이템이 필요하다. 이목을 끄는 건 물론, 파생성, 확장성이 좋아야 한다. 이런저런 색다른 게 자꾸 나와 익숙함을 유보하고, 그래서 늘 새롭고 볼만하고, 결과적으로 안주하지 않으면서도 작가 정체성은 유지해야 하는 것. ‘전업 작가로서 롱런 가능성이 얼마쯤인가’는 사실 대부분의 심사나 평가의 제1 척도이다. 그런 만큼 평생 만나기 어렵고, 행여나 자기만의 아이템을 발굴했다면 작가로서 정말 ‘땡’ 잡은 것. 자화상은 각자 다르고 늘 변하므로, 이 관점에서 훌륭하다. 또한 그 탓에 보편적이다 못해 고전적인 아이템이다. 그야말로 양날의 검.
이규선 개인전 '회사원 이씨'_청주창작스튜디오_2023
직면된 자화상_oil on canvas_162.2x130.3cm_2023
출근길_oil on canvas_259x197cm_2023
공사판에서 이규선은 자신을 미술 작가라고 소개한다. 작가들 앞에선 돌 나르고 삽 푸는 ‘노가다꾼’이다. 나머지 반쪽을 꺼내는 것이다. 돌이랑 삽은 이미 들었으니 작가라고 하고, 스튜디오에서 이미 다들 붓 들었으니, 곁에 없는 돌과 삽을 말하는 것. 자신을 축 삼은 이 판 저 판을 종합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바로 이규선의 자화상이다. 몸의 형태 말고.
여느 작가와 마찬가지로, 시작은 평범한 셀프 아카이빙이다. 그런데 ‘나’는 얼굴에만 드러나는 게 아니었다. 화장실 거울, 자동차 룸미러, 거리의 쇼윈도, 핸드폰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는 형상을 또 담자니 멀미가 났다. 몽타주나 개인정보 수집, Face ID 딥러닝이 목적이 아니니까. 문득 사회인이자 예술가를 표방하는 어느 인간의 입체적 이면을 훔치고 싶었다. 유레카! ‘나만 욱여넣을 게 아니라, 나를 포함하면 돼’ 자화상의 시선과 마음가짐으로 더 큰 걸 훔치기 시작한다. 자신을 둘러싼 이런저런 껍질들을, 내 모습(自畵) 대신 내 이야기(自話)를 그린(像)다. ‘나는 자화상을 그리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따금 드는 의심과 흥미는 비례했다.
때문에 그저 자화상에 골몰하거나, 그게 볼거리의 전부인 작업이 아니다. 방방곡곡 자화상의 요소는 작품끼리 이어주는 회로 배역이다. 자화상은 내용 중 하나이면서 또한 강력한 형식인 셈. 내 이미지를 넉넉히 가다듬은 다음엔, 나를 잠시 접어두고, 나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처한 상황, 고민, 나를 만드는 시간을 뭉친다. 자화상을 빙자해 시선과 발자취를 심는다. 자화상을 만난 공간을 펴고, 자화상을 대신할 인생 기념비를 화면에 세운다. ‘무엇 무엇이 나를 그리는지’를 그린다. 그는 “지울수록 더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자신을 흐리면 주변이 또렷해진다. 그렇다고 돌연 다 내던지고 나를 흐리면 감흥은커녕 그저 뜬금없을 것이다. 그의 ‘자화상(自畵像) 아닌 자화상(自話像)’이 억지스럽지 않은 비결은 결국, 자신의 위치를 힘주어 찍고 점차 나선형으로 주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매우 멀리 왔지만, 나선형의 중심 언저리에 여전히 내가 있다. 그렇게 알아버렸다. 능숙하게 벗어나는 방법을.
2024.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3 이규선 개인전 《회사원 이씨》
자화상(自畵像)? 자화상(自話像)!!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2023년 11월 29일 마지막 임무_oil on canvas259x197cm_2023
범상치 않은 형제들 틈에서도 홱! 눈길을 잡아채는 그림이 하나 있다. 〈2023년 11월 19일, 마지막 임무〉는 창작이란 신성한 행위의 한 점 증거이며, 전시 준비의 마침표 같은 그림이다. 욕심과 의무감에 얼룩진, 캔버스와의 싸움 한판을 매조지는 ‘기념 샷’이다. 그야말로 홀가분한 그림이다.
잘하는 방법? …잘하려 들지 않기!
