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된 시간, 영겁토록 이어지는 것들
정재연
아이와 함께 자주 가는 공원을 걷는다. 겨울에 맞게 살아나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바스러지는 낙엽을 발견하고, 조릿대 군락들, 다양한 모양의 돌 냄새를 맡고 만져본다. 차가운 공기에 외면받는 식물들. 겨울 동안 식물들은 죽거나 활동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겨울철에 살아남는 식물의 생명력, 이 겨울나무들의 생존 전략은 자연의 순환과 삶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원리를 반영한다. 수 천년 동안을 살아남아 왔으며, 그들이 진화적으로 다양한 조건에 적응하는 능력을 스스로 만들어 왔을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생존전략은 ‘휴면’이다. 추운 겨울에 많은 잎을 떨어뜨려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여 겨울 동안 적은 에너지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나무들은 세포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얼음 형성을 방지하기 위해 세포액의 농도를 조절한다. 이는 세포의 손상을 보호받게 하는 생존을 위한 조치이다. 인간은 식물의 ‘휴면’과 같은 생존 전략을 관찰하고 이해함으로써, 식물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물론 농약, 의약품과 같은 활성물질을 사용하여 극한 환경 조건에서 생존의 시간을 늘려 나간다. 우리가 하루에 세 번 이상은 마주하는 단어 ‘지속가능성’에 대한 질문과 일맥상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다시 앞에서 언급한 인간이 발전시킨 ‘휴면’의 생존 전략에 대해 돌아가 보자. 인류는 겨울철에 휴면 상태에 들어가는 식물들을 이해하고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겨울 작물을 재배하거나, 다음 계절을 위한 씨앗의 보존 방법을 개발했다. 인류가 자연의 순환을 이해하고 이에 맞춰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조정하고 조절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겨울에 견딜 수 있는 식물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법을 터득해 정원을 가꾸고 식물원에 간다. 오늘날의 보존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기술과 지식, 영광스러운 과거의 문화, 토착민들이 지켜오는 방대한 전통적 지식, 기술, 활동 등 말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들은 재생 가능한 자원과 에너지 효율적인 기술을 사용해 작품을 제작하고,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재료를 사용해 생태적인 제작 관행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의미에선 장기적인 안정성, 여러 재료의 지속 가능한 활용 그리고 보존 방법과 기술을 사용하는 예술가들이 늘어났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식물에서 추출한 색소를 사용해 생태 인쇄나 염색 작업을 이어나가 활성 물질의 색상 변화를 관찰한다든가 미생물을 활용한 생물 예술(Bio Art) 프로젝트 모두 활성 물질의 생물학적 특성을 실험한다. 유전자 조작 기술을 이용해 환경보전을 위한 대체 가능한 원료를 만든 얄릴라 에사이디(Jalila Essaidi)나, 디지털 제조 기술이 생물학적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네리 옥스만(Neri Oxman) 등 인간과 생명체의 연결성을 증명하고 미래를 위한 대한을 모색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서 각종 필요 자원이 없어지는 것, 공급이 끊어지는 것, 사라진다는 것, 미래에 대한 대안이 사라지는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예술가의 개입이 어떻게 ‘보존’의 역사와 문화 지식을 연구, 생성하는지, 생태학적으로 어떤 연결과 매개로 조율할 수 있을까? 환경적이며 사회 경제적 문제 속에서 문화를 보존하는 것은 가능할까? 작품을 생성해내는데 있어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거나 추적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문화, 역사적 그리고 정신성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깊은 욕구의 표현일 것이다. 여러 학문에서도 사용하는 용어인 “자기 증식적 운동”은 복제와 자신의 기능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특성이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 복제나 보존을 넘어 지식, 가치, 신념, 미적 가치의 전달과 확장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 문화의 자기 증식적 특성은 예술을 통해 가장 순수하고 직관적인 형태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예술가들의 능력일 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의 저서 『고백록』 11권에 “하지만 나는 이것만큼은 안다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은 없다.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은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면 현재의 시간은 없다.”[1] 라고 시간에 대해 성찰한다. 이는 보존의 의미에서 과거는 물리적 형태나 기억, 또는 기록된 형태로 다시 재구성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를 현재의 경험으로 변환하는 인간의 능력을 반영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보존이라는 행위를 단지 과거로부터 물리적이거나 문화적 유산을 현재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한 연속적인 대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각 시대 속에서 시작된 단서가 누군가와 연결되었을 때의 경험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말이다.
