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결의
박준수
미술 시장 전문가들은 유명 작가에 비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갤러리조선 여준수 실장의 지론에 따르면 ‘갤러리스트는 아티스트 뒤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중요성에 대해 아직 대중들이 잘 모르고, 그들도 아티스트, 컬렉터와 관계할 뿐 대중에게 자신들을 알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 생태계에서 중요한 축을 맡고 있는 그들을 모르고 지금의 시대를 이해할 수 없다. 카스텔리, 가고시안, 데이비드 즈워너, 하우저앤워스 같은 내노라하는 세계 유명 갤러리들이 성공한 갤러리스트 이름을 걸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도 우리가 잘 모르는 무대 뒤 그들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 국제갤러리 이현숙 회장처럼 한국 미술 시장을 지금에 이르게 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수많은 선배 갤러리스트들이 계시지만, 이들은 차차 다루기로 하고, 가까이에 있는 내가 만난 세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다.
도원결의 출처 : KOEI 삼국지
바야흐로 2017년 봄, 거리에는 복사꽃이 만발한 어느 늦은 금요일 밤이었다. 코엑스 일대는 화랑미술제를 마치고 저녁을 드시고 있는 갤러리 대표들로 북적였다. 어른들이 많아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그 자리를 피해 김동현, 장은경, 정희철 세 사람은 코엑스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만났다. 미술 시장 전문가들을 모아 어벤져스(당시는 ‘드림팀’이라는 표현을 썼다)를 만들고 싶던 정희철이 그들을 불러모았다.
정희철은 인사동에서 존경 받는 오래된 컬렉터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작품을 컬렉팅하였기에 그는 작품이 가득한 집안에서 자랐고, 주말마다 부모님과 함께 인사동을 다니며 작품을 보는 안목을 키웠다. 가장 친한 친구들조차 또래 친구들이 아닌 갤러리스트였다. 그는 지금도 많은 갤러리 대표들과 호형호제하며 지낸다. 그들이 갤러리 2세로 미술계에 발을 담궜을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 군대를 가고, 백일휴가를 나왔을 때도 함께 보냈을 정도였다. 까마득히 높아 보이는 대선배인 동산방 박우홍 회장, 금산갤러리 황달성 회장을 삼촌이라 생각할 정도로 미술 시장을 가깝게 보며 자랐기에 갤러리 문턱이 엄청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달리 어린 그에게 가장 재미있는 놀이터는 그가 사랑하는 작품들이 가득한 갤러리였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그는 부모님의 사업을 물려받고 컬렉터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어떤 개인사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갤러리에서 작품을 보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갤러리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금산갤러리였다. 지금도 한국화랑협회 회장으로 다양한 사업을 벌리기 좋아하는 황달성 대표는 당시에도 여러가지 사업을 펼쳤다. 중국과 일본에 갤러리를 내고, 해외 아트페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도쿄와 홍콩에서 아시아호텔아트페어를 열기도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천군만마같은 정희철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금산갤러리를 이끌어 가던 정희철은 더 넓은 미술시장을 맛보기 위해 뉴욕행을 감행했었다. 2015년 동산방화랑 박우홍 대표가 한국화랑협회 17대 회장이 되며, 키아프를 국제아트페어로 확장시키기 위한 구원투수로 그를 불러온다. 2002년 시작부터 국제아트페어를 표방했던 키아프지만, 한중일 교류전과 같은 수준에 불과했던 키아프가 국제아트페어의 국제 표준을 따라가기 시작한 것은 정희철의 공이 크다. 그는 프리즈가 서울에 진출하기 전에도 키아프를 아시아의 아트허브로 만드는 포부가 있던 사람이었다. 3년이라는 키아프 팀장을 하는 동안 그런 포석을 만들었다. 해외갤러리 유치를 위해 홍콩, 대만, 상하이, 런던, 뉴욕, 마이애미로 미친듯이 날아다녔다. 귀국편 공항에서 캐리어만 바꿔 다시 출국하기 까지 했을까. 그래서 그는 더욱 더 업계에서 일 잘하는 사람들을 간절히 동료를 원했다. 일을 나눠 맡아 줄 동료가 필요했다.