그때 난 이 말을 곱씹었다. 별다른 각오도 없었는데, 하다 보니 ‘무심코 근사할 때’가 있다. 출품작 가운데 단연 ‘내려놓은’ 그림, 붓질의 쾌락과 유희에 순응한 그림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절충과 균형이 절묘하다.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마침내 홀랑 벗고 묵묵히 물감을 씻는 나체의 작가. 엉거주춤, 차렷도 한껏 짝다리도 아니다. 샤워헤드를 비집고 물감 묻은 손을 들이받는 물줄기의 하찮은 수압이 괜히 머쓱하다. 가끔 보름달 닮은 오렌지색 전등, 칠이 다 나간 싸구려 손잡이가 덜렁이는 거무튀튀한 나무 문짝, 소용돌이치는 붓질 몇 번에 일필휘지 쓸데없이 멋있게 마감한 변기, 닦지 않아도 보는 덴 지장 없는 낡은 거울이, 초보 보디빌더들처럼 엉성한 자태를 제각기 뽐낸다. 희멀건 벽 타일, 자줏빛이 사뭇 과감한데 역시나 촌스러운 바닥 타일도 하품 삼킨 훈련병처럼 어영부영 줄지어 선다. 가지런하지도, 들쑥날쑥 답 없는 오합지졸도 아니다. 데면데면한 와중에 또 비슷한 쪽을 바라본다. 다 모으면 소실점까진 아니고 대충 소실’면’쯤 될까? 방향과 갈피와 가닥만 두루뭉술 잡아 둔 공간 설정에, 빨려드는 듯한 화면이 그리 작위적이거나 피곤하지 않다. 번듯한 묘사도 군데군데 밀고 날린 나이프 자국도 얼추 서로 죽이 맞다. 강렬하고 과감한 색상도 희멀건 회색 톤의 눈치를 보며 못이긴 척 슬며시 어우러진다. 머뭇대지도 저돌적이지도, 다 감추지도 몽땅 까발리지도, 점잔 빼지도 경망스럽지도 않은, 알맞고 걸맞고 딱 맞은 이 중간적 어조에 새삼 ‘적당’, ‘적절’, ‘적합’의 의미를 되새긴다.
조형이든 내용이든, ‘양면성’은 매력의 근원이다. 이 점에서 이규선은 곡예사라 부를 만하다. 형태를 잡다 풀고, 찍다 (나이프로)밀고, 모으다 흩뜨리기를 거듭하며 아찔한 균형을 줄 타듯 즐긴다. 손 가는 대로 막 밀 수 없다. 다시 그려 넣으면 탁하고 부자연스럽다. 스텝을 되밟으면 이미지에 갇힌다. 어떤 결과에 닿는 길은, 정확히 규명할 수 없다. 그 순간 그렇게 해야 간신히 만나는 특이점이 있다. 다시 스치지 못할 이성의 연락처를 따듯, 번뜩이는 결단이 중요하다. 이 조율이 바로 감각이고 재능이다. 사소한 기술이 아니라 이미지의 매력이 갈린다. 가늠이 서툴면 퇴짜 맞듯 매력이 반감한다. 때문에 작가 모드를 켜면, 극도의 집중으로 예리한 리듬을 지키려 애쓴다. 디지털 작업처럼 ‘Undo/Redo’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웠을 듯싶다. 그렇게, 될 때까지 길들인, 제어에 성공한 우연을 필연처럼 모은다. 이런 섬세하고 오묘한 줄타기가 잘 도드라지는 형식이 바로 회화이다. 회화여야 하는 이유가 참 명확한 작가랄까.
줄타기는 서사에도 여전하다. 회사원과 미술 작가, 생업과 작업, 구명과 사명 사이에서 고뇌와 즐거움이 뒤얽힌 줄타기를 즐긴다. 타이틀 이미지 〈직면 된 자화상〉은 회사와 작업실을 오가며 삶의 각도와 걸음걸이를 가다듬는 모습이다. ‘그래도 안 넘어지고 한 계단 더 올랐구나’ 외롭고 불안한 길을 걷는 스스로를 향한 대견과 연민이 뒤섞인 양가적 시선이 돋보인다.
진지함과 유쾌함을 넘나드는 작품 조합도 이 균형에 지분이 좀 있다. 가끔은 벼랑 끝에서 건곤일척 운명과 결판이라도 낼 듯 비장하다. 때론 일 끝나고 막걸리 한잔 걸친 시장통 아재처럼 편안하다.
창작에 임하는 각오도 사인 곡선처럼 진동한다. 캔버스라는 물적 전제와 회화라는 형식 전제에 스스로를 옭아맬 때와 전시 준비를 마치며 기념하듯 홀가분하게 나를 박제할 때의 붓질은 다르다. 그 틈새에서 솟은 뜻밖의 시너지에 작가 자신도 종종 놀란다. ‘이런 리듬도 괜찮은 거구나’, ‘그것도 나구나’. 의도를 새기고 지우는 자기 컨트롤이야말로 훌륭한 작업 요령임을 깨닫는다고.
결국 그림이든 작업 태도이든, 비장함 속에 즐길 게 있으면 된다. 핵심은 균형이다. 균형 있는 작업 모둠을 내보일 수 있어야 매력적이고, 없던 깊이도 생겨 길게 간다. ‘줄타기’와 ‘붓 잘 놓기’는 작가 대부분, 특히 회화 작가에게는 평생의 동반자 같은 고민이다. 현업 작가 레벨에서의 ‘잘 그린다’는 사실 그걸 잘 한다는 이야기이다.