아이와 자주 가는 Socrates park 에서 작은 돌을 숨겨놓은 작은 홈
Noguchi Museum 에서 눈 쌓인 겨울날 돌멩이로 집 짓는 중
아이의 놀이 과정 중에 보존을 읽다
아이는 공원에서 주워 온 돌과 나뭇가지, 그리고 낙엽을 집 앞 마당에 나열한다. 그리고 돌에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자신만 아는 공간에 보관해 둔다. 돌의 모양은 다양하다. 그 돌을 던져 부숴보기도 하고 쌓기도 한다. 3세 아이의 독립적인 생각, 거리낌 없이 분류해 놓은 질서정연한 나뭇가지와 돌들은 자기 나름의 의식 표현이자 물체의 보존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는 표시다. 분필을 가지고 그 장소를 동그라미로 그린 후 본인 카메라로 사진을 남겨 보관한다. 놀랍다. 즉 대상을 관찰하고, 흩뜨리고, 줍고, 아무렇게나 놓아두고, 그 모양을 보는 것을. 거기에다가 스스로 기록까지 할 수 있다니 말이다. 이 과정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 작용이 어떻게 생태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지 그리고 더불어 보존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스스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경험이다. 왜냐하면 물건을 수거하고 모으는 행위는 인류 역사의 개벽 이래 상당한 시간 동안 그때까지 지구 생물들이 품고 있던 깊은 비의(秘儀)를 계승하기라도 하듯 몰두해 온 행위였기 때문이다[2]. 아이의 순수한 행위에서 시작된 나름의 의식은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반영한다. 모든 생명체는 무생물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각각은 우주의 균형과 조화를 서로 조율한다.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생명체 간의 상호 공생, 더불어 사는 삶을 연구하는 것, 이러한 삶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우리는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간다. 그럼 내 아이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10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30분에 걸쳐 걸어가면서 아이는 무엇을 발견하고, 수집하고 그 안에 가치를 부여하는지 말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바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질 그 작은 돌이나 떨어진 나뭇잎이, 하지만 아이는 다르다. 버려진 것이 아닌 가치 있는 무언가로 변신한다. 하나하나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고 생명을 유지해 주는 아이의 행동에서 또 하나를 배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새롭고 진귀한 경험을 매일 한다. 폭발할 듯한 호기심을 안고 무언가 계속해서 생산하고 창조한다. 이렇게 되면 사계절의 변화가 절대 같은 모양일 수 없다. 저마다 자기가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보존이다. 결국 계절이 변화하듯 시간이 흐르면서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그리고 훼손되는 것을 최소화시키는 것. 그것이 어떻게 보면 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순간부터 만들어왔던 삶의 원형이자 생존을 위한 훈련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이에 따라 훼손된 생태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의 영역을 위협하고 있다. 매년 3억 톤 이상의 플라스틱이 생산된다고 한다. 이 중에서 재활용의 비율은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결국 재활용이라는 이름 하에 던져진 쓰레기들은 말레이시아와 같은 개발 도상국에 옮겨져 쓰레기 더미가 연료로 사용된다. 쓰레기가 발산하는 가스 누출의 위험 속에 파묻힐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쓰레기를 가치 있는 것으로 변환하는 재생 장치가 필요하다. 위에 언급했던 네리 옥스만은 플라스틱에 대한 미생물에 의해 환경친화적으로 분해하는 생분해성 대안을 탐구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풍부한 생물 고분자 중 일부를 사용하는 물을 기반으로 제조 공정을 거치는 작품을 제작한다. 