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영은미술관 특별기획전 – 박영학 작가
관종 배틀에 지친 자, 다 내게 오라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나는 가구 편집숍이나 가전 매장, 장식품 쇼룸 구경을 좋아한다. 구경만. 지갑 꼬옥 닫고 주야장천 눈만 굴리니 아마 썩 달갑잖을 손님이리라. 천신만고 서울 어느 구석에 쪼그려 누울 둥지 하나 트느라 깜냥이 달리는 탓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해마다 떡국 한 그릇 비울수록, 공간 더 한 뼘 비우는 눈이 생긴다. 평당 삼천에 들어앉은 화분은 그 효용이 꽃값에 월세를 넘겨야 딱 제 밥값이다. 그럼 좀체 놓을 게 없다. 이리 세고 저리 재다 지칠 즈음, 차라리 공간 자체를 누릴 궁리에 젖는다. 감성 터지는 싸구려 조명을 달고, 언젠가 얻은 그림을 산 척 걸고, 난간 없는 통창을 내고, 햇살 묻은 빈 마루에 괜히 뒹군다.
그런데 비싼 게 어디 서울 바닥뿐인가. 화폭 한 뼘 한 뼘이 다 시간이고 돈이고 예술가의 수명이다. 전시에 내거는 건 심지어 그 일부에 불과하다. 박영학의 화판도 예외 없다. 평당가 아니 뼘당가를 생각하면 허투루 긋고 찍고 채워댈 수 없다.
집도 그림도 비울수록 찬다. 그래서 그는 비워 채운다. 실경에 잡히고 물리고 갇히는 대신 오히려 치고 덜고 빼며 완성으로 향한다. 바위와 숲을 겹치고 하늘과 구름을 뭉치고 물결과 수초를 합칠수록 그 실루엣이 점차 크고 선명해진다. 동떨어진 것들이 시야 안에서 마주쳐 잇닿을 때 부대끼는 외곽선의 미감을 일깨운다. 찌든 삶에 도통 살필 새 없던, 풍경의 숨은 곡선이 비로소 눈에 든다. 인간도 자연이란 증거일까? 엇갈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눈코입이 있고 산자락의 좌우에 어깻죽지가 있고, 강물과 바위가 껴안은 어름에 도드라진 무릎이 있다. “보이나요 이제? 어때요, 참 쉽죠?” 일면 ‘풍경 즐기기 매뉴얼’ 같다. 문득, 곡선을 비집고 드문드문 박힌 직선 또한 이채롭다. 자연에 없는 뻣뻣한 직선은, 농막이든 전신주든 무언가 인공물을 대신하는 조형 언어이리라. 비움의 관성을 해치지 않는 미술가의 절충이 돋보인다.
허투루 쓰지 않기론 색도 마찬가지. 흰색은 빈 색, 색을 입히기 전인가? 그 반대이다. 프리즘으로 백색광을 쪼개면 알록달록 모든 파장이 들어앉았다. 물감을 비롯한 색료의 감산혼합 또한 발색의 마침표는 반사되어 눈에 박히는 빛이다. 모든 색을 다 품은 흰색이야말로 더 채울 도리 없이 꽉 들어찬 색이다.
립스틱 한 자루 살 때도, 늘 달고 다니는 얼굴 좌우로 또 치켜들고 웜톤 쿨톤 견주며 인류의 난제라도 풀 듯 거울 앞에서 심사숙고하지 않는가. 흰색도 그렇다. 누구나 알아챌 서로 다른 흰색만 백 가지는 너끈하다. 따뜻한 흰색, 차가운 흰색, 알록달록한 흰색, 수수한 흰색, 토실한 흰색, 핼쑥한 흰색, 다정한 흰색, 매정한 흰색 다 따로 있다. 아이들이 삼 일을 두고 못 보는, 막 도배를 낸 새 벽지의 윤기 어린 색, 인스타 사진 찍기 전에 스푼부터 꽂고 싶은, 놋그릇 가득 담긴 우유 빙수의 고소한 색, 발자국을 안 찍곤 못 배길 소복한 눈밭 색, 먹을 담뿍 찍어 뭐라도 긋고픈 새 화선지처럼 탐스러운 흰색도 있다. 들여다볼수록 그 윤기 사이로 삼라만상이 슬금슬금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백자의 표면처럼 깊고 단아한 흰색, 모든 걸 포용하는 흰색도 어딘가 있을 것이다. 끝없이 담고 머금고 이끌고 빨아들이는 그런 흰색, 바로 박영학이 추구하는 흰색이다.