막걸리아저씨_oil on tela_21x29.7cm_2023
신작_oil on canvas_582x259cm_2022
현대미술을 억지로 한 문장으로 줄이면 ‘겹치지 않기 배틀’이다. 희고 큰 벽에, 자기 이름을 자신의 색상과 필체로 휘갈긴다. 처음엔 쉽다. 아무 데나 쓰면 되니까. 여백은 줄어만 가고 점차 쓸 곳이 마땅찮다. 끄트머리 살짝 겹치는 건 도리 없다. 글씨는 점점 작아지고, 겹칠 확률은 자꾸 오른다. 동시대 미술가들이 이름 쓸 남은 칸은 이제 밤하늘의 별처럼 드문드문 점 몇 개쯤 된다. 가장 원시적이며 기초적인 형식인 회화는 이 배틀의 극한이다. 참신한 전략은 50년 전 선배들이 써먹었고, 쓸만한 레파토리는 100년 전 선배들이 해먹었다. 회화의 간명한 형식성은 조밀한 선점을 오히려 부추기는 셈. 반면 후발주자에겐 한층 가혹한 참신을 청구한다.
그런데, 다양성을 가장한 불확실성이 지붕을 뚫는 동시대 미술씬에선 참신과 매력으로도 부족하다. 금방 익숙해지고 질리고 잊히고 버려진다. 작가 생활을 꿰는 축으로 쭉 이어갈 만한 아이템이 필요하다. 이목을 끄는 건 물론, 파생성, 확장성이 좋아야 한다. 이런저런 색다른 게 자꾸 나와 익숙함을 유보하고, 그래서 늘 새롭고 볼만하고, 결과적으로 안주하지 않으면서도 작가 정체성은 유지해야 하는 것. ‘전업 작가로서 롱런 가능성이 얼마쯤인가’는 사실 대부분의 심사나 평가의 제1 척도이다. 그런 만큼 평생 만나기 어렵고, 행여나 자기만의 아이템을 발굴했다면 작가로서 정말 ‘땡’ 잡은 것. 자화상은 각자 다르고 늘 변하므로, 이 관점에서 훌륭하다. 또한 그 탓에 보편적이다 못해 고전적인 아이템이다. 그야말로 양날의 검.
이규선 개인전 '회사원 이씨'_청주창작스튜디오_2023
직면된 자화상_oil on canvas_162.2x130.3cm_2023
출근길_oil on canvas_259x197cm_2023
공사판에서 이규선은 자신을 미술 작가라고 소개한다. 작가들 앞에선 돌 나르고 삽 푸는 ‘노가다꾼’이다. 나머지 반쪽을 꺼내는 것이다. 돌이랑 삽은 이미 들었으니 작가라고 하고, 스튜디오에서 이미 다들 붓 들었으니, 곁에 없는 돌과 삽을 말하는 것. 자신을 축 삼은 이 판 저 판을 종합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바로 이규선의 자화상이다. 몸의 형태 말고.
여느 작가와 마찬가지로, 시작은 평범한 셀프 아카이빙이다. 그런데 ‘나’는 얼굴에만 드러나는 게 아니었다. 화장실 거울, 자동차 룸미러, 거리의 쇼윈도, 핸드폰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는 형상을 또 담자니 멀미가 났다. 몽타주나 개인정보 수집, Face ID 딥러닝이 목적이 아니니까. 문득 사회인이자 예술가를 표방하는 어느 인간의 입체적 이면을 훔치고 싶었다. 유레카! ‘나만 욱여넣을 게 아니라, 나를 포함하면 돼’ 자화상의 시선과 마음가짐으로 더 큰 걸 훔치기 시작한다. 자신을 둘러싼 이런저런 껍질들을, 내 모습(自畵) 대신 내 이야기(自話)를 그린(像)다. ‘나는 자화상을 그리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따금 드는 의심과 흥미는 비례했다.
때문에 그저 자화상에 골몰하거나, 그게 볼거리의 전부인 작업이 아니다. 방방곡곡 자화상의 요소는 작품끼리 이어주는 회로 배역이다. 자화상은 내용 중 하나이면서 또한 강력한 형식인 셈. 내 이미지를 넉넉히 가다듬은 다음엔, 나를 잠시 접어두고, 나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처한 상황, 고민, 나를 만드는 시간을 뭉친다. 자화상을 빙자해 시선과 발자취를 심는다. 자화상을 만난 공간을 펴고, 자화상을 대신할 인생 기념비를 화면에 세운다. ‘무엇 무엇이 나를 그리는지’를 그린다. 그는 “지울수록 더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자신을 흐리면 주변이 또렷해진다. 그렇다고 돌연 다 내던지고 나를 흐리면 감흥은커녕 그저 뜬금없을 것이다. 그의 ‘자화상(自畵像) 아닌 자화상(自話像)’이 억지스럽지 않은 비결은 결국, 자신의 위치를 힘주어 찍고 점차 나선형으로 주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매우 멀리 왔지만, 나선형의 중심 언저리에 여전히 내가 있다. 그렇게 알아버렸다. 능숙하게 벗어나는 방법을.
2024.4.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April.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