새우 껍질, 잠자리 날개와 곰팡이 조직에서 발견되는 키틴(Chitin), 식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셀룰로오스(cellulose), 그리고 펙틴(pectin) 등 고분자를 고성능 재료로 전환하기 위한 제조 플랫폼을 개발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플라스틱의 사용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함이지만 미래 생태계와 인간 생존을 돕기 위한 역할도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 그리고 기술이라는, 설명 가능한 시스템이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유형의 물질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지만 어딘가에서 발견되기를 바란다. 그것을 인간이 다시 쓸 만하게 만든다. 발견된 물질은 교환 경제를 통해 분해, 해체, 이동 그리고 다시 재조합, 재구성된다. 여러 예술 형태에서 보존이란 개념을 볼 때, 예술가는 제거와 재생, 조립과 분해의 행위와 동시에 드러내고 폭로하고 재생시키는 일 사이에서 부서트리고 만든다. 아직 미래가 생성되지 않아 과거만 불러오는 행위일까? 아니면 미래를 생성하기 위한 현재가 끝도 없이 올라가는 풍경일까? 흥미롭고 존엄하다.
인간은 전승을 위한 효율적인 도구
얼마 전 우연히 방송에서 한 방송인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의 장례문화를 체험한 장면을 보았다. 이는 마다가스카르의 ‘파마디하나(Famadihana)’라고 일컫는데 유족들이 무덤에 모여 고인의 몸을 감싼 천을 갈아주며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축제 같은 장례 문화다. 인간의 사체는 무방비 상태의 불완전한 것이기에 이를 둘러싸고 벌이는 생물들의 “세레모니” 혹은 “연회”의 상호 연대적인 행위, 즉 ‘분해’의 양상은 떠들썩하고 화려하다.[3]
“죽음이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재생을 축원하는 야생의 축하회이기도 하며, 그 파티를 주최하는 것은 우리의 본질이라고 생각해…”.[4]
우리는 춤을 추지만 눈을 뜨지 않는 사람을 기억한다. 마치 이 춤이 마지막일 것처럼 말이다. 흥겨운 음악 속에서 만난 고인. 몇 년 동안 그리워했을 각자의 슬픔과 그리움 속에서 그 어떤 말도 없이 하얀 천이 뒤덮인 나무 판때기 같은 몸을 계속해서 주무르고 만진다. 인간의 삶과 느낌, 생각의 본질을 담고 있는 그 차디찬 몸은 죽음보단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자리 같다. 멕시코 인류학자 로데스 아리즈페(Lourdes Arizpe)는 “공유된 믿음으로서 서로에게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시각적이다. 서로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꽃과 객체와 단어에 생명을 부여하냐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서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것, 즉 인류에 대한 핵심적인 도전을 주는 것은 무형의 것이다. 죽음이란 그것이 공유되었을 때 생명을 부여 받는다”.[5] 기술과 지식 및 활동이라는 형태로 보이는 무형의 유산들. 그리고 그것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들은 찰나의 예술과도 같다. 순식간에 의미는 변형될 수 있고, 동작의 순간적인 상태만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착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멕시코에서도 무형의 유산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대해 국제박물관협의회(ICOM)에서 ‘무형 유산과 멕시코의 박물관(ICOM Code of ETHICS for Museum)’이라는 주제로 콜로키엄을 조직하기도 했다. 문화유산의 기여는 관광산업을 성장케 한다. 신성한 장소의 고고학적, 유적을 방문하고 인종과 문화의 전통 특히 언어, 전통 의술, 의례, 음악, 기술 등을 보기 위해 박물관을 방문한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관광산업의 성장은 본질의 대상을 파괴한다. 위험에 처한 것은 관광산업으로 인한 비효율적인 분배와 천연자원의 감소, 엘리트주의적인 이용 수단으로 아주 비생산적이게 지속된다는 것이다. 토착민들[6]에게 모든 식물군, 동물군 토양이나 경관이 문화적인 의미 -언어, 일화나 전설, 신화 혹은 종교적 의미, 관습- 에선 아주 중요하다. 여기서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신선한 충격을 안긴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 Treasures from the Wreck of the Unbelievable》[7]이 떠오른다. 