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원시인의 아들이다
박천(시안미술관 큐레이터)
삶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며 살아가지만, 그 모든 경험이 진정한 앎을 제공하거나 존재의 본질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질 수 있는 것에만 의존하는 우리는 어느새 감각의 세계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살아가는 방식에는 감각 너머의, 경험을 초월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칸트가 말하는 감각을 초월한 ‘선험’은 우리의 인식 구조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이 선험의 세계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이미 작동되며, 우리의 시간과 존재를 규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계가 알려주는 시간 속에 스스로를 끼워맞추며 살아가기 바빠서,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로, 어떤 의미로 살아가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의 무심한 소비자로 전락한 채 살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곽훈 작가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는 주제이다.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 《선험의 전이》(2024.08.13.~09.26.)는 이러한 작가의 철학적 질문을 총체적으로 풀어내었다. 전시에서 작가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시간과 존재에 대한 사유를 다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이번 전시의 일환인 ‘작가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시집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2024, ㈜시로여는세상)에 담긴 시들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언어로도 표현하였다. 그의 시 「팔」에서는 경험을 초월한 선험적 인식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담아내었고,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가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현되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팔
불을 훔치던 팔이
강가에서 조개를 잡던 팔이
올무와 몽둥이로 토끼를 쫓던 팔이
섬에서 섬으로 노를 저어가던 팔이
활과 창을 들고 이웃마을로 약탈하러 가던 팔이
M1 소총을 메고 훈련을 받던 팔이
새벽 4시
캄캄한 창밖에서
손가락 두 마디 거리로 붙어 있는 그믐달과 금성
맹렬한 빛으로 나를 깨운다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땅을 밟고 서 있는 발
공중에 떠 있는 머리
팔은 땅과 하늘 사이에서 자유롭다!
하늘로 팔을 뻗어 만세를 부른다
(곽훈,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작가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이러한 질문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작업을 네 가지 시리즈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먼저 〈기(氣)〉 연작에서는 에너지와 존재의 흐름을 통해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며, 〈찻잔(Teabowl)〉 연작은 일상적(이었던) 사물에서 드러나는 시간의 흐름과 역사를 담아내었다. 세 번째 〈겁(Kalpa)〉 연작에서는 불교적 시간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유한성과 우주의 순환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할라잇(Halaayt)〉 연작에서는 고래라는 상징을 통해 물리적 세계와 영적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할라잇〉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공간에서 작가는 수심 2250m의 심해로 관객을 초대한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바다1
사라질 것들이
한번은 어디엔가 얼굴을 비추어야 한다면
거울의 앞면인지
뒷면인지 모를
이 바다
달빛으로 하얗게 물든 해원
한 입 가득히 무금은 달빛을 뱉으면
거울 뒷면으로 부서져 흩어지는 별들
열리지 않을 문 앞에서 기다리던
내 청춘의 진실했던 뒷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누가 신전의 불을 훔치는가?
누가 꽃을 태운 숯으로 눈썹을 그리는가?
엉겅퀴 꽃의 진한 자주색을 토하는 바다
사랑의 마약으로도 지울 수 없는 두개골에 각인된 수평선
나는 보고 있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바다 물빛을
나는 보고 있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네 눈빛을
네 시간 속의 보석이
내 시간 속에서도 보석으로 빛날까?