원피스의 한 장면 출처: 원피스
김동현은 계획적이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품을 지녔다. 서울예고를 나와 서울대를 나온 그는 짜여진 탄탄대로의 엘리트 코스를 걸은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남이 짜놓은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예민하게 계획을 짜고, 그에 맞춰 실행에 옮긴다. 모든 일이든 깊게 생각하고, 고민하여 장기적인 플랜을 짜는 사람이었고, 계획을 실행에 옮겨 결국 목표를 이루었다. 즉흥적인 사람이 너무 많은 미술판에 몇 수 앞을 내다보며 플랜을 짜고 실행에 옮겨 성공하는 사람은 드물다. 입이 무겁고, 머리속에 계산이 끝나야 움직이는 그를 보고 돌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두드리고 있어 답답하다는 평도 있지만, 그는 과거에 만든 오래된 돌다리가 시대에 맞지 않다면 그것을 당장 건너는게 문제가 아니라, 돌다리를 부수고, 더 튼튼하고 빨리 건널 수 있는 철교를 놓을 계획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장기적인 플랜을 짜기 위한 명석함과 그것을 실행에 옮겨가는 인내심을 갖고 있다. 당시 그는 이직도, 퇴사도 많은 미술판에서 10년 동안 이화익갤러리 실장으로 묵묵히 일하며 높은 건물을 세우기 위한 튼튼한 기초 공사를 하고 있었다. 정희철은 자신에게는 부족한 이런 부분을 김동현이 채워줄 수 있다고 믿으며 함께 일을 하고 싶어했다.
정희철이 키아프를 국제아트페어의 스탠다드에 맞춰가는 포석을 놓았다면, 바통을 이어 받아 김동현이 이끌었던 키아프는 팬데믹이라는 악재를 안정적으로 극복하여, 한국 미술 시장 중흥기를 맞이하였으며, 키아프와 프리즈의 동시개최 5년이라는 장기적인 과제에 기반을 만들었다. 정희철이 자유 분방하게 목표를 위해 날아가는 아이언맨이라면, 김동현은 명분을 탄탄히 쌓아가며 정도를 걷는 캡틴아메리카였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출처 : pinterest
반면, 장은경은 정희철과 김동현이 갖지 못한 유연함을 가졌다. 예화랑에서 일을 시작해서 지서울, 아트부산을 거쳐, 한국화랑협회와 케이옥션, 그리고 지금 열매컴퍼니로 가기까지 정말 다양한 길을 걸었다. 갤러리스트로, 아트페어 오거나이저로, 옥셔니스트와 지금의 신사업 분야까지 그녀가 안거쳐간 길이 없다. 말단 갤러리스트로 시작한 그녀는 소위 쎈여자가 많은 미술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관계 속에 자신의 포지션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가며 커왔다. 그 와중에 남을 울릴 선택을 하기도, 자신이 눈물 흘릴 선택을 하기도 했지만, 그 때는 그녀도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할 처지였을 것이다. 정희철과 김동현이 앞만 보고 달려간다면, 장은경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정희철은 키아프에 가장 부족했던 스폰서십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장은경을 생각했다. 당시 스폰서십 담당자가 겨우 나였으니, 당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스폰서를 가지고 올 수 있었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소개해줘서 연결 시켜 준 스폰서를 잘 관리하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정희철은 장은경이 쌓아온 넓은 네트워크와 그것을 유연하게 관리하는 그녀의 능력이 필요했다. 그녀의 넓은 네트워크와 처세술에는 어려운 미술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치열함이 녹아있다. 훗날 나는 장은경과 일하며 그런 부분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출처 : 베가본드, 이노우에 타케히코
그렇게 서로 다른 셋은 그날 함께 만났다. 셋이 일하는 형태와 방식, 걸어온 길은 서로 사뭇 달랐지만 셋이 결국 바라는 바는 같았다. 한국 미술 시장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발전시키자!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후배들이 걸을 땐 조금 더 편히 갈 수 있게 만들자! 그날에 함께 있었던 순간이 내게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처럼 뜻 깊은 순간이었다. 하늘이 결국 세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을 시기하여 그런 기회를 주진 않았기에 안타깝게도, 지금은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고 있지만, 늘 그 때와 같은 마음으로 한국 미술 시장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술잔을 들고 함께 외친다.
“그만 두지 말자!!!”
김동현은 현재 전시 및 아트페어 기획사 XX(더블엑스)의 대표이사로, 장은경은 다양한 미술 사업을 하는 열매컴퍼니 CSO로, 정희철은 전시기획자와 아트 어드바이저로 활동하고 있다.