난파선의 인양 작업은 실제 발굴 작업을 그대로 따라 했고, 없는 역사적 산물을 재생산 시켰다. 재창조된 보존물 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역사와 유형의 사물들이 진실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결국 이러한 질문들이 예술가들을 계속해서 사유하게 하고, 탐구하게 하고, 실행케 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아이가 놀이를 시작함에 있어 스스로가, 무엇을 만들고,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 그러기엔 무엇을 필요로 하고, 어떤 수행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엄마는 관찰한다.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고, 분해해 보고 부숴보고 쌓아보고 정돈해 보고 흩트려 보는 이 모든 과정들. 바로 이 지점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다. 모래 사장에서 찾아온 조개, 둥글게 깎여진 유리병 조각, 흐늘거리는 해초를 담는 작은 손을 보노라면, 버려질 수도 있었던 과거를 뛰어넘는 귀여운 행동이 상상과 창조의 실마리를 잡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물질의 결여, 흐트러짐, 버려짐에 대해 아이가 행동하는 막후의 조치가 너무나 신비롭고 귀하다. 무너지고 버려지는 혹은 조합하고 재생시켜 보호하는 이 둘의 모순적 동일성이야 말로 보존의 세계를 가치 있게 만든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는 생각 없이 절대로 작업하지 않는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늘 어떤 목적을 마음에 두고 실행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필요로 한다는 것. 이것이 보존의 핵심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퇴색 없인 찬란함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늘 그 찬란함을 위해 살아간다.
이 글은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보존의 미래>(기획: 김정현)의 의뢰로 작성되었습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종합출판범우, 2008).
[2] 후지하라 다쓰시, 박성관 옮김, 『분해의 철학』, (사월의 책, 2023), p.191.
[3] 위의 책, p.288.
[4] 베른트 하인리히(Heinrich Bernd), 김명남 역,『생명에서 생명으로: 인간과 자연, 생명 존재의 순환을 관찰한 생물학자의 기록』, (궁리, 2015), pp.5-6.
[5] 실비아 싱어(Silvia Singer), 「일시적인 것의 보존: ‘2004 멕시코 국제박물관의 날’」, 『International Journal of Intangible Heritage』, Vol.1, (국립민속박물관, 2006), p.58.
[6] 여기서 토착민은 멕시코 토착민으로 서로 다른 62개의 방언을 사용하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일컫는다. 아메리카 토착민의 관리 하에 있는 영역은 최소 3천만 헥타르로 토착민들이 멕시코의 삼림지대 중 80%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감내하는 것은 가난과 차별, 일자리 부족, 문화 관련 기관의 부실한 연구 등 토착 문화가 수세기 동안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방식이 무시되거나 과소평가 된다. 위의 논문, p 59. 참조
[7] 약 2000년 전에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 후 막대한 재산을 모은 전설적인 인물이자 컬렉터인 시프 아모탄 2세(Cif Amotan II)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조각, 보석, 동전과 물품이 가득한 보물을 거대 한 선박인 아피스토스(Apistos)호에 싣고 항해를 시작했다. 각종 보물을 가득 실은 아피스토스호가 인도양에 침몰했고, 동아프리카에서 2008년에 이 난파선을 발견하여, 10년 동안의 발굴 과정을 거쳐 그 보물들을 인양, 전시했다.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 제목의 개인전은 허구의 이야기로 점철된 신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모큐멘터리(Mockumentary)다. 사실적인 촬영 기법과 박물관의 고대유물 전시 구성을 그대로 차용한 전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 실제와 허구 경계를 재조명하고 보존의 개념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된 전시다.
