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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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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라
염원(鹽原)은 소금이나 광물로 뒤덮인 평원이고, 염원(念願)은 간절한 바람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현실과 다른 걱정 없는 세상을 바라는 염원을 담아 무릉도원과 같은 낙원을 꿈꿔왔다. 이러한 염원이 어느 한 시대에 머물겠는가. 재난이 닥쳐 염려를 공유하던 사람들의 모습은 전염병이 도래한 최근에도 있었다. 그 시기를 겪은 예술가의 작업에는 재난의 그림자가 피할 도리 없이 섞여 있다. 경직된 사회를 경험한 이들은 치유와 정화의 세상을 꿈꾼다. 자란 지역의 평화로운 모습에서 기묘한 지점을 발견한 이수현은 고요함의 또 다른 모습, 생경함에 보통의 염원을 담아 동그란 소금-염원(鹽圓)으로 만들어진 정원을 우리 앞에 선보인다.
“저기요, 도대체 어디로 가야 상가가 나올까요? 가도 가도 숲밖에 안 보이네요.” 도시 한가운데의 산책길에서 만난 낯선 이의 질문이 평화로운 풍광을 되돌아보게 한다.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간극이 바로 여기 이 도시 속 울창한 나무로 뒤덮인 산책길에 있었다.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주목하였다는 이수현 작가의 추상적인 말은 여러모로 작품의 결과 비슷하다. 경외하고, 향유하고, 속하고, 차단하고, 피하고, 섞이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자연 속 인간’과 ‘인간 속 자연’을 왔다 갔다 한다...
박준수
몇 해 전부터 나는 공공연히 사석에서 미술판에도 기획자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대중음악 시장이 조용필과 서태지 같은 슈퍼스타 아티스트로 대표되었던 시대에서 SM, YG, JYP, 하이브 같은 대형기획사의 시대로 바뀌었고, 최근에는 뉴진스의 어머니 민희진 프로듀서와 같은 기획자의 시대로 변화해 가는 것을 보며, 한국 미술판에도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그리고 박서보, 이우환 같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시대를 지나 갤러리현대, 국제갤러리와 같은 국제적 명성을 가진 메이저 갤러리 시대가 왔고, 점차 기획자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 글에서 언급하는 기획자는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평론가, 컨텐츠 크리에이터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기획자의 시대에는 필요한 요건이 몇 가지 있다. 대중음악씬이 그랬던 것처럼 재능 있는 아티스트가 많아져야 하고, 전문적으로 아티스트를 양성하고 매니지먼트하는 기획사가 충분히 있어야 하고, 대중과 평단의 폭발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이런 요건들이 한국 미술판에도 일어나고 있다...
김영기
공감각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어느 천재 수학자의 수 감각의 비결을 물으니, 숫자에서 색깔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며, 때때로 맛이 느껴진다고 한다. 또 다른 예로, 색깔에 따라 냄새와 습도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우리도 종종 간접 체험한다. 이를테면 오디오에 달린 시각화 패널은 소리를 보는 경험인 셈이다.
김서량은 대상을 귀로 더듬는다. 직관적인 무언가를 전달하기에는 시각이 여러모로 간편하고 유리할 텐데 굳이? 겉껍질 너머 복잡다단하고 깊디깊은 삶의 현장이나 시간의 층위를 묘사하는 데엔 더 나은 많은 방법이 있다. 그중 하나는 소리로 사생하는 것이다. 엄마 배를 바라보며 ‘안녕 아기야’ 하는 대신, 초음파 진단으로 그 속내를 그리는 것이다. 이번엔 대구의 등과 배를 초음파로 심층 진단한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놀라는, 위로든 옆으로든 끝 모를 고층 아파트의 숲을 조망한다. 중구의 공구상가를 파헤치고 공업사 사장님의 삶을 들여다본다.
“척척, 끼익~ 척척척..” 윤활유가 부족한 듯 종종 이질적인 마찰음이 뒤섞인 기계 소리, “덜커덩” 바닥의 단차를 생생히 전하는 카트의 진동, 귀 기울여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대화 뒤로 늙은 1톤 트럭의 탁한 배기음이 멀어져 간다. ‘사운드 설치’의 방식으로, 실제 전시 공간에 감응하여 마치 몸체가 소리로 된 기물들을 엮은, 일종의 ‘장(field)’을 결과물로 선보인다...
박천
시간과 존재에 대한 이원적 접근
시간과 존재에 대한 동서양의 관점은 서로 다른 강들이 하나의 바다로 흘러 모이는 것처럼, 각기 다른 노선을 가지지만 결국에는 공존하게 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격언은, 시간을 직선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흐름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서양의 사유와 반대로, 동양에서는 시간을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이해하며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되풀이된다는 관점을 지닌다.
말한바와 같이, 흐르는 강의 방향처럼 서양에서의 시간은 직선적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두고, 뉴턴의 절대적 시간 개념을 통해 강화된 시간이라는 개념은, 하이데거에 이르러 "존재는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는 관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과거에서 미래로만 나아가는 그 직선적인 흐름 속에서 존재는 철로 위의 기차처럼 단일한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시간을 순환적으로 바라보는데, 불교는 모든 것이 영속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도교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순환적 시간 속에서 존재를 논한다. 이미지로 표현하자면, 시간은 직선이 아닌 원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 안에서 존재는 무한히 재구성된다...
이수현 개인전 <흩어지는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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