2024.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Octo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도원결의
박준수
미술 시장 전문가들은 유명 작가에 비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갤러리조선 여준수 실장의 지론에 따르면 ‘갤러리스트는 아티스트 뒤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중요성에 대해 아직 대중들이 잘 모르고, 그들도 아티스트, 컬렉터와 관계할 뿐 대중에게 자신들을 알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 생태계에서 중요한 축을 맡고 있는 그들을 모르고 지금의 시대를 이해할 수 없다. 카스텔리, 가고시안, 데이비드 즈워너, 하우저앤워스 같은 내노라하는 세계 유명 갤러리들이 성공한 갤러리스트 이름을 걸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도 우리가 잘 모르는 무대 뒤 그들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 국제갤러리 이현숙 회장처럼 한국 미술 시장을 지금에 이르게 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수많은 선배 갤러리스트들이 계시지만, 이들은 차차 다루기로 하고, 가까이에 있는 내가 만난 세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다.
도원결의 출처 : KOEI 삼국지
바야흐로 2017년 봄, 거리에는 복사꽃이 만발한 어느 늦은 금요일 밤이었다. 코엑스 일대는 화랑미술제를 마치고 저녁을 드시고 있는 갤러리 대표들로 북적였다. 어른들이 많아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그 자리를 피해 김동현, 장은경, 정희철 세 사람은 코엑스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만났다. 미술 시장 전문가들을 모아 어벤져스(당시는 ‘드림팀’이라는 표현을 썼다)를 만들고 싶던 정희철이 그들을 불러모았다.
정희철은 인사동에서 존경 받는 오래된 컬렉터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작품을 컬렉팅하였기에 그는 작품이 가득한 집안에서 자랐고, 주말마다 부모님과 함께 인사동을 다니며 작품을 보는 안목을 키웠다. 가장 친한 친구들조차 또래 친구들이 아닌 갤러리스트였다. 그는 지금도 많은 갤러리 대표들과 호형호제하며 지낸다. 그들이 갤러리 2세로 미술계에 발을 담궜을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 군대를 가고, 백일휴가를 나왔을 때도 함께 보냈을 정도였다. 까마득히 높아 보이는 대선배인 동산방 박우홍 회장, 금산갤러리 황달성 회장을 삼촌이라 생각할 정도로 미술 시장을 가깝게 보며 자랐기에 갤러리 문턱이 엄청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달리 어린 그에게 가장 재미있는 놀이터는 그가 사랑하는 작품들이 가득한 갤러리였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그는 부모님의 사업을 물려받고 컬렉터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어떤 개인사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갤러리에서 작품을 보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갤러리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금산갤러리였다. 지금도 한국화랑협회 회장으로 다양한 사업을 벌리기 좋아하는 황달성 대표는 당시에도 여러가지 사업을 펼쳤다. 중국과 일본에 갤러리를 내고, 해외 아트페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도쿄와 홍콩에서 아시아호텔아트페어를 열기도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천군만마같은 정희철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금산갤러리를 이끌어 가던 정희철은 더 넓은 미술시장을 맛보기 위해 뉴욕행을 감행했었다. 2015년 동산방화랑 박우홍 대표가 한국화랑협회 17대 회장이 되며, 키아프를 국제아트페어로 확장시키기 위한 구원투수로 그를 불러온다. 2002년 시작부터 국제아트페어를 표방했던 키아프지만, 한중일 교류전과 같은 수준에 불과했던 키아프가 국제아트페어의 국제 표준을 따라가기 시작한 것은 정희철의 공이 크다. 그는 프리즈가 서울에 진출하기 전에도 키아프를 아시아의 아트허브로 만드는 포부가 있던 사람이었다. 3년이라는 키아프 팀장을 하는 동안 그런 포석을 만들었다. 해외갤러리 유치를 위해 홍콩, 대만, 상하이, 런던, 뉴욕, 마이애미로 미친듯이 날아다녔다. 귀국편 공항에서 캐리어만 바꿔 다시 출국하기 까지 했을까. 그래서 그는 더욱 더 업계에서 일 잘하는 사람들을 간절히 동료를 원했다. 일을 나눠 맡아 줄 동료가 필요했다.