2024.6.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ne.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유예된 시간, 영겁토록 이어지는 것들
정재연
아이와 함께 자주 가는 공원을 걷는다. 겨울에 맞게 살아나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바스러지는 낙엽을 발견하고, 조릿대 군락들, 다양한 모양의 돌 냄새를 맡고 만져본다. 차가운 공기에 외면받는 식물들. 겨울 동안 식물들은 죽거나 활동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겨울철에 살아남는 식물의 생명력, 이 겨울나무들의 생존 전략은 자연의 순환과 삶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원리를 반영한다. 수 천년 동안을 살아남아 왔으며, 그들이 진화적으로 다양한 조건에 적응하는 능력을 스스로 만들어 왔을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생존전략은 ‘휴면’이다. 추운 겨울에 많은 잎을 떨어뜨려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여 겨울 동안 적은 에너지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나무들은 세포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얼음 형성을 방지하기 위해 세포액의 농도를 조절한다. 이는 세포의 손상을 보호받게 하는 생존을 위한 조치이다. 인간은 식물의 ‘휴면’과 같은 생존 전략을 관찰하고 이해함으로써, 식물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물론 농약, 의약품과 같은 활성물질을 사용하여 극한 환경 조건에서 생존의 시간을 늘려 나간다. 우리가 하루에 세 번 이상은 마주하는 단어 ‘지속가능성’에 대한 질문과 일맥상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다시 앞에서 언급한 인간이 발전시킨 ‘휴면’의 생존 전략에 대해 돌아가 보자. 인류는 겨울철에 휴면 상태에 들어가는 식물들을 이해하고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겨울 작물을 재배하거나, 다음 계절을 위한 씨앗의 보존 방법을 개발했다. 인류가 자연의 순환을 이해하고 이에 맞춰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조정하고 조절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겨울에 견딜 수 있는 식물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법을 터득해 정원을 가꾸고 식물원에 간다. 오늘날의 보존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기술과 지식, 영광스러운 과거의 문화, 토착민들이 지켜오는 방대한 전통적 지식, 기술, 활동 등 말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들은 재생 가능한 자원과 에너지 효율적인 기술을 사용해 작품을 제작하고,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재료를 사용해 생태적인 제작 관행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의미에선 장기적인 안정성, 여러 재료의 지속 가능한 활용 그리고 보존 방법과 기술을 사용하는 예술가들이 늘어났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식물에서 추출한 색소를 사용해 생태 인쇄나 염색 작업을 이어나가 활성 물질의 색상 변화를 관찰한다든가 미생물을 활용한 생물 예술(Bio Art) 프로젝트 모두 활성 물질의 생물학적 특성을 실험한다. 유전자 조작 기술을 이용해 환경보전을 위한 대체 가능한 원료를 만든 얄릴라 에사이디(Jalila Essaidi)나, 디지털 제조 기술이 생물학적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네리 옥스만(Neri Oxman) 등 인간과 생명체의 연결성을 증명하고 미래를 위한 대한을 모색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서 각종 필요 자원이 없어지는 것, 공급이 끊어지는 것, 사라진다는 것, 미래에 대한 대안이 사라지는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예술가의 개입이 어떻게 ‘보존’의 역사와 문화 지식을 연구, 생성하는지, 생태학적으로 어떤 연결과 매개로 조율할 수 있을까? 환경적이며 사회 경제적 문제 속에서 문화를 보존하는 것은 가능할까? 작품을 생성해내는데 있어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거나 추적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문화, 역사적 그리고 정신성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깊은 욕구의 표현일 것이다. 여러 학문에서도 사용하는 용어인 “자기 증식적 운동”은 복제와 자신의 기능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특성이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 복제나 보존을 넘어 지식, 가치, 신념, 미적 가치의 전달과 확장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 문화의 자기 증식적 특성은 예술을 통해 가장 순수하고 직관적인 형태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예술가들의 능력일 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의 저서 『고백록』 11권에 “하지만 나는 이것만큼은 안다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은 없다.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은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면 현재의 시간은 없다.”[1] 라고 시간에 대해 성찰한다. 이는 보존의 의미에서 과거는 물리적 형태나 기억, 또는 기록된 형태로 다시 재구성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를 현재의 경험으로 변환하는 인간의 능력을 반영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보존이라는 행위를 단지 과거로부터 물리적이거나 문화적 유산을 현재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한 연속적인 대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각 시대 속에서 시작된 단서가 누군가와 연결되었을 때의 경험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말이다.