그래서 장지에 흰 돌가루만 열다섯 번을 덧입힌다. 젯소 치듯 밑 작업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주조색을 입히는 것. 그런 맥락에서 그의 작업은 숫제, 풍경이 박힌 백자를 평면에 펼친 듯하다. 만지고 싶은 흰색에 수수하고 탐스러운 형상까지 박힌 탓에 관객의 손을 무던히도 탄다고 한다.
세파가 험할수록 빛나는 조강지처. 색상을 극도로 절제한 화면에서 이 흰색은 검정과 죽고 못 사는 천생연분이다. 미색보다 한층 선명한 대비로 서로 돋보이게 끌고 밀어준다. 또한 표면의 미세한 요철 질감은 목탄으로 그은 선을 오동통 살찌운다. 숯가루가 돌가루와 부딪으며 선 둘레로 번지듯 거뭇하게 흐드러지다. 그 언저리를 따라 면봉으로 파편을 갈무리하여 마치 먹선의 농담이나 갈필이 떠오르는 효과를 끌어낸다. 실물을 마주해야 시야에 들어차는 이 섬세한 완급에 힘입어 형태가 진동한다. ‘수줍은 용트림’하듯.
박영학, 2024 화랑미술제 출품작 단아한 풍경
박영학, 2024 화랑미술제 출품작 단아한 풍경
사실 스크린으로 먼저 접한 그의 작업은 한 마디로 소위 ‘디자인적’이었다. 중성적인 흰 바탕에 검정 외곽선이 화면을 나누고 빽빽한 형상이나 과감한 색면을 곳곳 툭툭 대담하게 박은 풍경. 전통 산수 형식을 현대의 입맛에 맞춰 ‘힙하고 핫하고 팝하게’ 어루만진 동시대적 변용의 하나이리라 함부로 짐작했다.
이어 마음의 준비 없이 무방비로 마주한 작업 실물에 뒤늦게 기함한다. 그리고 그 아득한 여정에 또 한 번 탄식한다. 호수나 바위의 외곽선대로 톱을 켜 나무 패널을 타고, 그 단면을 따라 판자를 덧대어 닫힌 면으로 마감한다. 팽팽히 장지를 덧씌우고 방해말(석채 가루)을 입히고 말리고 사포로 갈아 내길 반복한다. 자그마치 열다섯 번을. 이어서 손가락 두 마디 길이로 짧게 썬, 크고 작은 숯덩이를 패널 곳곳 오려낸 구멍에 높이와 너비를 맞춰 촘촘히 채운다. 구멍 가장자리는 더 잘게 쪼갠 숯으로 최대한 꼼꼼히 메운다. 진천산 소나무 숯이어야 그 광택이 적절하다고. 그제야 비로소 드디어 목탄과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는 시간은 애초 얼마 되지도 않는다. 자르고 깎고 붙이고 조이고 씌우고 칠하고 채우고 갈아 내느라 하루가 짧다. 공작이나 수행에 가까운 현장을 살피다 이내 그 막막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회화 맞죠 작가님?”
“회화…보다는 농사? 농사짓는 거 비슷해요”
합칠수록 선명해지는 외곽선
자연 속에 인체가 있다
크기별로 나눈 진천산 소나무 숯
오톨도톨 진동하는 선
방해말
면봉
뒤틀리지 않게 잡아준다 15겹 올리려면
그림인가 공예인가
흰색은 ‘돌색’, 검정은 ‘숯색’. 땅과 나무에서 난 그의 그림은 질료적으로도 산수 그 자체이다. 자연을 옮겨다 놓은 정신적 분재와 같은 것. 사실 수묵의 장지와 먹 역시 나무의 자식들이니 그 변용으로 이해해도 좋다. 수묵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어렵다면 비틀어 한 걸음 나아가길 고민할 터. ‘먹이 아닌데, 먹인 것은 없을까?’ 박영학은 지난한 노동으로 얼룩진 정결한 그림을 자신만의 작업 모델, 로직, 메커니즘으로 삼았다. 흰 여백과 시원한 필선만 띄엄띄엄 막 보고, 일필휘지 휙휙 가르고 지르고 긋겠거니 속단이 괜히 머쓱하다. 어쩐지 만화가의 마감 원고처럼 꼼꼼한 스케치가 책상 한가득이더라니.
