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묘: 사건의 바다
정희라(미술평론, 미술사)
바다는 계속해서 방문자를 기다리는 심연의 박물관이다.
-Philippe Diolé
물의 결, 파도의 몸짓
광활한 바다가 요동친다. 범접할 수 없는 것에 가까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잦아든다. 하얗게 일어나는 파도 조각에는 공백과 이음새가 없는 시간의 흐름이 녹아 있다. 이부안의 바다는 세심하게 그려진 투명한 물보라가 언뜻 잔잔해 보이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전체를 보면 유화 물감의 투박한 묵직함이 살아나 소용돌이치는 파도처럼 거침이 없다. 얕은 표면이 빈틈이 없어 깊어 보이는 그의 그림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겪어낸 시간을 발견한다.
삶이 부서져 밀려오는 듯한 이부안의 물결에는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이 조각나 새겨져 있다. 파도를 고요히 가라앉히며 가벼운 터치로 그려내는 이부안의 몸짓은 마치 선 위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곡예사의 움직임 같다. 비애가 느껴지는 울렁이는 물의 결이 우리의 기억을 헤집는다.
이부안, 몰아치다, 캔버스에 유채, 65x91cm, 2021
흔들리지 않는 부표
이부안은 우리로 하여금 그만의 자연 풍광에 감탄하게 하지만 바다의 아름다움이 자연의 숭고함에 국한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자연을 바라보며 갖게 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떠올라 혼란스러운 사이 비집고 들어오는 화면의 아름다움에 기묘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자신이 체득한 풍경이 풍기는 이 기묘함에 고향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의 빛을 담는다. 작가가 이렇게 자신의 뿌리에 천착하는 것은 스스로가 걸어온 길을 더욱 선명히 하며 그 과정 안에서 그가 겪어낸 투쟁의 순간들을 더듬어 찾아내고자 하는 의지로 비추어진다. 물 위에 떠있는 부표에 의지한 채 바다의 파도와 하나가 되는 선원인 양 캔버스 앞에 놓인 그는 자신의 길에 대한 비장함과 고독감에 수도 없이 휩싸였을 것이다. 넘실대는 풍경들을 캔버스 위에 차례차례 얹으며 견고해진 그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는 그만의 지표가 되었다.
침묵의 바다
이부안은 때때로 그림에서 사건을 암시하는 소재와 그 소재가 놓인 배경을 지운다. 형태를 덮기도 하고, 천으로 닦아 내기도 한다. 이때, 캔버스 조직위에 희미하게 남겨진 물감의 흔적은 그 자체로 은근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그가 그려낸 사건이 시간에 따라 희미해짐을 말한다. 시간과 장소가 완전히 텅 비어 있음을 연출하는 <인물 풍경> 연작은 그가 이부안이라는 활동명이 아닌 본명-이승현으로 작업을 할 2011년부터 그려졌다. 2016년작 <우울한 풍경>에서도 이러한 빈 공간은 발견된다. 꼼꼼히 새겨진 형태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빈 형태는 공간을 싹둑 잘라낸 듯 보이는데, 이로써 우리가 이전에는 미처 볼 수 없었던 공간들이 시야 위로 떠오른다.
이부안, 인물풍경3_캔버스에 유채_116x91cm_2011
이부안, 빨래..캔버스에 유화..114x162cm..2016
이부안, 우울한 풍경.캔버스에 유채.112X145cm..2016
이부안, 해묘(海墓), 캔버스에 유채, 130x162cm, 2018
이부안, 해묘(海墓)3, 캔버스에 유채, 130x193cm, 2019
이부안, 물결은 기억한다2 캔버스에 유채 130x192cm 2024
이부안, 바다꽃29 캔버스에 유채 114x145cm 2021
이부안, 사라지다, 캔버스에 유채, 117x91cm, 2020
결과적으로 이부안은 풍경이 풍경으로 읽히지 않도록 의도한다. 예컨대 사건의 징후만 남긴 채 지워버린다. 2018년부터 이어진 <해묘> 연작 중 하나에는 바다를 거니는 사람의 그림자가 제외되어 있다. 화면 안에 그려진 두 명의 산책자 중 어린아이로 추정되는 이의 그림자만 지움으로써 부재를 나타낸다. 이로써 이 바다가 평화로운 자연 풍광을 아님을 알아챌 수 있다. 이렇게 이부안의 자연은 우리에게 사건이 된다. 뱃사람에게 바다는 평화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을 삼켜버릴 가능성이 내재된 망망대해는 그들에게 실존의 생태계이며,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신과 같다. 자신의 뿌리를 바다에서 찾는 이부안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건 사고가 매섭게 가라앉아 있을 이부안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만의 색조가 음울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의 발자국이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작품 <해묘 2>는 특히 이러한 사건 사고를 암시한다. 우리를 삼켜버린 바다의 역사는 떠올리기도 아득하지만, 잊을 수 없는 순간의 참혹함은 바로 어제인 듯 생생하다. 이번 2024년 작품 <물결은 기억한다>는 관조와 관찰 사이, 이 경계에 놓인 작가의 시선이 닿은 사건의 바다들이다. 이부안은 캔버스 위에서 징후가 되는 소재들을 물결의 모양에 녹여내는 것으로, 우리를 삼킨 침묵의 바다를 묵직하게 드러낸다. 실존의 흔적이 가라앉은 바다에 잔존해 온 그의 길이 우리의 길과 겹쳐진다.
