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WHO
박천(시안미술관 큐레이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는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은 사실 각기 다른 세계관에서 살아간다. 물론 ‘현실’이라는 교집합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어떤 이들은 외관상 일반적인 삶, 즉 현실이라는 교집합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독특한 취향과 관심사로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일명 ‘오덕’이라 불린다. 여기서 ‘오덕’은 ‘오타쿠’에서 파생된 용어로 일본에서 처음 등장하여, 특정 취미나 관심사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특정 분야에 깊이 ‘몰입’하고 열정적으로 연구하는 전문가를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오타쿠’가 아닌 ‘오덕(悟得)⎯깨달음을 얻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단, ‘오덕’이라는 단어가 ‘오타쿠’에서 파생되었기에 오타쿠스러움도 녹아있다는 것은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오덕이 가장 많이 속해 있는 분야 중 하나가 예술일 것이다. 통계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 다른 사람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사람들만 모인 집단이 예술가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양헌 작가는 그중에서도 좀 더 깊은 의미의 오덕 중 하나이다. 작품을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이양헌 또한 어릴 적부터 혼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오롯이 혼자 보내온 시간들이 그의 상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와 같은 그의 오덕스러움은 단순히 취미에 그치지 않고, 예술적 창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양헌, Miniature, 2024, oil on canvas, 210.0x140.0cm
이양헌의 작품에는 오덕스러운 면모가 잘 드러난다.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잡초나 먼지, 작은 날벌레 같은 일상 속의 사소한 것들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저걸 왜 그리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양헌에게는 이 모든 것이 중요한 예술적 소재가 된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이렇게 작고 의미 없는 듯한 것들로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마치 이 땅의 첫 생명체가 이름 모를 미생물이었던 것처럼.
이양헌에게 창작의 원천은 바로 이름 붙여지지 않은 주변으로부터 비롯된다. 그의 작품 세계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외부의 일반적인 사물이나 어떤 풍경 혹은 현상이 아니라, 그에게 있어 저절로 상상되게끔 하는 것들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그가 일부러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상상되는 것들이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절로 상상되는 것들이 명확하지 않고 추상적일 때, 이를 표현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대학 시절에는 추상표현, 색면추상, 구상 회화 등 다양한 장르를 훈련하였다. 여담이지만 과제는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작업량이 많아 혼난 적은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못 그려서(?) 혼난 적은 있다고 한다. 어쨌든 돌아와서, 이양헌은 주변의 자연물에서 파생되는 추상적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추상적 표현들을 시도하였으나, 종내는 캔버스에 물감과 행위만이 막연히 남게 되어 구상 회화를 연구할 만큼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빌드 업에 몰입하였다.
이양헌, A Monster, 2024, oil on canvas, 45.5x37.9cm
4년간의 빌드 업을 통해 이양헌은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찾았다. 그리기와 지우기(덮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대상으로부터 머릿속에서 구성되는 상상까지 일련의 과정을 그대로 이행한다. 먼저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듯이 스케치하는데, 하나의 색으로 전체적인 계획을 그리는 게 아니라, 이 단계에서부터 대상에 맞는 색으로 스케치를 진행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그린 대상을 다른 색들로 덮어가며 지우기 시작한다. 또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대상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형용사적인 특성만을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품에 추상적이고도 깊이 있는 질감을 부여한다. 관객은 구체적인 형상을 보는 대신, 그 대상이 전달하는 감정과 느낌에 집중하게 된다. 형용사는 명사처럼 대상을 명징화시키거나 구속하지 않고, 대상의 본질과 의미를 확장시킨다. 결국 캔버스에는 구체적인 형태는 사라지고, 대상의 본질적인 특성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이양헌의 이러한 과정은 그가 일상에서 접하는 것들을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그리기와 지우기는 이양헌의 예술 창작 과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양헌의 행위와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해체와 재건을 반복하며 오늘날의 세계관을 구성해왔고, 그리고 앞으로 구성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접근 방식에 대한 해석이 과대 해석일 수도 있겠으나, 이양헌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첫 번째 과정임은 확실하다.