나의 길은 바다에서 끝나고
너는 바다에 이르러 되돌아갈 길을 잃는다
둘이서 불러야 할 노래를 혼자 부르면서 가는 길
(곽훈,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바다1」은 시간과 존재, 즉 자연의 흐름을 바다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묘사하며, 인간 존재의 불안정한 여정을 표현하고 있다. 시에서 ‘달빛에 물든 바다’, ‘부서지는 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물빛과 눈빛’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감정적 변화와 존재의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작가는 바다라는 공간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상실하고 방황하는지, 또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찾을 수밖에 없는) 일련의 필연적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바다1」에서 내비치는 서사는 〈기〉 연작에서 나타나는 생명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이웃한다. 바다의 순환적 속성처럼 〈기〉 연작에서도 변화와 순환, 에너지의 흐름이 주요한 주제로 다뤄진다. 요컨대, 작가는 동양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인 '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불확실성을 표현하고 있다. 〈기〉 연작이 생명과 존재의 순환을 탐구했다면, 그의 시 「터널」에서는 그 여정이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터널이라는 이미지가 전달하는 공간적·시간적 전환은 그가 묘사한 인간의 삶을 상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데, 이것은 〈찻잔〉 연작과 연결된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터널
터널 속에서는 방향을 잃을 염려가 없다
터널을 빠져나오고서야 행로를 걱정한다
입구는 여름
출구는 가을, 늦가을
탁 트인 전망 속에서 마른 떡갈나무 잎과
묵은 편지와 예고된 이별
생선 냄새나는 목관악기와 함께
뒷좌석을 꽉 채우고 있는 빈 가방들
천국으로 가는 행렬과
천국으로부터 돌아 나오는 행렬이 교차하는 길목에서
빛과 그림자가 가리키는 방향이 같기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희미한 강줄기 끝에서
오늘의 석양이 가라앉고 있다
다정한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로 아마릴리스를 키우는 꿈을 간직하고 싶다
은화를 가득 실은 앞차를 따라간다
전망대에 앉아 다른 사람의 천국을 바라본다
좁힐 수 없는 앞차와의 간격을,
천국과의 거리를 조망한다
(곽훈,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어쩌면 터널 속의 행로는 작가가 성장하면서 고찰한 서사일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미국에서 깨달은 동양적 전통과 사물에 대한 깨우침도 함께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는 고향인 대구에서 고대 토기와 같은 유물들이 심심찮게 발굴될 때는 그저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미국에서의 성찰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경험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경험은 〈찻잔〉 연작의 탄생 비화와 같은 에피소드인데, 「터널」에서도 사건으로 깨닫게 된 철학을 암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공간적·시간적 전환의 상징을 통해 작가의 삶과 여정(미국으로 건너가기 까지의 이야기부터 1995년 비엔날레 참가 및 한국에서의 활동을 포함한), 삶 속에서의 혼란과 깨달음 그리고 변화 등을 비쳐내는 것처럼 〈찻잔〉 연작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비롯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존재와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탐구하며, ‘무아(無我)’, ‘무상(無常)’, ‘연기(緣起)’의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삶도, 작업도 터널을 지나 종착역으로 향해 간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종점2
마지막 열차가 떠나갔다
마지막 열차가 도착했다
방향을 잃은 바람이
배반 당한 증인을 목격한 하루를 마감한다
별자리를 붙잡은 별이 새벽을 지키고 있다
겨울 풍경 속에서 무너지는 얼굴은
잊어버린 것과
잃어버린 것들
(곽훈,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터널을 지나 종점에 도착한 순간, 더 이상 같은 길 위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은 종점이 여정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을 위한 기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겁(劫, Kalpa)’은 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시간 단위로, 매우 긴 시간을 의미한다. 힌두교에서는 창조신 브라흐마의 하루, 즉 우주의 한 주기를 나타내는 상징적 시간으로 사용되었고, 불교에서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우주의 순환을 넘어, 윤회와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철학(종교)적 탐구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겁〉 연작은 화면에 다양한 층을 형성하는 물감의 두께를 활용하여 닦아내고 긁어내는 방식을 통해 흐름과 변화를 강조한다.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오랜 시간 속에서 점차적으로 소멸하고 빛바래는 모습, 그럼에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그것은 ‘순환’ 속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새겨지고’, ‘사라지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다다른 종점은 새로운 기점이 된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바다2
내 눈 속에 담아온 바다가 지워졌다
다시 가 본 바다는 그 바다가 아니다
회오리바람에 갇힌 나는
바람처럼 쓸려가는 세월을
착잡하게 바라보는 나는
내 가슴을 열고 비둘기를 날려 보낸다
나는 기억한다
비둘기가 날아간 수평선을
내 눈 속에 간직했던 바다를
내가 잃어버린 바다가 나의 청춘이 아닐까?
내가 잃어버린 청춘이 내가 잃어버린 바다가 아닐까
기억 속에서 지워진 수평선은
내가 다시 가 보고 싶은 그 바다가 아니다
내 청춘을 들끓게 한 그 해원이 아니다
잊혀 진 것은 바다가 아니다
바다가 나를 버렸다
나를 떠나간 비둘기가 나를 기억이나 할까?