아이와 자주 가는 Socrates park 에서 작은 돌을 숨겨놓은 작은 홈
Noguchi Museum 에서 눈 쌓인 겨울날 돌멩이로 집 짓는 중
아이의 놀이 과정 중에 보존을 읽다
아이는 공원에서 주워 온 돌과 나뭇가지, 그리고 낙엽을 집 앞 마당에 나열한다. 그리고 돌에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자신만 아는 공간에 보관해 둔다. 돌의 모양은 다양하다. 그 돌을 던져 부숴보기도 하고 쌓기도 한다. 3세 아이의 독립적인 생각, 거리낌 없이 분류해 놓은 질서정연한 나뭇가지와 돌들은 자기 나름의 의식 표현이자 물체의 보존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는 표시다. 분필을 가지고 그 장소를 동그라미로 그린 후 본인 카메라로 사진을 남겨 보관한다. 놀랍다. 즉 대상을 관찰하고, 흩뜨리고, 줍고, 아무렇게나 놓아두고, 그 모양을 보는 것을. 거기에다가 스스로 기록까지 할 수 있다니 말이다. 이 과정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 작용이 어떻게 생태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지 그리고 더불어 보존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스스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경험이다. 왜냐하면 물건을 수거하고 모으는 행위는 인류 역사의 개벽 이래 상당한 시간 동안 그때까지 지구 생물들이 품고 있던 깊은 비의(秘儀)를 계승하기라도 하듯 몰두해 온 행위였기 때문이다[2]. 아이의 순수한 행위에서 시작된 나름의 의식은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반영한다. 모든 생명체는 무생물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각각은 우주의 균형과 조화를 서로 조율한다.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생명체 간의 상호 공생, 더불어 사는 삶을 연구하는 것, 이러한 삶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우리는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간다. 그럼 내 아이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10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30분에 걸쳐 걸어가면서 아이는 무엇을 발견하고, 수집하고 그 안에 가치를 부여하는지 말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바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질 그 작은 돌이나 떨어진 나뭇잎이, 하지만 아이는 다르다. 버려진 것이 아닌 가치 있는 무언가로 변신한다. 하나하나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고 생명을 유지해 주는 아이의 행동에서 또 하나를 배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새롭고 진귀한 경험을 매일 한다. 폭발할 듯한 호기심을 안고 무언가 계속해서 생산하고 창조한다. 이렇게 되면 사계절의 변화가 절대 같은 모양일 수 없다. 저마다 자기가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보존이다. 결국 계절이 변화하듯 시간이 흐르면서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그리고 훼손되는 것을 최소화시키는 것. 그것이 어떻게 보면 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순간부터 만들어왔던 삶의 원형이자 생존을 위한 훈련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이에 따라 훼손된 생태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의 영역을 위협하고 있다. 매년 3억 톤 이상의 플라스틱이 생산된다고 한다. 이 중에서 재활용의 비율은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결국 재활용이라는 이름 하에 던져진 쓰레기들은 말레이시아와 같은 개발 도상국에 옮겨져 쓰레기 더미가 연료로 사용된다. 쓰레기가 발산하는 가스 누출의 위험 속에 파묻힐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쓰레기를 가치 있는 것으로 변환하는 재생 장치가 필요하다. 위에 언급했던 네리 옥스만은 플라스틱에 대한 미생물에 의해 환경친화적으로 분해하는 생분해성 대안을 탐구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풍부한 생물 고분자 중 일부를 사용하는 물을 기반으로 제조 공정을 거치는 작품을 제작한다. 