Into the Unknown_전경, 서북갤러리, 천안
그렇게 구축할 새로운 세계에는 당연히 그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자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존재자들은 이양헌의 오덕스러움을 설명하며 서술한 것과 같이 단순히 그의 상상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일상에서 접하는 존재자(사물)와 존재(현상)에서 선택되고 재해석된 결과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양헌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존재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거나 주목하지 않는 것들이다. 오히려 혐오하거나 기피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모종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의 대상 선택은 단순히 무작위적인 것은 아니다. 자신이 다니는 길, 바라보는 풍경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와 상관없이 접촉하게 되는 것들에 대해 주목한다. 작가가 아무리 오덕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더라도 먼지나 날벌레 따위를 찾아다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친 존재자의 혐오(구축된 의미)를 해체하고 존재(방식)를 구성하려 하는 이유는 쓸모없는 것으로부터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함일 것이다. 예술의 존재방식이 그러한 것과 같이 말이다.
이양헌은 첫 번째 개인전 〈Shape of Haze〉(인천 공간운솔 2021)과 두 번째 개인전 〈LOG-ON〉(대구 비영리전시공간싹 2022)에서 그 존재자들로 세계관을 서서히 구축하기 시작했다. 잡초 더미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와 그 주위를 일정하게 맴도는 날벌레인 팅커벨로 서사를 구성하였는데 그의 캔버스에서 아지랑이는 ‘fountain(분수)’이 되었고, 팅커벨은 ‘guardian(수호자)’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이양헌 만의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개인전 〈Into the Unknwon〉(천안 서북갤러리 2023)에서는 가디언과 함께 이름 모를 부유물에 대한 개념이 새로이 생겨났다.
이양헌 작가의 작품에서 '부유물'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을 넘어, 그의 상상 혹은 망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이 부유물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다양한 형태의 작은 입자들과 여러 대상들을 포함한다. 앞서 잡초, 아지랑이, 날벌레 등과 같은 대상을 포함하는 개념의 부유물은 더욱 확장된 세계관을 암시한다. 두 번째 개인전까지의 세계가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을 묘사한 것이라면, 세 번째 개인전부터 등장한 부유물은 일련의 생태계를 묘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때문에 부유물이라는 개념 군에 속하는 존재자들의 본질적 특성을 추출하여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작품 제작 방식과 더하여 정제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는 작품의 제목도 직접적인 명사가 아닌, ‘twinkle(반짝 빛나다)’, ‘sparkling(반짝이는)’과 같이 상태를 드러내는 형용사나 동사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형용사스러운 ‘특성’만을 남기는 작업 방식과 작업의 내용이 궤를 함께하기 시작한 것은 그만한 고민과 실천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개인전 〈Observer〉(부산 아트스페이스링크 2024)에서는 이러한 생태계를 더욱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observer(옵저버)’라는 단어가 ‘옵서버(observer)’, 다시 말해 단순히 ‘목격자’ 혹은 ‘감시자’를 의미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의 관측 기능이 있는 유닛의 이름이다. 이 옵저버는 특정한 조건이 없는 한 상대에게 노출이 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은밀히 관찰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옵저버를 은유하여 전시 제목을 구성한 이유는 이양헌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관의 확장에 있다.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부유물 군에 있는 각각의 존재자들에게 모종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게임에서는 주체와 객체를 피아로 구분하지만 현실에서는 명확한 피아가 없다. 주체와 객체를 그대로 상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이양헌이 되고 객체는 보편적인 사람들이 된다. 객체에게 옵저버는 보이지 않는다. 보편적인 사람들(객체)이 먼지나 날벌레 따위를 굳이 보려 하지 않고 기피하기에 이 대상은 결코 보이지 않는 옵저버가 된다. 반대로 이양헌에게는 미묘하게 지각되는 존재이기에 탐지 가능한 옵저버가 되는 것이다. 즉 이양헌 작가의 옵저버(부유물)는 아직까지 탐색되지 않은 다른 무언가와 그것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는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작품의 소재가 잡초에서 분수, 그리고 가디언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연속되고 확장해 온 것처럼 이제는 부유물의 각각의 존재자들이 온전히 그 역할에 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보다 구체적인 세계의 구축을 꾀하고 있다.