(곽훈,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다시 도착한 ‘바다’에서 작가는 잃어버린 기억과 지나간 시간 속에서 자신을 찾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들려준다. 바다와 수평선, 비둘기라는 상징을 통해 시간과 존재, 소멸과 변화,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환이라는 메타포를 더욱 심화시킨다. 시의 서사는 〈할라잇〉 연작의 서사와 이어지는데, 단지 ‘고래’라는 개체가 ‘바다’에 있기 때문은 아니다. 작품에서 고래는 물리적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 다시 말해 선험에 대한 사유를 의미한다. 이는 과거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을 넘어서, 초월된 경험 안에서 흐르는 시간의 순환과 변화 속에서 인간 존재가 어떻게 그 자신을 재정립하는지를 시사하는 것이다. 작가는 알래스카의 바다에서 고래 뼈를 우연히 마주하였고, 그로부터 십여 년 뒤, 과거에서 온 고래를 반구대 암각화에서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던 〈할라잇〉 연작은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선험의 세계’가 역사와 경험이 만나 구체화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이러한 맥락과 더불어 전시 마지막 공간에 들어서서야 만나게 되는 <2250m Depth>는 〈할라잇〉 연작과는 조금은 차원의 상징을 제시한다. 〈할라잇〉 연작에서 등장하는 고래가 인간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심연을 의미한 반면, '2250m'는 고래가 잠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수심, 물리적 한계를 상징한다. 또한 그 깊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경험'의 한계를 함의한다. 한편, 작품을 구성하는 창호지(한지)와 그 내부의 푸른 빛은 인간의 육체로는 도달할 수 없는 감각(바다)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관객에게는 감각 너머의 세계, 즉 선험적 차원을 상기케 하는 장치로 작동된다. 설명하자면, ‘반구대 암각화와 고래’는 지역의 역사와 근원, ‘창호지’는 어린 시절 겪은 작가의 경험, 그리고 이를 안과 밖으로 구분짓지만 손가락으로 쉽게 뚫을 수 있는 ‘창’은 초월적 세계와 현실을 잇는 새로운 예술적 서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곽훈 작가의 전체적인 작업 흐름에서 봤을 때, 역사(시간), 근원, 경험 그리고 이를 초월한 선험까지 결합시킴으로써, 인간 존재와 그 근원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통찰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동의한다면, 우리는 모두 원시인의 아들이며 딸일 것이다.
2024.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Octo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나도 원시인의 아들이다
박천(시안미술관 큐레이터)
삶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며 살아가지만, 그 모든 경험이 진정한 앎을 제공하거나 존재의 본질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질 수 있는 것에만 의존하는 우리는 어느새 감각의 세계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살아가는 방식에는 감각 너머의, 경험을 초월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칸트가 말하는 감각을 초월한 ‘선험’은 우리의 인식 구조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이 선험의 세계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이미 작동되며, 우리의 시간과 존재를 규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계가 알려주는 시간 속에 스스로를 끼워맞추며 살아가기 바빠서,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로, 어떤 의미로 살아가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의 무심한 소비자로 전락한 채 살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곽훈 작가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는 주제이다.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 《선험의 전이》(2024.08.13.~09.26.)는 이러한 작가의 철학적 질문을 총체적으로 풀어내었다. 전시에서 작가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시간과 존재에 대한 사유를 다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이번 전시의 일환인 ‘작가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시집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2024, ㈜시로여는세상)에 담긴 시들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언어로도 표현하였다. 그의 시 「팔」에서는 경험을 초월한 선험적 인식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담아내었고,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가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현되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팔
불을 훔치던 팔이
강가에서 조개를 잡던 팔이
올무와 몽둥이로 토끼를 쫓던 팔이
섬에서 섬으로 노를 저어가던 팔이
활과 창을 들고 이웃마을로 약탈하러 가던 팔이
M1 소총을 메고 훈련을 받던 팔이
새벽 4시
캄캄한 창밖에서
손가락 두 마디 거리로 붙어 있는 그믐달과 금성
맹렬한 빛으로 나를 깨운다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땅을 밟고 서 있는 발
공중에 떠 있는 머리
팔은 땅과 하늘 사이에서 자유롭다!