꽉 찬 거보다 더 채우는 방법이 있다. 잘 덜어, 비싼 공간을 살리는 것.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전시를 짜다 보면 수없이 마주친다. 구석구석 살뜰히 욱여넣어도 허전하다. 적게 걸었는데 든든하다. 무리했건만 여전히 아쉽다. 줄이고 타협하니 외려 알차다. 채울수록 질린다. 비우니 그 여운이 무궁무진하다. 밀도와 성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밀당’하며 균형을 찾는 줄타기이다. 오롯이 하나인 것, 오직 한 면인 것, 일편단심이라지만 달랑 단심 일편뿐인 것은 재미없다. 금방 질린다. 사람도 그림도 보석처럼 면면이 다채로워야, 곱씹을 때마다 뜻밖의 단물이 배어나야 맛있고 멋있고 재밌다. 그래야 또 보고 싶다. 흑과 백, 비움과 채움, 펼침과 뭉침, 상반된 것들의 조합과 공존이 매력의 원천이다. 심지어 구조주의의 이항 대립적 시각 또한 궁극적으론, 이분법을 극복하고 융합의 시너지를 얻기 위한 일종의 사전 절차 아닌가. 그 상리를 박영학은 돌가루 위에 숯검댕으로 시각화한다.
버리고 비우고 겹치고 뭉치고 합칠수록 선명하다. 간소하면서 명확한 것. 그가 추구하는 조형이다. 뽐내고 나대는 대신 다 포용하는, 그래서 파도 파도 무궁무진 영영 회자할 그림. 선명하고 강렬하고 돋보이다 못해 관종 배틀 멱살잡이 우격다짐 아귀다툼하는 현대 미술씬의 이미지 이전투구 참호 공방에 지친 눈과 가슴을 달래는 그림. 덤덤함 속에 거부할 수, 거역할 수, 거스를 수 없는 끌림이 가득한 그런 그림 말이다. 읽기 싫어도 절로 외워지는 글, 외면하려 해도 이미 눈에 선한 전시. 내가 꿈꾸는 글과, 내가 바라는 전시와 참 닮았다.
2024.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2024 영은미술관 특별기획전 – 박영학 작가
관종 배틀에 지친 자, 다 내게 오라
김영기
OCI미술관 부관장
Younggi Kim (Deputy Director, OCI Museum of Art)
나는 가구 편집숍이나 가전 매장, 장식품 쇼룸 구경을 좋아한다. 구경만. 지갑 꼬옥 닫고 주야장천 눈만 굴리니 아마 썩 달갑잖을 손님이리라. 천신만고 서울 어느 구석에 쪼그려 누울 둥지 하나 트느라 깜냥이 달리는 탓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해마다 떡국 한 그릇 비울수록, 공간 더 한 뼘 비우는 눈이 생긴다. 평당 삼천에 들어앉은 화분은 그 효용이 꽃값에 월세를 넘겨야 딱 제 밥값이다. 그럼 좀체 놓을 게 없다. 이리 세고 저리 재다 지칠 즈음, 차라리 공간 자체를 누릴 궁리에 젖는다. 감성 터지는 싸구려 조명을 달고, 언젠가 얻은 그림을 산 척 걸고, 난간 없는 통창을 내고, 햇살 묻은 빈 마루에 괜히 뒹군다.
그런데 비싼 게 어디 서울 바닥뿐인가. 화폭 한 뼘 한 뼘이 다 시간이고 돈이고 예술가의 수명이다. 전시에 내거는 건 심지어 그 일부에 불과하다. 박영학의 화판도 예외 없다. 평당가 아니 뼘당가를 생각하면 허투루 긋고 찍고 채워댈 수 없다.
집도 그림도 비울수록 찬다. 그래서 그는 비워 채운다. 실경에 잡히고 물리고 갇히는 대신 오히려 치고 덜고 빼며 완성으로 향한다. 바위와 숲을 겹치고 하늘과 구름을 뭉치고 물결과 수초를 합칠수록 그 실루엣이 점차 크고 선명해진다. 동떨어진 것들이 시야 안에서 마주쳐 잇닿을 때 부대끼는 외곽선의 미감을 일깨운다. 찌든 삶에 도통 살필 새 없던, 풍경의 숨은 곡선이 비로소 눈에 든다. 인간도 자연이란 증거일까? 엇갈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눈코입이 있고 산자락의 좌우에 어깻죽지가 있고, 강물과 바위가 껴안은 어름에 도드라진 무릎이 있다. “보이나요 이제? 어때요, 참 쉽죠?” 일면 ‘풍경 즐기기 매뉴얼’ 같다. 문득, 곡선을 비집고 드문드문 박힌 직선 또한 이채롭다. 자연에 없는 뻣뻣한 직선은, 농막이든 전신주든 무언가 인공물을 대신하는 조형 언어이리라. 비움의 관성을 해치지 않는 미술가의 절충이 돋보인다.