새우 껍질, 잠자리 날개와 곰팡이 조직에서 발견되는 키틴(Chitin), 식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셀룰로오스(cellulose), 그리고 펙틴(pectin) 등 고분자를 고성능 재료로 전환하기 위한 제조 플랫폼을 개발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플라스틱의 사용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함이지만 미래 생태계와 인간 생존을 돕기 위한 역할도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 그리고 기술이라는, 설명 가능한 시스템이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유형의 물질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지만 어딘가에서 발견되기를 바란다. 그것을 인간이 다시 쓸 만하게 만든다. 발견된 물질은 교환 경제를 통해 분해, 해체, 이동 그리고 다시 재조합, 재구성된다. 여러 예술 형태에서 보존이란 개념을 볼 때, 예술가는 제거와 재생, 조립과 분해의 행위와 동시에 드러내고 폭로하고 재생시키는 일 사이에서 부서트리고 만든다. 아직 미래가 생성되지 않아 과거만 불러오는 행위일까? 아니면 미래를 생성하기 위한 현재가 끝도 없이 올라가는 풍경일까? 흥미롭고 존엄하다.
인간은 전승을 위한 효율적인 도구
얼마 전 우연히 방송에서 한 방송인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의 장례문화를 체험한 장면을 보았다. 이는 마다가스카르의 ‘파마디하나(Famadihana)’라고 일컫는데 유족들이 무덤에 모여 고인의 몸을 감싼 천을 갈아주며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축제 같은 장례 문화다. 인간의 사체는 무방비 상태의 불완전한 것이기에 이를 둘러싸고 벌이는 생물들의 “세레모니” 혹은 “연회”의 상호 연대적인 행위, 즉 ‘분해’의 양상은 떠들썩하고 화려하다.[3]
“죽음이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재생을 축원하는 야생의 축하회이기도 하며, 그 파티를 주최하는 것은 우리의 본질이라고 생각해…”.[4]
우리는 춤을 추지만 눈을 뜨지 않는 사람을 기억한다. 마치 이 춤이 마지막일 것처럼 말이다. 흥겨운 음악 속에서 만난 고인. 몇 년 동안 그리워했을 각자의 슬픔과 그리움 속에서 그 어떤 말도 없이 하얀 천이 뒤덮인 나무 판때기 같은 몸을 계속해서 주무르고 만진다. 인간의 삶과 느낌, 생각의 본질을 담고 있는 그 차디찬 몸은 죽음보단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자리 같다. 멕시코 인류학자 로데스 아리즈페(Lourdes Arizpe)는 “공유된 믿음으로서 서로에게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시각적이다. 서로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꽃과 객체와 단어에 생명을 부여하냐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서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것, 즉 인류에 대한 핵심적인 도전을 주는 것은 무형의 것이다. 죽음이란 그것이 공유되었을 때 생명을 부여 받는다”.[5] 기술과 지식 및 활동이라는 형태로 보이는 무형의 유산들. 그리고 그것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들은 찰나의 예술과도 같다. 순식간에 의미는 변형될 수 있고, 동작의 순간적인 상태만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착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멕시코에서도 무형의 유산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대해 국제박물관협의회(ICOM)에서 ‘무형 유산과 멕시코의 박물관(ICOM Code of ETHICS for Museum)’이라는 주제로 콜로키엄을 조직하기도 했다. 문화유산의 기여는 관광산업을 성장케 한다. 신성한 장소의 고고학적, 유적을 방문하고 인종과 문화의 전통 특히 언어, 전통 의술, 의례, 음악, 기술 등을 보기 위해 박물관을 방문한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관광산업의 성장은 본질의 대상을 파괴한다. 위험에 처한 것은 관광산업으로 인한 비효율적인 분배와 천연자원의 감소, 엘리트주의적인 이용 수단으로 아주 비생산적이게 지속된다는 것이다. 토착민들[6]에게 모든 식물군, 동물군 토양이나 경관이 문화적인 의미 -언어, 일화나 전설, 신화 혹은 종교적 의미, 관습- 에선 아주 중요하다. 여기서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신선한 충격을 안긴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 Treasures from the Wreck of the Unbelievable》[7]이 떠오른다. 난파선의 인양 작업은 실제 발굴 작업을 그대로 따라 했고, 없는 역사적 산물을 재생산 시켰다. 