이양헌 개인전_Into the Unknown_전경, 서북갤러리, 천안
이토록 정교하고도 오덕스럽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확장해나가고 있다 하더라도, 오덕스럽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 또한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자신만의 세계, 자기만 알고 타인과 소통되지 않는, 혹은 소통될 수 없는 간극으로부터 기인한다. 작품을 언뜻 봤을 때, 이미지가 비슷비슷하고 대상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아채기 어렵기에, 범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혼자만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형태가 없는 추상이라는 범주에 있는 작품들이 받는 오해와 같다. 다행스럽게도 이양헌은 오덕이지만 작가이다. 으레 그렇듯 예술가, 그리고 작가들은 자신의 세계에 방문할 수 있는 열쇠를 늘 이미지 속에 배치해 둔다. 그것은 바로 ‘운동성’이다. 대개 추상적인 작업이 그렇듯,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작업을 읽을 수 있는 키워드가 필요하다. 이양헌의 작업 또한 난해하고 복잡해 보일 수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미지 속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도 어렵다면 리드미컬한 음악을 들으며 작품을 보는 것도 좋겠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의 작품 속 존재자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즉 명사화된 대상이 아니라, 그들만의 움직임과 방식을 통해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있다. 이미지, 물감의 궤적을 따라 눈을 이동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위에 각각의 존재자가 반복적으로 행한 율동의 흔적을 통해, 이양헌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양헌 작가는 1998년생의 신진 작가로, 2021년 8월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활동 기간으로 따지자면 만 3년이 채 안 되는 시간임에도 벌써 네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매년 한 번의 개인전을 가진 셈이다. 그는 매번 전시 때마다(심지어 단체전까지) 신작으로 작품을 구성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그만한 연구와 많은 작업량이 이러한 활동을 가능케 했음을 방증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세계는 구축에 있어 초기 단계에 있다. 살펴본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제 막 시작한 그의 세계관은 앞으로도 점점 확장되고 깊어질 것이다. 오덕스러움을 쫓아가는 것은 어쩌면 힘에 부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지에서 열쇠를 하나씩 얻으며 천천히 뒤따라 간다면 더 방대해질 이야기 속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2024.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오덕WHO
박천(시안미술관 큐레이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는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은 사실 각기 다른 세계관에서 살아간다. 물론 ‘현실’이라는 교집합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어떤 이들은 외관상 일반적인 삶, 즉 현실이라는 교집합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독특한 취향과 관심사로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일명 ‘오덕’이라 불린다. 여기서 ‘오덕’은 ‘오타쿠’에서 파생된 용어로 일본에서 처음 등장하여, 특정 취미나 관심사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특정 분야에 깊이 ‘몰입’하고 열정적으로 연구하는 전문가를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오타쿠’가 아닌 ‘오덕(悟得)⎯깨달음을 얻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단, ‘오덕’이라는 단어가 ‘오타쿠’에서 파생되었기에 오타쿠스러움도 녹아있다는 것은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오덕이 가장 많이 속해 있는 분야 중 하나가 예술일 것이다. 통계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 다른 사람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사람들만 모인 집단이 예술가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양헌 작가는 그중에서도 좀 더 깊은 의미의 오덕 중 하나이다. 작품을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이양헌 또한 어릴 적부터 혼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오롯이 혼자 보내온 시간들이 그의 상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와 같은 그의 오덕스러움은 단순히 취미에 그치지 않고, 예술적 창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양헌, Miniature, 2024, oil on canvas, 210.0x140.0cm
이양헌의 작품에는 오덕스러운 면모가 잘 드러난다.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잡초나 먼지, 작은 날벌레 같은 일상 속의 사소한 것들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저걸 왜 그리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양헌에게는 이 모든 것이 중요한 예술적 소재가 된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이렇게 작고 의미 없는 듯한 것들로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마치 이 땅의 첫 생명체가 이름 모를 미생물이었던 것처럼.
