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의 부록(Appendix of an Appendix)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시간과 존재에 대한 이원적 접근
시간과 존재에 대한 동서양의 관점은 서로 다른 강들이 하나의 바다로 흘러 모이는 것처럼, 각기 다른 노선을 가지지만 결국에는 공존하게 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격언은, 시간을 직선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흐름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서양의 사유와 반대로, 동양에서는 시간을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이해하며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되풀이된다는 관점을 지닌다.
말한바와 같이, 흐르는 강의 방향처럼 서양에서의 시간은 직선적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두고, 뉴턴의 절대적 시간 개념을 통해 강화된 시간이라는 개념은, 하이데거에 이르러 "존재는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는 관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과거에서 미래로만 나아가는 그 직선적인 흐름 속에서 존재는 철로 위의 기차처럼 단일한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시간을 순환적으로 바라보는데, 불교는 모든 것이 영속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도교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순환적 시간 속에서 존재를 논한다. 이미지로 표현하자면, 시간은 직선이 아닌 원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 안에서 존재는 무한히 재구성된다.
그렇다면 글로벌화된 오늘날에 이 두 가지 시간의 개념이 어떻게 만날 수 있으며 공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상반된 시간관과 존재관은 서로 충돌하는(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경계를 긋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지우개가 있다. 서양의 직선적 시간관은 진보와 발전을 강조하면서도 되돌릴 수 없는 과거와 마주하게 만들고, 동양의 순환적 시간관은 시작과 끝이 없는 관점에서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중시한다. 이러한 차이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철학적 충돌과 긴장을 만들어왔으나, 오늘날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유와 함께 상반된 관점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진리나 고정된 의미를 거부하고, 다양한 관점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이해를 만들어내려 하지만, 주카야의 작업은 이러한 철학적 대립을 의도적으로 해결하려 하지는 않는다.
주카야의 작업은 서로 다른 문화와 경험적 시간이 자연스럽게 융합된 결과로서, 그녀의 작품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녀는 특정한 사유를 지지하거나 거부하기보다는, 동서양에서 체득한 시간과 존재의 의미를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그 자체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주카야의 작업은 정체성의 탐구에 중점을 두어 서로 다른 문화적 경험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 자연(주변)과의 상호적인 연결을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업 안에서는 직선적 시간과 순환적 시간이 서로 대립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강이 하나의 바다로 흘러가며 서로의 물결 속에 스며드는 듯한 공존을 이룬다.
〈Appendix〉
〈Appendix I〉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변형
《Appendix》 전시의 공간에서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Appendix I〉이다. 이 작품은 휘어진 철근과 두드리고 부식시킨 황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험한 긴장감을 드러내듯 설치되어 있다. 밀도 있는 무게가 그대로 느껴지는 크기의 철근과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얇은 황동 판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은 서로 이항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상호 보완적인 면모도 함께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지니고 있는 개인의 서사와 같이 〈Appendix I〉는 시간을 직선적으로 바라보는 서구의 방식과 순환적으로 이해하는 동양의 방식을 모두 품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변화와 변형의 연속으로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오스트리아에서 잊혀진 기술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남아있는 방식인 ‘두드리기’는 작품에서 단순한 물질의 가공을 넘어, 시간과 존재에 대한 상징적 은유로 작용한다. 말하자면 서양에서 찾을 수 없는 이 방식이 한국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순환적인 형태로 지속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지 않을까. 경제적 기준으로 치자면, 한국 또한 세계에서 선진국에 속하기에 이러한 기술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카야의 눈물과 식초, 물을 사용하여 황동을 부식시킨 것은 시간이 물질에 남기거나 쌓인 흔적, 즉 선형적 시간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서양에서 시간이 과거로 되돌릴 수 없는 일방적인 흐름으로 여겨지는 것이지만, 이에 대해 주카야는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의미와 질감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변형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와 맥락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Appendix II〉
변화와 조화
새로운 맥락의 탄생은 작품 〈Appendix II〉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은 그녀가 레지던스 부근에서 발견한 버려진 녹슨 울타리와 이를 거치하고 있는 황동으로 구성된 새롭게 만든 좌대, 그리고 울타리 뒤 벽면에 청사진을 입힌 황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사진의 이미지는 주카야가 머무르고 있는 주변 환경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데, 빳빳히 고개들며 키를 키우다, 가을이 되어 고개 숙이고 있는 벼와 성장하고 시드는 연잎의 모습이 얽힌 풍경이다. 청사진의 이미지와 설치된 구조물의 모습은 너무나도 직관적으로 시간을 드러내고 있다. 새것과 녹이 슨 구조물, 식물의 성장과 저물어가는 모습은 시간의 흐름과 순환을 한눈에 보여주면서도, 고정된 형태가 아닌 변화하는 생명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시간이라는 직관적인 요소를 띤 이미지가 눈앞을 가리지만, 그 뒤에는 더 흥미로운 것이 숨어있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변화와 조화라는 서로 상충하는 요소를 이웃시키는 것이다. 주카야는 이 두 개념을 통해서 존재의 복합성, 그리고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생기는 관계의 다른 가능성을 고민한다.
