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일병 구하기
박준수
1. 이십년이 지나도 개선되지 않는 급여, 근무환경
스물 한 살, 여름방학 때 교수님 소개로 인사동에 있던 갤러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으니 어느새 미술판에 발을 담근지 20년이 넘었다. 오후 6시부터 10시, 마감하고 퇴근하면 11시, 하루 5시간, 주 25시간, 한달이라고 해도 100시간 근무하던 미술학원 강사를 할 때도 60만원을 받고, 틈틈이 연구작을 해서 제출하면 원장님께 보너스도 받았는데, 월 1일 휴무에 9 to 6인 갤러리에서는 월급이 고작 80만원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돈 벌려고 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언젠가 내 이름으로 된 미술관을 갖고 싶다던 스무 한 살 어린 마음에만 가능했던 열정 페이였다. 물론 당시 최저시급이 2,275원(2003년 기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편의점 알바보다는 많이 받았으니 나름 미대생 대우를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미대입시가 끝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며 했던 카페에서는 시급 1,800원이었다. 2002년 시급이 2,100원으로 올라갔음에도 사장님은 2001년 최저임금 1,865원보다 낮은 1,800원을 주었다.
2001 - 2025 최저임금표 출처 : 최저임금위원회
그런데도 그만두지 않고 이 미술판을 벗어나지 못하고 산 것은 미술 아닌 다른 것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개인적인 취향과 이제 와서는 이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몇 번의 탈미술판을 시도했으나 결국은 이 자리에 돌아와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30대 대부분을 보낸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연봉 동결을 주장하는 임원들에 맞서 기꺼이 앞장서 투사가 되었던 정희철 팀장과 김동현 팀장이 있었다. 그들은 좋은 인재들이 많이 있어야 더 좋은 협회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키아프를 하는 동안 좋은 행사를 만들었다는 보람과 고생을 한 만큼 돌아오는 보상, 둘 중에 하나는 있었다. 잠시 몸 담았던 아트오앤오에서는 감사하게도 그간의 경력을 인정 받아 업계에서 제일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도 금융권이나 대기업을 다니는 동창 녀석들 앞에서 말하기 부끄러운 연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너는 그래도 좋아하는 일 하고 사니까”라며 부러워한다. 남의 속도 모르고…
매년 한국 미술판의 가장 큰 이벤트인 ‘키아프리즈’가 끝나면 젊고 재능 있는 많은 갤러리스트들에게 연락이 온다.
“좋은 자리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큰 행사를 치르고 번아웃이 와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결국 고생 후에 보람과 보상, 둘 중에 하나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젊은 인재들에게 차마 “미술판에 좋은 자리 있으면 내가 가고 싶다”라고 대답 할 수 없어 ‘나의 아저씨’의 명대사를 따라하며 “옮겨봐야 별 거 없다, 지금 자리에서 잘 버텨서 네 것을 만들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그래야 옮겨서도 네 것을 할 수 있어”라고 대답한다. 투사가 되어주었던 두 팀장님을 보고 일을 배웠으면서 나는 말 뿐인 무책임한 아저씨가 될 수 밖에 없다.
나의 인생드라마 '나의 아저씨' 힘들 때 많은 위로와 응원을 주었던 이선균이 늘 그립다.
(나의 아저씨 이선균 tvN 제공)
2. 위기의 3년차, 확신의 5년차, 결단의 7년차
흔히 일반적인 직장에서는 3, 5, 7년차에 이직 뽐뿌가 찾아온다고 한다. 내가 협회에서 근무할 때도 비슷했다. 3년차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대거 퇴사하며 함께 나가야 하나 싶었다. 감사하게도 당시 여러 군데서 손을 내밀어 주셨지만, 차마 내민 손을 잡을 수 없었다. ‘키아프’라고 하는 이름을 등에 업지 않고 내가 다른 데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흔들리는 나를 꽉 잡아준 것은 김동현 팀장이었다. 청기와 회동에서 2시간이 넘는 긴 설득 끝에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주었다. 내력이 약한 나를 위해 기꺼이 테트라포트라가 되어 힘을 키울만큼 도와준 나의 아저씨.
5년차가 되어 일이 익숙해지고, 내력이 생기니 무료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력이 세지면 껍질을 깨고 나가야 한다. 조금 더 큰 곳에서 일을 배우고 싶어졌다. 그 무렵부터 미국행을 결심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해 팬데믹으로 국가간 이동이 불가능해지며 준비했던 미국행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전화위복이라고 팬데믹과 함께 찾아온 프리즈 덕분에 서울에 남아서 조금 더 해보자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키아프와 프리즈의 동시 개최를 준비하며 새로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키아프와 프리즈 동시 개최를 무사히 치르며 어느새 7년차가 되니 결국 개선되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와 그것을 변혁할 수 없는 나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계속 여기에 머물러 있다가는 고인 물이 되어 썩겠구나. 결단을 내릴 시기가 다가왔다. 결국 그렇게 나의 30대 대부분을 보냈던 곳을 떠나게 되었다.