재창조된 보존물 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역사와 유형의 사물들이 진실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결국 이러한 질문들이 예술가들을 계속해서 사유하게 하고, 탐구하게 하고, 실행케 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아이가 놀이를 시작함에 있어 스스로가, 무엇을 만들고,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 그러기엔 무엇을 필요로 하고, 어떤 수행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엄마는 관찰한다.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고, 분해해 보고 부숴보고 쌓아보고 정돈해 보고 흩트려 보는 이 모든 과정들. 바로 이 지점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다. 모래 사장에서 찾아온 조개, 둥글게 깎여진 유리병 조각, 흐늘거리는 해초를 담는 작은 손을 보노라면, 버려질 수도 있었던 과거를 뛰어넘는 귀여운 행동이 상상과 창조의 실마리를 잡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물질의 결여, 흐트러짐, 버려짐에 대해 아이가 행동하는 막후의 조치가 너무나 신비롭고 귀하다. 무너지고 버려지는 혹은 조합하고 재생시켜 보호하는 이 둘의 모순적 동일성이야 말로 보존의 세계를 가치 있게 만든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는 생각 없이 절대로 작업하지 않는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늘 어떤 목적을 마음에 두고 실행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필요로 한다는 것. 이것이 보존의 핵심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퇴색 없인 찬란함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늘 그 찬란함을 위해 살아간다.
이 글은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보존의 미래>(기획: 김정현)의 의뢰로 작성되었습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종합출판범우, 2008).
[2] 후지하라 다쓰시, 박성관 옮김, 『분해의 철학』, (사월의 책, 2023), p.191.
[3] 위의 책, p.288.
[4] 베른트 하인리히(Heinrich Bernd), 김명남 역,『생명에서 생명으로: 인간과 자연, 생명 존재의 순환을 관찰한 생물학자의 기록』, (궁리, 2015), pp.5-6.
[5] 실비아 싱어(Silvia Singer), 「일시적인 것의 보존: ‘2004 멕시코 국제박물관의 날’」, 『International Journal of Intangible Heritage』, Vol.1, (국립민속박물관, 2006), p.58.
[6] 여기서 토착민은 멕시코 토착민으로 서로 다른 62개의 방언을 사용하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일컫는다. 아메리카 토착민의 관리 하에 있는 영역은 최소 3천만 헥타르로 토착민들이 멕시코의 삼림지대 중 80%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감내하는 것은 가난과 차별, 일자리 부족, 문화 관련 기관의 부실한 연구 등 토착 문화가 수세기 동안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방식이 무시되거나 과소평가 된다. 위의 논문, p 59. 참조
[7] 약 2000년 전에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 후 막대한 재산을 모은 전설적인 인물이자 컬렉터인 시프 아모탄 2세(Cif Amotan II)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조각, 보석, 동전과 물품이 가득한 보물을 거대 한 선박인 아피스토스(Apistos)호에 싣고 항해를 시작했다. 각종 보물을 가득 실은 아피스토스호가 인도양에 침몰했고, 동아프리카에서 2008년에 이 난파선을 발견하여, 10년 동안의 발굴 과정을 거쳐 그 보물들을 인양, 전시했다.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 제목의 개인전은 허구의 이야기로 점철된 신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모큐멘터리(Mockumentary)다. 사실적인 촬영 기법과 박물관의 고대유물 전시 구성을 그대로 차용한 전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 실제와 허구 경계를 재조명하고 보존의 개념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된 전시다.
2024.6.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June.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