풀어내자면, 일반적인 사진이 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고정된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청사진은 그 자체로 시간의 흐름과 변화 과정을 암시하는 것이다. 주카야의 작업에서는 황동판 위에 감광성 물질을 바르고, 그 위에 대상을 배치한 뒤, 빛에 노출시켜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 과정은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물질의 본질과 변형을 시각적으로 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말해, 주카야의 청사진은 일반적인 사진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기록하는 것과 동시에, 이미지가 지니는 유연성과 흐름을 존재의 지속성과 변화의 연속성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카야의 청사진은 고정된 풍경 이미지(촬영했던 과거의 시간)로 부터 관객이 이미지를 보는 순간까지의 여백을 시간이라는 흐름에 맡기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벽에 걸려 있는 청사진을 가리는 듯한 버려진 녹슨 울타리는 단순히 경계를 구분하는 역할을 넘어, 어떤 사물이 지닌 기능의 변화를 탐색하게 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 버려진 녹슨 울타리는 청사진(사진으로서의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더욱 명확하게 분리하는 듯하지만, 경계 너머에 있는 변화되는 세계(청사진 속의 이미지와 화학 반응으로 변형되는 과정)를 암시한다. 이렇게 복합적인 방식으로 〈Appendix II〉는 가상의 이미지와 실제를 연결짓는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뮬라크르와 완전히 같은 맥락에서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시뮬라크르의 의미가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황에서 복제된 이미지가 본래의 의미나 존재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는 점과 유사한 방식으로, 〈Appendix II〉는 버려진 녹슨 울타리와 청사진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특정 순간의 포착이 아니라, 시간의 연속성을 포함하는 과정으로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변화를 수용하는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Appendix II〉는 변화가 서로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지점으로 기능함을 서술하고 있다.
〈Appendix III〉
물질성과 변형
가상이 현실이 되었을까. 고개를 돌리면 〈Appendix II〉의 이미지에 있던 연잎이 전시장에 실재한다. 주카야는 레지던스 주변에서 발견한 말린 연잎을 벽에 전시하였다. 이 연잎의 수술과 암술이 있어야할 자리에는 그녀가 홍성에서 느낀 감정을 담아낸 눈물이 모아져 맺혀 있다. 또 잎의 부분에는 황동의 부스러기들이 뿌려져 있는데, 이것은 〈Appendix I〉와 〈Appendix II〉에서 이어진 변형의 연속성을 드러낸다. 작품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들은 또 하나의 전체로 묶여져 서로를 풍부하게 만들어가는 관계에 있다. 〈Appendix III〉는 개별적인 의미와 함께 이 모든 설치물들이 하나의 《Appendix》가 될 수 있도록 구성한다.
말린 연잎은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유한한 존재, 생명을 상징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멸과 변화, 그리고 탄생의 과정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 나아가 사물이 단순히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변형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암시한다. 잎사귀가 지고 나서도 그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주카야의 작업은 지속적인 연결성을 강조한다.