2024.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해묘: 사건의 바다
정희라(미술평론, 미술사)
바다는 계속해서 방문자를 기다리는 심연의 박물관이다.
-Philippe Diolé
물의 결, 파도의 몸짓
광활한 바다가 요동친다. 범접할 수 없는 것에 가까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잦아든다. 하얗게 일어나는 파도 조각에는 공백과 이음새가 없는 시간의 흐름이 녹아 있다. 이부안의 바다는 세심하게 그려진 투명한 물보라가 언뜻 잔잔해 보이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전체를 보면 유화 물감의 투박한 묵직함이 살아나 소용돌이치는 파도처럼 거침이 없다. 얕은 표면이 빈틈이 없어 깊어 보이는 그의 그림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겪어낸 시간을 발견한다.
삶이 부서져 밀려오는 듯한 이부안의 물결에는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이 조각나 새겨져 있다. 파도를 고요히 가라앉히며 가벼운 터치로 그려내는 이부안의 몸짓은 마치 선 위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곡예사의 움직임 같다. 비애가 느껴지는 울렁이는 물의 결이 우리의 기억을 헤집는다.
이부안, 몰아치다, 캔버스에 유채, 65x91cm, 2021
흔들리지 않는 부표
이부안은 우리로 하여금 그만의 자연 풍광에 감탄하게 하지만 바다의 아름다움이 자연의 숭고함에 국한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자연을 바라보며 갖게 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떠올라 혼란스러운 사이 비집고 들어오는 화면의 아름다움에 기묘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자신이 체득한 풍경이 풍기는 이 기묘함에 고향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의 빛을 담는다. 작가가 이렇게 자신의 뿌리에 천착하는 것은 스스로가 걸어온 길을 더욱 선명히 하며 그 과정 안에서 그가 겪어낸 투쟁의 순간들을 더듬어 찾아내고자 하는 의지로 비추어진다. 물 위에 떠있는 부표에 의지한 채 바다의 파도와 하나가 되는 선원인 양 캔버스 앞에 놓인 그는 자신의 길에 대한 비장함과 고독감에 수도 없이 휩싸였을 것이다. 넘실대는 풍경들을 캔버스 위에 차례차례 얹으며 견고해진 그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는 그만의 지표가 되었다.
침묵의 바다
이부안은 때때로 그림에서 사건을 암시하는 소재와 그 소재가 놓인 배경을 지운다. 형태를 덮기도 하고, 천으로 닦아 내기도 한다. 이때, 캔버스 조직위에 희미하게 남겨진 물감의 흔적은 그 자체로 은근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그가 그려낸 사건이 시간에 따라 희미해짐을 말한다. 시간과 장소가 완전히 텅 비어 있음을 연출하는 <인물 풍경> 연작은 그가 이부안이라는 활동명이 아닌 본명-이승현으로 작업을 할 2011년부터 그려졌다. 2016년작 <우울한 풍경>에서도 이러한 빈 공간은 발견된다. 꼼꼼히 새겨진 형태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빈 형태는 공간을 싹둑 잘라낸 듯 보이는데, 이로써 우리가 이전에는 미처 볼 수 없었던 공간들이 시야 위로 떠오른다.
이부안, 인물풍경3_캔버스에 유채_116x91cm_2011
이부안, 빨래..캔버스에 유화..114x162cm..2016
이부안, 우울한 풍경.캔버스에 유채.112X145cm..2016
이부안, 해묘(海墓), 캔버스에 유채, 130x162cm, 2018
이부안, 해묘(海墓)3, 캔버스에 유채, 130x193cm, 2019
이부안, 물결은 기억한다2 캔버스에 유채 130x192cm 2024
이부안, 바다꽃29 캔버스에 유채 114x145cm 2021
이부안, 사라지다, 캔버스에 유채, 117x91cm, 2020
결과적으로 이부안은 풍경이 풍경으로 읽히지 않도록 의도한다. 예컨대 사건의 징후만 남긴 채 지워버린다. 2018년부터 이어진 <해묘> 연작 중 하나에는 바다를 거니는 사람의 그림자가 제외되어 있다. 화면 안에 그려진 두 명의 산책자 중 어린아이로 추정되는 이의 그림자만 지움으로써 부재를 나타낸다. 이로써 이 바다가 평화로운 자연 풍광을 아님을 알아챌 수 있다. 이렇게 이부안의 자연은 우리에게 사건이 된다. 뱃사람에게 바다는 평화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을 삼켜버릴 가능성이 내재된 망망대해는 그들에게 실존의 생태계이며,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신과 같다. 자신의 뿌리를 바다에서 찾는 이부안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건 사고가 매섭게 가라앉아 있을 이부안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만의 색조가 음울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의 발자국이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작품 <해묘 2>는 특히 이러한 사건 사고를 암시한다. 우리를 삼켜버린 바다의 역사는 떠올리기도 아득하지만, 잊을 수 없는 순간의 참혹함은 바로 어제인 듯 생생하다. 이번 2024년 작품 <물결은 기억한다>는 관조와 관찰 사이, 이 경계에 놓인 작가의 시선이 닿은 사건의 바다들이다. 이부안은 캔버스 위에서 징후가 되는 소재들을 물결의 모양에 녹여내는 것으로, 우리를 삼킨 침묵의 바다를 묵직하게 드러낸다. 실존의 흔적이 가라앉은 바다에 잔존해 온 그의 길이 우리의 길과 겹쳐진다.
2024.11.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Novem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