허투루 쓰지 않기론 색도 마찬가지. 흰색은 빈 색, 색을 입히기 전인가? 그 반대이다. 프리즘으로 백색광을 쪼개면 알록달록 모든 파장이 들어앉았다. 물감을 비롯한 색료의 감산혼합 또한 발색의 마침표는 반사되어 눈에 박히는 빛이다. 모든 색을 다 품은 흰색이야말로 더 채울 도리 없이 꽉 들어찬 색이다.
립스틱 한 자루 살 때도, 늘 달고 다니는 얼굴 좌우로 또 치켜들고 웜톤 쿨톤 견주며 인류의 난제라도 풀 듯 거울 앞에서 심사숙고하지 않는가. 흰색도 그렇다. 누구나 알아챌 서로 다른 흰색만 백 가지는 너끈하다. 따뜻한 흰색, 차가운 흰색, 알록달록한 흰색, 수수한 흰색, 토실한 흰색, 핼쑥한 흰색, 다정한 흰색, 매정한 흰색 다 따로 있다. 아이들이 삼 일을 두고 못 보는, 막 도배를 낸 새 벽지의 윤기 어린 색, 인스타 사진 찍기 전에 스푼부터 꽂고 싶은, 놋그릇 가득 담긴 우유 빙수의 고소한 색, 발자국을 안 찍곤 못 배길 소복한 눈밭 색, 먹을 담뿍 찍어 뭐라도 긋고픈 새 화선지처럼 탐스러운 흰색도 있다. 들여다볼수록 그 윤기 사이로 삼라만상이 슬금슬금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백자의 표면처럼 깊고 단아한 흰색, 모든 걸 포용하는 흰색도 어딘가 있을 것이다. 끝없이 담고 머금고 이끌고 빨아들이는 그런 흰색, 바로 박영학이 추구하는 흰색이다.
그래서 장지에 흰 돌가루만 열다섯 번을 덧입힌다. 젯소 치듯 밑 작업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주조색을 입히는 것. 그런 맥락에서 그의 작업은 숫제, 풍경이 박힌 백자를 평면에 펼친 듯하다. 만지고 싶은 흰색에 수수하고 탐스러운 형상까지 박힌 탓에 관객의 손을 무던히도 탄다고 한다.
세파가 험할수록 빛나는 조강지처. 색상을 극도로 절제한 화면에서 이 흰색은 검정과 죽고 못 사는 천생연분이다. 미색보다 한층 선명한 대비로 서로 돋보이게 끌고 밀어준다. 또한 표면의 미세한 요철 질감은 목탄으로 그은 선을 오동통 살찌운다. 숯가루가 돌가루와 부딪으며 선 둘레로 번지듯 거뭇하게 흐드러지다. 그 언저리를 따라 면봉으로 파편을 갈무리하여 마치 먹선의 농담이나 갈필이 떠오르는 효과를 끌어낸다. 실물을 마주해야 시야에 들어차는 이 섬세한 완급에 힘입어 형태가 진동한다. ‘수줍은 용트림’하듯.
박영학, 2024 화랑미술제 출품작 단아한 풍경
박영학, 2024 화랑미술제 출품작 단아한 풍경
사실 스크린으로 먼저 접한 그의 작업은 한 마디로 소위 ‘디자인적’이었다. 중성적인 흰 바탕에 검정 외곽선이 화면을 나누고 빽빽한 형상이나 과감한 색면을 곳곳 툭툭 대담하게 박은 풍경. 전통 산수 형식을 현대의 입맛에 맞춰 ‘힙하고 핫하고 팝하게’ 어루만진 동시대적 변용의 하나이리라 함부로 짐작했다.