황동 부스러기는 〈Appendix I〉를 제작하면서 발생한 버려져야하는 부산물로서, 쓰임을 다한 물질이다. 하지만 〈Appendix I〉와 함께 전시되는 방식으로 그 또한 과거의 존재했던 하나의 사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황동 부스러기는 말린 연잎과 결합되어 오래되고 쓸모 없음의 맥락을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쓸모 없음은 주카야에게는 복합적이며 감정적인 형태의 기분으로 다가왔는데, 이는 눈물로 치환되어 황동 부스러기가 섞인 말린 연잎과 어우러져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우리가 자연이 순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노화나 고통, 그리고 상실은 언제나 슬픔을 동반한다. 주카야가 제시하는 눈물은 이와 같은 순간의 감정을 응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결합이 단순히 고통과 상실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급한 바와 같이 뿌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력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Appendix III〉에서 뿌리의 역할은 황동으로 만들어진 기둥이 대신한다. 작품 속 황동 기둥은 주카야의 경험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요소인데, 앞선 〈Appendix I〉와 〈Appendix II〉와의 맥락을 이웃시킨다. 어쩌면 그녀의 경험과 이를 예술로써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일련의 태도는 뿌리의 역할처럼 예술가로서의 역할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변형은 단순한 소멸 혹은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와 의미의 탄생을 지시하는 것과 함께 이러한 것이 예술의 역할이자 생존 방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겠다.
변화 속에서 발견하는 존재의 다층성
전시 《Appendix》는 〈Appendix I〉, 〈Appendix II〉, 〈Appendix III〉가 각각의 개별적인 의미를 지니면서도 서로를 연결하는 복합적 관계를 통해 존재의 다층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앞서 소개하지 않았지만 〈Appendix I〉에서 황동을 부식시키는데 사용된 눈물은 이와 같은 연결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작품만 보자면, 〈Appendix I〉에서 눈물의 흔적을 직접적으로 찾기는 어렵지만, 그녀가 제시하는 작품 정보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제시된 정보가 사실이라면 〈Appendix III〉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설치 된 눈물은 〈Appendix I〉와 함께 이와 같은 순환적이고 다층적인 연결을 명확히 증명해준다.
〈Appendix I〉로부터 시작하여 〈Appendix III〉까지 이어지는 전시의 내용은 시간으로 출발해서 존재의 의의로 도착하게 되는데, 존재자는 시간에 속박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주카야의 이번 전시는 이러한 모순된 상태를 탐구하면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고정된 정체성을 넘어서는 다양한 정체성을 제시한다.
또한, 주카야의 작업은 단순히 개인의 경험을 넘어,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보편적이지 않은 주카야만의 개인적인 정체성이 보편적인 서사와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규정하기 힘든 이데올로기 너머의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레퍼런스들을 모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살펴본 바와 같이 《Appendix》가 구성된 동선은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들이 작가의 경험을 거쳐 서로를 더욱 보충설명하고 있기에 ‘Appendix’라는 제목이 이와 같이 붙여졌을 거라 추론할 수 있겠다.
전시 제목 ‘Appendix’는 ‘부록’이라는 의미이다. 부록은 하나의 글에서 전체 흐름을 헤치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개념이나 내용을 설명한다. 부록은 본문을 읽으며 놓칠 수 있는 세부 사항이나 맥락을 제공하여 이해를 돕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Appendix》는 사회에서 부록처럼 설명되어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대상들, 즉 쓸모를 다하여 맥락을 잃어버린 대상들에 새로운 맥락을 입히는 작업이다. 그래서 주카야의 작업은 버려진 물체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면서, 그것들이 지닌 과거의 맥락과 현재의 정체성을 이웃시킨다. 이를 통해 그녀는 존재의 다층성과 변형 가능성, 다시 말해 부록이 지닌 맥락처럼 잊히거나 무시되었던 사물들이 다시 다른 페이지에서 주제로서 자리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시가 끝나면 전시장에서 맥락을 만든 사물들은 또 다시 버려질 운명에 놓여있다.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이에 대해 변호하자면 이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가 재활용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연잎의 뿌리가 땅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듯이, 주카야의 작업도 다른 맥락 속에서 다시 발견될 수 있는 잠재력을 내포한다. 그렇기에 주카야의 작업은 의미를 상실한 존재들이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해주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새롭게 쓰여질 이야기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2024.1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Decem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
부록의 부록(Appendix of an Appendix)
박천(시안미술관 학예실장)
시간과 존재에 대한 이원적 접근
시간과 존재에 대한 동서양의 관점은 서로 다른 강들이 하나의 바다로 흘러 모이는 것처럼, 각기 다른 노선을 가지지만 결국에는 공존하게 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격언은, 시간을 직선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흐름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서양의 사유와 반대로, 동양에서는 시간을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이해하며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되풀이된다는 관점을 지닌다.