이양헌에게 창작의 원천은 바로 이름 붙여지지 않은 주변으로부터 비롯된다. 그의 작품 세계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외부의 일반적인 사물이나 어떤 풍경 혹은 현상이 아니라, 그에게 있어 저절로 상상되게끔 하는 것들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그가 일부러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상상되는 것들이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절로 상상되는 것들이 명확하지 않고 추상적일 때, 이를 표현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대학 시절에는 추상표현, 색면추상, 구상 회화 등 다양한 장르를 훈련하였다. 여담이지만 과제는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작업량이 많아 혼난 적은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못 그려서(?) 혼난 적은 있다고 한다. 어쨌든 돌아와서, 이양헌은 주변의 자연물에서 파생되는 추상적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추상적 표현들을 시도하였으나, 종내는 캔버스에 물감과 행위만이 막연히 남게 되어 구상 회화를 연구할 만큼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빌드 업에 몰입하였다.
이양헌, A Monster, 2024, oil on canvas, 45.5x37.9cm
4년간의 빌드 업을 통해 이양헌은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찾았다. 그리기와 지우기(덮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대상으로부터 머릿속에서 구성되는 상상까지 일련의 과정을 그대로 이행한다. 먼저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듯이 스케치하는데, 하나의 색으로 전체적인 계획을 그리는 게 아니라, 이 단계에서부터 대상에 맞는 색으로 스케치를 진행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그린 대상을 다른 색들로 덮어가며 지우기 시작한다. 또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대상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형용사적인 특성만을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품에 추상적이고도 깊이 있는 질감을 부여한다. 관객은 구체적인 형상을 보는 대신, 그 대상이 전달하는 감정과 느낌에 집중하게 된다. 형용사는 명사처럼 대상을 명징화시키거나 구속하지 않고, 대상의 본질과 의미를 확장시킨다. 결국 캔버스에는 구체적인 형태는 사라지고, 대상의 본질적인 특성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이양헌의 이러한 과정은 그가 일상에서 접하는 것들을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그리기와 지우기는 이양헌의 예술 창작 과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양헌의 행위와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해체와 재건을 반복하며 오늘날의 세계관을 구성해왔고, 그리고 앞으로 구성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접근 방식에 대한 해석이 과대 해석일 수도 있겠으나, 이양헌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첫 번째 과정임은 확실하다.
Into the Unknown_전경, 서북갤러리, 천안
그렇게 구축할 새로운 세계에는 당연히 그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자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존재자들은 이양헌의 오덕스러움을 설명하며 서술한 것과 같이 단순히 그의 상상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일상에서 접하는 존재자(사물)와 존재(현상)에서 선택되고 재해석된 결과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양헌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존재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거나 주목하지 않는 것들이다. 오히려 혐오하거나 기피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모종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의 대상 선택은 단순히 무작위적인 것은 아니다. 자신이 다니는 길, 바라보는 풍경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와 상관없이 접촉하게 되는 것들에 대해 주목한다. 작가가 아무리 오덕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더라도 먼지나 날벌레 따위를 찾아다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친 존재자의 혐오(구축된 의미)를 해체하고 존재(방식)를 구성하려 하는 이유는 쓸모없는 것으로부터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함일 것이다. 예술의 존재방식이 그러한 것과 같이 말이다.
이양헌은 첫 번째 개인전 〈Shape of Haze〉(인천 공간운솔 2021)과 두 번째 개인전 〈LOG-ON〉(대구 비영리전시공간싹 2022)에서 그 존재자들로 세계관을 서서히 구축하기 시작했다. 잡초 더미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와 그 주위를 일정하게 맴도는 날벌레인 팅커벨로 서사를 구성하였는데 그의 캔버스에서 아지랑이는 ‘fountain(분수)’이 되었고, 팅커벨은 ‘guardian(수호자)’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이양헌 만의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개인전 〈Into the Unknwon〉(천안 서북갤러리 2023)에서는 가디언과 함께 이름 모를 부유물에 대한 개념이 새로이 생겨났다.