3. 평생 직업? 아니 평생 노비?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미술판에서 일하고 싶다.
(지금 하는 일 평생 직업인가)
미술판 어른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이 있다.
“정년이 없는 직업이라 칠십, 팔십을 먹어서도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
정년 퇴임을 하고 새로운 일을 찾아 미술관에 찾아오신 시니어 인턴을 관리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정년이 없는 이 직업은 참으로 좋아 보였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오프라인 판매가 어려워지자 활성화되었던 OVR로 대표되는 온라인 아트마켓과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의 서울 진출, 미술판에 유례없던 호황이라고 했던 2021 – 2022년을 겪으며 그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기존의 방식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어르신들을 보게 되었다. 평생 한 우물 팠는데, 이제야 물 들어와서 돈 좀 벌겠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렇게 오래 버텨온 시간을 존경한다.
다른 업계에서 정년이 되면 어느 정도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어도, 그동안 벌어온 자금과 퇴직금, 연금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그런 제도가 미술판에는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정년 퇴임도 없이 칠십, 팔십이 되어도 일을 해야 하고, 젊은이들은 올라갈 자리가 없으니 정년은 고사하고, 1-2년 길어야 3년을 주기로 여기저기 미술판을 이곳 저곳을 전전한다. 아버지 받으시는 교직원 사학연금처럼 갤러리스트 연금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4. 라이언 일병 구하기
라이언 이 녀석은 발암유발자였다. 하지만 그렇게 여러 사람의 희생을 통해 구한 라이언 일병이 없었다면 지금의 미국이 있을 수 있었을까. (라이언 일병 구하기 출처 인스타그램)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4형제 중 셋이 먼저 전사하자 막내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특공대가 조직된다. 물론 그 영화를 처음 보던 무렵에는 라이언 한 명을 위해 다른 여러 사람이 희생되니 이 녀석이야 말로 발암유발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시사하는 바는 다음 세대를 위한 전 세대의 숭고한 희생과 그를 구하려는 국가의 단호한 의지였다. 한국 미술판이 제대로 된 미술산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대를 이끌어 갈 다음 세대를 위한 이전 시대의 양보와 그것을 뒷받침해 줄 정부의 정책적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라이언 일병 같이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 갤러리스트들을 구해야 한다.
2024.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박준수
1. 이십년이 지나도 개선되지 않는 급여, 근무환경
스물 한 살, 여름방학 때 교수님 소개로 인사동에 있던 갤러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으니 어느새 미술판에 발을 담근지 20년이 넘었다. 오후 6시부터 10시, 마감하고 퇴근하면 11시, 하루 5시간, 주 25시간, 한달이라고 해도 100시간 근무하던 미술학원 강사를 할 때도 60만원을 받고, 틈틈이 연구작을 해서 제출하면 원장님께 보너스도 받았는데, 월 1일 휴무에 9 to 6인 갤러리에서는 월급이 고작 80만원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돈 벌려고 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언젠가 내 이름으로 된 미술관을 갖고 싶다던 스무 한 살 어린 마음에만 가능했던 열정 페이였다. 물론 당시 최저시급이 2,275원(2003년 기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편의점 알바보다는 많이 받았으니 나름 미대생 대우를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미대입시가 끝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며 했던 카페에서는 시급 1,800원이었다. 2002년 시급이 2,100원으로 올라갔음에도 사장님은 2001년 최저임금 1,865원보다 낮은 1,800원을 주었다.
2001 - 2025 최저임금표 출처 : 최저임금위원회
그런데도 그만두지 않고 이 미술판을 벗어나지 못하고 산 것은 미술 아닌 다른 것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개인적인 취향과 이제 와서는 이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몇 번의 탈미술판을 시도했으나 결국은 이 자리에 돌아와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30대 대부분을 보낸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연봉 동결을 주장하는 임원들에 맞서 기꺼이 앞장서 투사가 되었던 정희철 팀장과 김동현 팀장이 있었다. 그들은 좋은 인재들이 많이 있어야 더 좋은 협회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키아프를 하는 동안 좋은 행사를 만들었다는 보람과 고생을 한 만큼 돌아오는 보상, 둘 중에 하나는 있었다. 잠시 몸 담았던 아트오앤오에서는 감사하게도 그간의 경력을 인정 받아 업계에서 제일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도 금융권이나 대기업을 다니는 동창 녀석들 앞에서 말하기 부끄러운 연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너는 그래도 좋아하는 일 하고 사니까”라며 부러워한다. 남의 속도 모르고…
매년 한국 미술판의 가장 큰 이벤트인 ‘키아프리즈’가 끝나면 젊고 재능 있는 많은 갤러리스트들에게 연락이 온다.