말한바와 같이, 흐르는 강의 방향처럼 서양에서의 시간은 직선적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두고, 뉴턴의 절대적 시간 개념을 통해 강화된 시간이라는 개념은, 하이데거에 이르러 "존재는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는 관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과거에서 미래로만 나아가는 그 직선적인 흐름 속에서 존재는 철로 위의 기차처럼 단일한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시간을 순환적으로 바라보는데, 불교는 모든 것이 영속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도교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순환적 시간 속에서 존재를 논한다. 이미지로 표현하자면, 시간은 직선이 아닌 원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 안에서 존재는 무한히 재구성된다.
그렇다면 글로벌화된 오늘날에 이 두 가지 시간의 개념이 어떻게 만날 수 있으며 공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상반된 시간관과 존재관은 서로 충돌하는(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경계를 긋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지우개가 있다. 서양의 직선적 시간관은 진보와 발전을 강조하면서도 되돌릴 수 없는 과거와 마주하게 만들고, 동양의 순환적 시간관은 시작과 끝이 없는 관점에서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중시한다. 이러한 차이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철학적 충돌과 긴장을 만들어왔으나, 오늘날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유와 함께 상반된 관점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진리나 고정된 의미를 거부하고, 다양한 관점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이해를 만들어내려 하지만, 주카야의 작업은 이러한 철학적 대립을 의도적으로 해결하려 하지는 않는다.
주카야의 작업은 서로 다른 문화와 경험적 시간이 자연스럽게 융합된 결과로서, 그녀의 작품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녀는 특정한 사유를 지지하거나 거부하기보다는, 동서양에서 체득한 시간과 존재의 의미를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그 자체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주카야의 작업은 정체성의 탐구에 중점을 두어 서로 다른 문화적 경험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 자연(주변)과의 상호적인 연결을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업 안에서는 직선적 시간과 순환적 시간이 서로 대립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강이 하나의 바다로 흘러가며 서로의 물결 속에 스며드는 듯한 공존을 이룬다.
〈Appendix〉
〈Appendix I〉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변형
《Appendix》 전시의 공간에서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Appendix I〉이다. 이 작품은 휘어진 철근과 두드리고 부식시킨 황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험한 긴장감을 드러내듯 설치되어 있다. 밀도 있는 무게가 그대로 느껴지는 크기의 철근과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얇은 황동 판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은 서로 이항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상호 보완적인 면모도 함께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지니고 있는 개인의 서사와 같이 〈Appendix I〉는 시간을 직선적으로 바라보는 서구의 방식과 순환적으로 이해하는 동양의 방식을 모두 품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변화와 변형의 연속으로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오스트리아에서 잊혀진 기술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남아있는 방식인 ‘두드리기’는 작품에서 단순한 물질의 가공을 넘어, 시간과 존재에 대한 상징적 은유로 작용한다. 말하자면 서양에서 찾을 수 없는 이 방식이 한국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순환적인 형태로 지속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지 않을까. 경제적 기준으로 치자면, 한국 또한 세계에서 선진국에 속하기에 이러한 기술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카야의 눈물과 식초, 물을 사용하여 황동을 부식시킨 것은 시간이 물질에 남기거나 쌓인 흔적, 즉 선형적 시간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서양에서 시간이 과거로 되돌릴 수 없는 일방적인 흐름으로 여겨지는 것이지만, 이에 대해 주카야는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의미와 질감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변형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와 맥락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Appendix II〉
변화와 조화
새로운 맥락의 탄생은 작품 〈Appendix II〉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은 그녀가 레지던스 부근에서 발견한 버려진 녹슨 울타리와 이를 거치하고 있는 황동으로 구성된 새롭게 만든 좌대, 그리고 울타리 뒤 벽면에 청사진을 입힌 황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사진의 이미지는 주카야가 머무르고 있는 주변 환경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데, 빳빳히 고개들며 키를 키우다, 가을이 되어 고개 숙이고 있는 벼와 성장하고 시드는 연잎의 모습이 얽힌 풍경이다. 청사진의 이미지와 설치된 구조물의 모습은 너무나도 직관적으로 시간을 드러내고 있다. 새것과 녹이 슨 구조물, 식물의 성장과 저물어가는 모습은 시간의 흐름과 순환을 한눈에 보여주면서도, 고정된 형태가 아닌 변화하는 생명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시간이라는 직관적인 요소를 띤 이미지가 눈앞을 가리지만, 그 뒤에는 더 흥미로운 것이 숨어있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변화와 조화라는 서로 상충하는 요소를 이웃시키는 것이다. 주카야는 이 두 개념을 통해서 존재의 복합성, 그리고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생기는 관계의 다른 가능성을 고민한다.