이어 마음의 준비 없이 무방비로 마주한 작업 실물에 뒤늦게 기함한다. 그리고 그 아득한 여정에 또 한 번 탄식한다. 호수나 바위의 외곽선대로 톱을 켜 나무 패널을 타고, 그 단면을 따라 판자를 덧대어 닫힌 면으로 마감한다. 팽팽히 장지를 덧씌우고 방해말(석채 가루)을 입히고 말리고 사포로 갈아 내길 반복한다. 자그마치 열다섯 번을. 이어서 손가락 두 마디 길이로 짧게 썬, 크고 작은 숯덩이를 패널 곳곳 오려낸 구멍에 높이와 너비를 맞춰 촘촘히 채운다. 구멍 가장자리는 더 잘게 쪼갠 숯으로 최대한 꼼꼼히 메운다. 진천산 소나무 숯이어야 그 광택이 적절하다고. 그제야 비로소 드디어 목탄과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는 시간은 애초 얼마 되지도 않는다. 자르고 깎고 붙이고 조이고 씌우고 칠하고 채우고 갈아 내느라 하루가 짧다. 공작이나 수행에 가까운 현장을 살피다 이내 그 막막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회화 맞죠 작가님?”
“회화…보다는 농사? 농사짓는 거 비슷해요”
합칠수록 선명해지는 외곽선
자연 속에 인체가 있다
크기별로 나눈 진천산 소나무 숯
오톨도톨 진동하는 선
방해말
면봉
뒤틀리지 않게 잡아준다 15겹 올리려면
그림인가 공예인가
흰색은 ‘돌색’, 검정은 ‘숯색’. 땅과 나무에서 난 그의 그림은 질료적으로도 산수 그 자체이다. 자연을 옮겨다 놓은 정신적 분재와 같은 것. 사실 수묵의 장지와 먹 역시 나무의 자식들이니 그 변용으로 이해해도 좋다. 수묵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어렵다면 비틀어 한 걸음 나아가길 고민할 터. ‘먹이 아닌데, 먹인 것은 없을까?’ 박영학은 지난한 노동으로 얼룩진 정결한 그림을 자신만의 작업 모델, 로직, 메커니즘으로 삼았다. 흰 여백과 시원한 필선만 띄엄띄엄 막 보고, 일필휘지 휙휙 가르고 지르고 긋겠거니 속단이 괜히 머쓱하다. 어쩐지 만화가의 마감 원고처럼 꼼꼼한 스케치가 책상 한가득이더라니.
꽉 찬 거보다 더 채우는 방법이 있다. 잘 덜어, 비싼 공간을 살리는 것.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전시를 짜다 보면 수없이 마주친다. 구석구석 살뜰히 욱여넣어도 허전하다. 적게 걸었는데 든든하다. 무리했건만 여전히 아쉽다. 줄이고 타협하니 외려 알차다. 채울수록 질린다. 비우니 그 여운이 무궁무진하다. 밀도와 성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밀당’하며 균형을 찾는 줄타기이다. 오롯이 하나인 것, 오직 한 면인 것, 일편단심이라지만 달랑 단심 일편뿐인 것은 재미없다. 금방 질린다. 사람도 그림도 보석처럼 면면이 다채로워야, 곱씹을 때마다 뜻밖의 단물이 배어나야 맛있고 멋있고 재밌다. 그래야 또 보고 싶다. 흑과 백, 비움과 채움, 펼침과 뭉침, 상반된 것들의 조합과 공존이 매력의 원천이다. 심지어 구조주의의 이항 대립적 시각 또한 궁극적으론, 이분법을 극복하고 융합의 시너지를 얻기 위한 일종의 사전 절차 아닌가. 그 상리를 박영학은 돌가루 위에 숯검댕으로 시각화한다.
버리고 비우고 겹치고 뭉치고 합칠수록 선명하다. 간소하면서 명확한 것. 그가 추구하는 조형이다. 뽐내고 나대는 대신 다 포용하는, 그래서 파도 파도 무궁무진 영영 회자할 그림. 선명하고 강렬하고 돋보이다 못해 관종 배틀 멱살잡이 우격다짐 아귀다툼하는 현대 미술씬의 이미지 이전투구 참호 공방에 지친 눈과 가슴을 달래는 그림. 덤덤함 속에 거부할 수, 거역할 수, 거스를 수 없는 끌림이 가득한 그런 그림 말이다. 읽기 싫어도 절로 외워지는 글, 외면하려 해도 이미 눈에 선한 전시. 내가 꿈꾸는 글과, 내가 바라는 전시와 참 닮았다.
2024.5.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May.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