이양헌 작가의 작품에서 '부유물'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을 넘어, 그의 상상 혹은 망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이 부유물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다양한 형태의 작은 입자들과 여러 대상들을 포함한다. 앞서 잡초, 아지랑이, 날벌레 등과 같은 대상을 포함하는 개념의 부유물은 더욱 확장된 세계관을 암시한다. 두 번째 개인전까지의 세계가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을 묘사한 것이라면, 세 번째 개인전부터 등장한 부유물은 일련의 생태계를 묘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때문에 부유물이라는 개념 군에 속하는 존재자들의 본질적 특성을 추출하여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작품 제작 방식과 더하여 정제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는 작품의 제목도 직접적인 명사가 아닌, ‘twinkle(반짝 빛나다)’, ‘sparkling(반짝이는)’과 같이 상태를 드러내는 형용사나 동사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형용사스러운 ‘특성’만을 남기는 작업 방식과 작업의 내용이 궤를 함께하기 시작한 것은 그만한 고민과 실천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개인전 〈Observer〉(부산 아트스페이스링크 2024)에서는 이러한 생태계를 더욱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observer(옵저버)’라는 단어가 ‘옵서버(observer)’, 다시 말해 단순히 ‘목격자’ 혹은 ‘감시자’를 의미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의 관측 기능이 있는 유닛의 이름이다. 이 옵저버는 특정한 조건이 없는 한 상대에게 노출이 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은밀히 관찰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옵저버를 은유하여 전시 제목을 구성한 이유는 이양헌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관의 확장에 있다.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부유물 군에 있는 각각의 존재자들에게 모종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게임에서는 주체와 객체를 피아로 구분하지만 현실에서는 명확한 피아가 없다. 주체와 객체를 그대로 상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이양헌이 되고 객체는 보편적인 사람들이 된다. 객체에게 옵저버는 보이지 않는다. 보편적인 사람들(객체)이 먼지나 날벌레 따위를 굳이 보려 하지 않고 기피하기에 이 대상은 결코 보이지 않는 옵저버가 된다. 반대로 이양헌에게는 미묘하게 지각되는 존재이기에 탐지 가능한 옵저버가 되는 것이다. 즉 이양헌 작가의 옵저버(부유물)는 아직까지 탐색되지 않은 다른 무언가와 그것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는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작품의 소재가 잡초에서 분수, 그리고 가디언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연속되고 확장해 온 것처럼 이제는 부유물의 각각의 존재자들이 온전히 그 역할에 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보다 구체적인 세계의 구축을 꾀하고 있다.
이양헌 개인전_Into the Unknown_전경, 서북갤러리, 천안
이토록 정교하고도 오덕스럽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확장해나가고 있다 하더라도, 오덕스럽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 또한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자신만의 세계, 자기만 알고 타인과 소통되지 않는, 혹은 소통될 수 없는 간극으로부터 기인한다. 작품을 언뜻 봤을 때, 이미지가 비슷비슷하고 대상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아채기 어렵기에, 범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혼자만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형태가 없는 추상이라는 범주에 있는 작품들이 받는 오해와 같다. 다행스럽게도 이양헌은 오덕이지만 작가이다. 으레 그렇듯 예술가, 그리고 작가들은 자신의 세계에 방문할 수 있는 열쇠를 늘 이미지 속에 배치해 둔다. 그것은 바로 ‘운동성’이다. 대개 추상적인 작업이 그렇듯,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작업을 읽을 수 있는 키워드가 필요하다. 이양헌의 작업 또한 난해하고 복잡해 보일 수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미지 속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도 어렵다면 리드미컬한 음악을 들으며 작품을 보는 것도 좋겠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의 작품 속 존재자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즉 명사화된 대상이 아니라, 그들만의 움직임과 방식을 통해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있다. 이미지, 물감의 궤적을 따라 눈을 이동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위에 각각의 존재자가 반복적으로 행한 율동의 흔적을 통해, 이양헌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양헌 작가는 1998년생의 신진 작가로, 2021년 8월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활동 기간으로 따지자면 만 3년이 채 안 되는 시간임에도 벌써 네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매년 한 번의 개인전을 가진 셈이다. 그는 매번 전시 때마다(심지어 단체전까지) 신작으로 작품을 구성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그만한 연구와 많은 작업량이 이러한 활동을 가능케 했음을 방증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세계는 구축에 있어 초기 단계에 있다. 살펴본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제 막 시작한 그의 세계관은 앞으로도 점점 확장되고 깊어질 것이다. 오덕스러움을 쫓아가는 것은 어쩌면 힘에 부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지에서 열쇠를 하나씩 얻으며 천천히 뒤따라 간다면 더 방대해질 이야기 속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2024.9.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Septem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