하늘로 팔을 뻗어 만세를 부른다
(곽훈,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작가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이러한 질문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작업을 네 가지 시리즈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먼저 〈기(氣)〉 연작에서는 에너지와 존재의 흐름을 통해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며, 〈찻잔(Teabowl)〉 연작은 일상적(이었던) 사물에서 드러나는 시간의 흐름과 역사를 담아내었다. 세 번째 〈겁(Kalpa)〉 연작에서는 불교적 시간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유한성과 우주의 순환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할라잇(Halaayt)〉 연작에서는 고래라는 상징을 통해 물리적 세계와 영적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할라잇〉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공간에서 작가는 수심 2250m의 심해로 관객을 초대한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바다1
사라질 것들이
한번은 어디엔가 얼굴을 비추어야 한다면
거울의 앞면인지
뒷면인지 모를
이 바다
달빛으로 하얗게 물든 해원
한 입 가득히 무금은 달빛을 뱉으면
거울 뒷면으로 부서져 흩어지는 별들
열리지 않을 문 앞에서 기다리던
내 청춘의 진실했던 뒷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누가 신전의 불을 훔치는가?
누가 꽃을 태운 숯으로 눈썹을 그리는가?
엉겅퀴 꽃의 진한 자주색을 토하는 바다
사랑의 마약으로도 지울 수 없는 두개골에 각인된 수평선
나는 보고 있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바다 물빛을
나는 보고 있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네 눈빛을
네 시간 속의 보석이
내 시간 속에서도 보석으로 빛날까?
나의 길은 바다에서 끝나고
너는 바다에 이르러 되돌아갈 길을 잃는다
둘이서 불러야 할 노래를 혼자 부르면서 가는 길
(곽훈,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바다1」은 시간과 존재, 즉 자연의 흐름을 바다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묘사하며, 인간 존재의 불안정한 여정을 표현하고 있다. 시에서 ‘달빛에 물든 바다’, ‘부서지는 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물빛과 눈빛’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감정적 변화와 존재의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작가는 바다라는 공간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상실하고 방황하는지, 또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찾을 수밖에 없는) 일련의 필연적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바다1」에서 내비치는 서사는 〈기〉 연작에서 나타나는 생명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이웃한다. 바다의 순환적 속성처럼 〈기〉 연작에서도 변화와 순환, 에너지의 흐름이 주요한 주제로 다뤄진다. 요컨대, 작가는 동양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인 '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불확실성을 표현하고 있다. 〈기〉 연작이 생명과 존재의 순환을 탐구했다면, 그의 시 「터널」에서는 그 여정이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터널이라는 이미지가 전달하는 공간적·시간적 전환은 그가 묘사한 인간의 삶을 상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데, 이것은 〈찻잔〉 연작과 연결된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터널
터널 속에서는 방향을 잃을 염려가 없다
터널을 빠져나오고서야 행로를 걱정한다
입구는 여름
출구는 가을, 늦가을
탁 트인 전망 속에서 마른 떡갈나무 잎과
묵은 편지와 예고된 이별
생선 냄새나는 목관악기와 함께
뒷좌석을 꽉 채우고 있는 빈 가방들
천국으로 가는 행렬과
천국으로부터 돌아 나오는 행렬이 교차하는 길목에서
빛과 그림자가 가리키는 방향이 같기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희미한 강줄기 끝에서
오늘의 석양이 가라앉고 있다
다정한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로 아마릴리스를 키우는 꿈을 간직하고 싶다
은화를 가득 실은 앞차를 따라간다
전망대에 앉아 다른 사람의 천국을 바라본다
좁힐 수 없는 앞차와의 간격을,
천국과의 거리를 조망한다
(곽훈,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어쩌면 터널 속의 행로는 작가가 성장하면서 고찰한 서사일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미국에서 깨달은 동양적 전통과 사물에 대한 깨우침도 함께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는 고향인 대구에서 고대 토기와 같은 유물들이 심심찮게 발굴될 때는 그저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미국에서의 성찰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경험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경험은 〈찻잔〉 연작의 탄생 비화와 같은 에피소드인데, 「터널」에서도 사건으로 깨닫게 된 철학을 암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공간적·시간적 전환의 상징을 통해 작가의 삶과 여정(미국으로 건너가기 까지의 이야기부터 1995년 비엔날레 참가 및 한국에서의 활동을 포함한), 삶 속에서의 혼란과 깨달음 그리고 변화 등을 비쳐내는 것처럼 〈찻잔〉 연작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비롯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존재와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탐구하며, ‘무아(無我)’, ‘무상(無常)’, ‘연기(緣起)’의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삶도, 작업도 터널을 지나 종착역으로 향해 간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종점2