원피스의 한 장면 출처: 원피스
김동현은 계획적이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품을 지녔다. 서울예고를 나와 서울대를 나온 그는 짜여진 탄탄대로의 엘리트 코스를 걸은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남이 짜놓은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예민하게 계획을 짜고, 그에 맞춰 실행에 옮긴다. 모든 일이든 깊게 생각하고, 고민하여 장기적인 플랜을 짜는 사람이었고, 계획을 실행에 옮겨 결국 목표를 이루었다. 즉흥적인 사람이 너무 많은 미술판에 몇 수 앞을 내다보며 플랜을 짜고 실행에 옮겨 성공하는 사람은 드물다. 입이 무겁고, 머리속에 계산이 끝나야 움직이는 그를 보고 돌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두드리고 있어 답답하다는 평도 있지만, 그는 과거에 만든 오래된 돌다리가 시대에 맞지 않다면 그것을 당장 건너는게 문제가 아니라, 돌다리를 부수고, 더 튼튼하고 빨리 건널 수 있는 철교를 놓을 계획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장기적인 플랜을 짜기 위한 명석함과 그것을 실행에 옮겨가는 인내심을 갖고 있다. 당시 그는 이직도, 퇴사도 많은 미술판에서 10년 동안 이화익갤러리 실장으로 묵묵히 일하며 높은 건물을 세우기 위한 튼튼한 기초 공사를 하고 있었다. 정희철은 자신에게는 부족한 이런 부분을 김동현이 채워줄 수 있다고 믿으며 함께 일을 하고 싶어했다.
정희철이 키아프를 국제아트페어의 스탠다드에 맞춰가는 포석을 놓았다면, 바통을 이어 받아 김동현이 이끌었던 키아프는 팬데믹이라는 악재를 안정적으로 극복하여, 한국 미술 시장 중흥기를 맞이하였으며, 키아프와 프리즈의 동시개최 5년이라는 장기적인 과제에 기반을 만들었다. 정희철이 자유 분방하게 목표를 위해 날아가는 아이언맨이라면, 김동현은 명분을 탄탄히 쌓아가며 정도를 걷는 캡틴아메리카였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출처 : pinterest
반면, 장은경은 정희철과 김동현이 갖지 못한 유연함을 가졌다. 예화랑에서 일을 시작해서 지서울, 아트부산을 거쳐, 한국화랑협회와 케이옥션, 그리고 지금 열매컴퍼니로 가기까지 정말 다양한 길을 걸었다. 갤러리스트로, 아트페어 오거나이저로, 옥셔니스트와 지금의 신사업 분야까지 그녀가 안거쳐간 길이 없다. 말단 갤러리스트로 시작한 그녀는 소위 쎈여자가 많은 미술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관계 속에 자신의 포지션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가며 커왔다. 그 와중에 남을 울릴 선택을 하기도, 자신이 눈물 흘릴 선택을 하기도 했지만, 그 때는 그녀도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할 처지였을 것이다. 정희철과 김동현이 앞만 보고 달려간다면, 장은경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정희철은 키아프에 가장 부족했던 스폰서십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장은경을 생각했다. 당시 스폰서십 담당자가 겨우 나였으니, 당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스폰서를 가지고 올 수 있었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소개해줘서 연결 시켜 준 스폰서를 잘 관리하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정희철은 장은경이 쌓아온 넓은 네트워크와 그것을 유연하게 관리하는 그녀의 능력이 필요했다. 그녀의 넓은 네트워크와 처세술에는 어려운 미술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치열함이 녹아있다. 훗날 나는 장은경과 일하며 그런 부분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출처 : 베가본드, 이노우에 타케히코
그렇게 서로 다른 셋은 그날 함께 만났다. 셋이 일하는 형태와 방식, 걸어온 길은 서로 사뭇 달랐지만 셋이 결국 바라는 바는 같았다. 한국 미술 시장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발전시키자!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후배들이 걸을 땐 조금 더 편히 갈 수 있게 만들자! 그날에 함께 있었던 순간이 내게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처럼 뜻 깊은 순간이었다. 하늘이 결국 세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을 시기하여 그런 기회를 주진 않았기에 안타깝게도, 지금은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고 있지만, 늘 그 때와 같은 마음으로 한국 미술 시장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술잔을 들고 함께 외친다.
“그만 두지 말자!!!”
김동현은 현재 전시 및 아트페어 기획사 XX(더블엑스)의 대표이사로, 장은경은 다양한 미술 사업을 하는 열매컴퍼니 CSO로, 정희철은 전시기획자와 아트 어드바이저로 활동하고 있다.
2024.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Octo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