풀어내자면, 일반적인 사진이 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고정된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청사진은 그 자체로 시간의 흐름과 변화 과정을 암시하는 것이다. 주카야의 작업에서는 황동판 위에 감광성 물질을 바르고, 그 위에 대상을 배치한 뒤, 빛에 노출시켜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 과정은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물질의 본질과 변형을 시각적으로 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말해, 주카야의 청사진은 일반적인 사진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기록하는 것과 동시에, 이미지가 지니는 유연성과 흐름을 존재의 지속성과 변화의 연속성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카야의 청사진은 고정된 풍경 이미지(촬영했던 과거의 시간)로 부터 관객이 이미지를 보는 순간까지의 여백을 시간이라는 흐름에 맡기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벽에 걸려 있는 청사진을 가리는 듯한 버려진 녹슨 울타리는 단순히 경계를 구분하는 역할을 넘어, 어떤 사물이 지닌 기능의 변화를 탐색하게 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 버려진 녹슨 울타리는 청사진(사진으로서의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더욱 명확하게 분리하는 듯하지만, 경계 너머에 있는 변화되는 세계(청사진 속의 이미지와 화학 반응으로 변형되는 과정)를 암시한다. 이렇게 복합적인 방식으로 〈Appendix II〉는 가상의 이미지와 실제를 연결짓는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뮬라크르와 완전히 같은 맥락에서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시뮬라크르의 의미가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황에서 복제된 이미지가 본래의 의미나 존재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는 점과 유사한 방식으로, 〈Appendix II〉는 버려진 녹슨 울타리와 청사진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특정 순간의 포착이 아니라, 시간의 연속성을 포함하는 과정으로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변화를 수용하는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Appendix II〉는 변화가 서로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지점으로 기능함을 서술하고 있다.
〈Appendix III〉
물질성과 변형
가상이 현실이 되었을까. 고개를 돌리면 〈Appendix II〉의 이미지에 있던 연잎이 전시장에 실재한다. 주카야는 레지던스 주변에서 발견한 말린 연잎을 벽에 전시하였다. 이 연잎의 수술과 암술이 있어야할 자리에는 그녀가 홍성에서 느낀 감정을 담아낸 눈물이 모아져 맺혀 있다. 또 잎의 부분에는 황동의 부스러기들이 뿌려져 있는데, 이것은 〈Appendix I〉와 〈Appendix II〉에서 이어진 변형의 연속성을 드러낸다. 작품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들은 또 하나의 전체로 묶여져 서로를 풍부하게 만들어가는 관계에 있다. 〈Appendix III〉는 개별적인 의미와 함께 이 모든 설치물들이 하나의 《Appendix》가 될 수 있도록 구성한다.
말린 연잎은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유한한 존재, 생명을 상징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멸과 변화, 그리고 탄생의 과정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 나아가 사물이 단순히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변형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암시한다. 잎사귀가 지고 나서도 그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주카야의 작업은 지속적인 연결성을 강조한다.