마지막 열차가 떠나갔다
마지막 열차가 도착했다
방향을 잃은 바람이
배반 당한 증인을 목격한 하루를 마감한다
별자리를 붙잡은 별이 새벽을 지키고 있다
겨울 풍경 속에서 무너지는 얼굴은
잊어버린 것과
잃어버린 것들
(곽훈,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터널을 지나 종점에 도착한 순간, 더 이상 같은 길 위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은 종점이 여정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을 위한 기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겁(劫, Kalpa)’은 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시간 단위로, 매우 긴 시간을 의미한다. 힌두교에서는 창조신 브라흐마의 하루, 즉 우주의 한 주기를 나타내는 상징적 시간으로 사용되었고, 불교에서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우주의 순환을 넘어, 윤회와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철학(종교)적 탐구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겁〉 연작은 화면에 다양한 층을 형성하는 물감의 두께를 활용하여 닦아내고 긁어내는 방식을 통해 흐름과 변화를 강조한다.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오랜 시간 속에서 점차적으로 소멸하고 빛바래는 모습, 그럼에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그것은 ‘순환’ 속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새겨지고’, ‘사라지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다다른 종점은 새로운 기점이 된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바다2
내 눈 속에 담아온 바다가 지워졌다
다시 가 본 바다는 그 바다가 아니다
회오리바람에 갇힌 나는
바람처럼 쓸려가는 세월을
착잡하게 바라보는 나는
내 가슴을 열고 비둘기를 날려 보낸다
나는 기억한다
비둘기가 날아간 수평선을
내 눈 속에 간직했던 바다를
내가 잃어버린 바다가 나의 청춘이 아닐까?
내가 잃어버린 청춘이 내가 잃어버린 바다가 아닐까
기억 속에서 지워진 수평선은
내가 다시 가 보고 싶은 그 바다가 아니다
내 청춘을 들끓게 한 그 해원이 아니다
잊혀 진 것은 바다가 아니다
바다가 나를 버렸다
나를 떠나간 비둘기가 나를 기억이나 할까?
(곽훈,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
다시 도착한 ‘바다’에서 작가는 잃어버린 기억과 지나간 시간 속에서 자신을 찾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들려준다. 바다와 수평선, 비둘기라는 상징을 통해 시간과 존재, 소멸과 변화,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환이라는 메타포를 더욱 심화시킨다. 시의 서사는 〈할라잇〉 연작의 서사와 이어지는데, 단지 ‘고래’라는 개체가 ‘바다’에 있기 때문은 아니다. 작품에서 고래는 물리적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 다시 말해 선험에 대한 사유를 의미한다. 이는 과거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을 넘어서, 초월된 경험 안에서 흐르는 시간의 순환과 변화 속에서 인간 존재가 어떻게 그 자신을 재정립하는지를 시사하는 것이다. 작가는 알래스카의 바다에서 고래 뼈를 우연히 마주하였고, 그로부터 십여 년 뒤, 과거에서 온 고래를 반구대 암각화에서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던 〈할라잇〉 연작은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선험의 세계’가 역사와 경험이 만나 구체화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곽훈_선험의 전이_전경,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대구
이러한 맥락과 더불어 전시 마지막 공간에 들어서서야 만나게 되는 <2250m Depth>는 〈할라잇〉 연작과는 조금은 차원의 상징을 제시한다. 〈할라잇〉 연작에서 등장하는 고래가 인간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심연을 의미한 반면, '2250m'는 고래가 잠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수심, 물리적 한계를 상징한다. 또한 그 깊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경험'의 한계를 함의한다. 한편, 작품을 구성하는 창호지(한지)와 그 내부의 푸른 빛은 인간의 육체로는 도달할 수 없는 감각(바다)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관객에게는 감각 너머의 세계, 즉 선험적 차원을 상기케 하는 장치로 작동된다. 설명하자면, ‘반구대 암각화와 고래’는 지역의 역사와 근원, ‘창호지’는 어린 시절 겪은 작가의 경험, 그리고 이를 안과 밖으로 구분짓지만 손가락으로 쉽게 뚫을 수 있는 ‘창’은 초월적 세계와 현실을 잇는 새로운 예술적 서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곽훈 작가의 전체적인 작업 흐름에서 봤을 때, 역사(시간), 근원, 경험 그리고 이를 초월한 선험까지 결합시킴으로써, 인간 존재와 그 근원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통찰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동의한다면, 우리는 모두 원시인의 아들이며 딸일 것이다.
2024.10.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Octo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