“좋은 자리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큰 행사를 치르고 번아웃이 와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결국 고생 후에 보람과 보상, 둘 중에 하나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젊은 인재들에게 차마 “미술판에 좋은 자리 있으면 내가 가고 싶다”라고 대답 할 수 없어 ‘나의 아저씨’의 명대사를 따라하며 “옮겨봐야 별 거 없다, 지금 자리에서 잘 버텨서 네 것을 만들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그래야 옮겨서도 네 것을 할 수 있어”라고 대답한다. 투사가 되어주었던 두 팀장님을 보고 일을 배웠으면서 나는 말 뿐인 무책임한 아저씨가 될 수 밖에 없다.
나의 인생드라마 '나의 아저씨' 힘들 때 많은 위로와 응원을 주었던 이선균이 늘 그립다.
(나의 아저씨 이선균 tvN 제공)
2. 위기의 3년차, 확신의 5년차, 결단의 7년차
흔히 일반적인 직장에서는 3, 5, 7년차에 이직 뽐뿌가 찾아온다고 한다. 내가 협회에서 근무할 때도 비슷했다. 3년차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대거 퇴사하며 함께 나가야 하나 싶었다. 감사하게도 당시 여러 군데서 손을 내밀어 주셨지만, 차마 내민 손을 잡을 수 없었다. ‘키아프’라고 하는 이름을 등에 업지 않고 내가 다른 데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흔들리는 나를 꽉 잡아준 것은 김동현 팀장이었다. 청기와 회동에서 2시간이 넘는 긴 설득 끝에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주었다. 내력이 약한 나를 위해 기꺼이 테트라포트라가 되어 힘을 키울만큼 도와준 나의 아저씨.
5년차가 되어 일이 익숙해지고, 내력이 생기니 무료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력이 세지면 껍질을 깨고 나가야 한다. 조금 더 큰 곳에서 일을 배우고 싶어졌다. 그 무렵부터 미국행을 결심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해 팬데믹으로 국가간 이동이 불가능해지며 준비했던 미국행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전화위복이라고 팬데믹과 함께 찾아온 프리즈 덕분에 서울에 남아서 조금 더 해보자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키아프와 프리즈의 동시 개최를 준비하며 새로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키아프와 프리즈 동시 개최를 무사히 치르며 어느새 7년차가 되니 결국 개선되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와 그것을 변혁할 수 없는 나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계속 여기에 머물러 있다가는 고인 물이 되어 썩겠구나. 결단을 내릴 시기가 다가왔다. 결국 그렇게 나의 30대 대부분을 보냈던 곳을 떠나게 되었다.
3. 평생 직업? 아니 평생 노비?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미술판에서 일하고 싶다.
(지금 하는 일 평생 직업인가)
미술판 어른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이 있다.
“정년이 없는 직업이라 칠십, 팔십을 먹어서도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
정년 퇴임을 하고 새로운 일을 찾아 미술관에 찾아오신 시니어 인턴을 관리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정년이 없는 이 직업은 참으로 좋아 보였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오프라인 판매가 어려워지자 활성화되었던 OVR로 대표되는 온라인 아트마켓과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의 서울 진출, 미술판에 유례없던 호황이라고 했던 2021 – 2022년을 겪으며 그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기존의 방식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어르신들을 보게 되었다. 평생 한 우물 팠는데, 이제야 물 들어와서 돈 좀 벌겠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렇게 오래 버텨온 시간을 존경한다.
다른 업계에서 정년이 되면 어느 정도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어도, 그동안 벌어온 자금과 퇴직금, 연금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그런 제도가 미술판에는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정년 퇴임도 없이 칠십, 팔십이 되어도 일을 해야 하고, 젊은이들은 올라갈 자리가 없으니 정년은 고사하고, 1-2년 길어야 3년을 주기로 여기저기 미술판을 이곳 저곳을 전전한다. 아버지 받으시는 교직원 사학연금처럼 갤러리스트 연금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4. 라이언 일병 구하기
라이언 이 녀석은 발암유발자였다. 하지만 그렇게 여러 사람의 희생을 통해 구한 라이언 일병이 없었다면 지금의 미국이 있을 수 있었을까. (라이언 일병 구하기 출처 인스타그램)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4형제 중 셋이 먼저 전사하자 막내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특공대가 조직된다. 물론 그 영화를 처음 보던 무렵에는 라이언 한 명을 위해 다른 여러 사람이 희생되니 이 녀석이야 말로 발암유발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시사하는 바는 다음 세대를 위한 전 세대의 숭고한 희생과 그를 구하려는 국가의 단호한 의지였다. 한국 미술판이 제대로 된 미술산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대를 이끌어 갈 다음 세대를 위한 이전 시대의 양보와 그것을 뒷받침해 줄 정부의 정책적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라이언 일병 같이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 갤러리스트들을 구해야 한다.
2024.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