황동 부스러기는 〈Appendix I〉를 제작하면서 발생한 버려져야하는 부산물로서, 쓰임을 다한 물질이다. 하지만 〈Appendix I〉와 함께 전시되는 방식으로 그 또한 과거의 존재했던 하나의 사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황동 부스러기는 말린 연잎과 결합되어 오래되고 쓸모 없음의 맥락을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쓸모 없음은 주카야에게는 복합적이며 감정적인 형태의 기분으로 다가왔는데, 이는 눈물로 치환되어 황동 부스러기가 섞인 말린 연잎과 어우러져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우리가 자연이 순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노화나 고통, 그리고 상실은 언제나 슬픔을 동반한다. 주카야가 제시하는 눈물은 이와 같은 순간의 감정을 응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결합이 단순히 고통과 상실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급한 바와 같이 뿌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력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Appendix III〉에서 뿌리의 역할은 황동으로 만들어진 기둥이 대신한다. 작품 속 황동 기둥은 주카야의 경험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요소인데, 앞선 〈Appendix I〉와 〈Appendix II〉와의 맥락을 이웃시킨다. 어쩌면 그녀의 경험과 이를 예술로써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일련의 태도는 뿌리의 역할처럼 예술가로서의 역할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변형은 단순한 소멸 혹은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와 의미의 탄생을 지시하는 것과 함께 이러한 것이 예술의 역할이자 생존 방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겠다.
변화 속에서 발견하는 존재의 다층성
전시 《Appendix》는 〈Appendix I〉, 〈Appendix II〉, 〈Appendix III〉가 각각의 개별적인 의미를 지니면서도 서로를 연결하는 복합적 관계를 통해 존재의 다층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앞서 소개하지 않았지만 〈Appendix I〉에서 황동을 부식시키는데 사용된 눈물은 이와 같은 연결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작품만 보자면, 〈Appendix I〉에서 눈물의 흔적을 직접적으로 찾기는 어렵지만, 그녀가 제시하는 작품 정보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제시된 정보가 사실이라면 〈Appendix III〉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설치 된 눈물은 〈Appendix I〉와 함께 이와 같은 순환적이고 다층적인 연결을 명확히 증명해준다.
〈Appendix I〉로부터 시작하여 〈Appendix III〉까지 이어지는 전시의 내용은 시간으로 출발해서 존재의 의의로 도착하게 되는데, 존재자는 시간에 속박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주카야의 이번 전시는 이러한 모순된 상태를 탐구하면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고정된 정체성을 넘어서는 다양한 정체성을 제시한다.
또한, 주카야의 작업은 단순히 개인의 경험을 넘어,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보편적이지 않은 주카야만의 개인적인 정체성이 보편적인 서사와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규정하기 힘든 이데올로기 너머의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레퍼런스들을 모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살펴본 바와 같이 《Appendix》가 구성된 동선은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들이 작가의 경험을 거쳐 서로를 더욱 보충설명하고 있기에 ‘Appendix’라는 제목이 이와 같이 붙여졌을 거라 추론할 수 있겠다.
전시 제목 ‘Appendix’는 ‘부록’이라는 의미이다. 부록은 하나의 글에서 전체 흐름을 헤치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개념이나 내용을 설명한다. 부록은 본문을 읽으며 놓칠 수 있는 세부 사항이나 맥락을 제공하여 이해를 돕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Appendix》는 사회에서 부록처럼 설명되어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대상들, 즉 쓸모를 다하여 맥락을 잃어버린 대상들에 새로운 맥락을 입히는 작업이다. 그래서 주카야의 작업은 버려진 물체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면서, 그것들이 지닌 과거의 맥락과 현재의 정체성을 이웃시킨다. 이를 통해 그녀는 존재의 다층성과 변형 가능성, 다시 말해 부록이 지닌 맥락처럼 잊히거나 무시되었던 사물들이 다시 다른 페이지에서 주제로서 자리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시가 끝나면 전시장에서 맥락을 만든 사물들은 또 다시 버려질 운명에 놓여있다.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이에 대해 변호하자면 이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가 재활용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연잎의 뿌리가 땅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듯이, 주카야의 작업도 다른 맥락 속에서 다시 발견될 수 있는 잠재력을 내포한다. 그렇기에 주카야의 작업은 의미를 상실한 존재들이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해주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새롭게 쓰여질 이야기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2024.12. ACK 발행. ACK (artcritickorea)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December. 2024, Published by ACK. The copyright of the article published by ACK is owned by its au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